가난한 너를 위하여 [2부 4월 4일]
카페에서 제자를 기다렸다. 테라스에 앉아 가져간 시집을 꺼내 읽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허공을 서성이는 진한 커피 향과 어우러져 어두웠던 마음을 환기시킨다. 책을 덮고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경을 벗은 채 무르익은 오후의 햇살을 잠자코 음미했다. 성스러운 무기력이 뇌 속에 가득 고인다. 졸음이 쏟아지려는 찰나.
여전하시네요, 나를 보며 웃는 녀석.
아이는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나 때문이냐고 물었다. 영향은 받았지만 까닭의 전부는 아니란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고 했다. 그리 사는 나를 한량이라 힐난하던 녀석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하여 함부로 응원할 수가 없었다. 책상에 앉아 골몰하는 만큼 대가를 얻는 직업이 아니기에. 이 불우한 아이가 시인 여림의 뒤를 따르지는 않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꿈이 없어 막막한 사람들 사이에서, 꿈꾸는 일조차 사치인 너의 처지. 같은 나의 처지. 조언을 구하러 나온 제자에게 어떠한 말도 해줄 수가 없어 식어버린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희망과 체념 중, 무엇이 너를 살게 할까.
아이는 테이블을 밝히던 화병에서 꽃 한 송이를 꺼내 나의 가슴에 꽂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해하는 나에게 말한다. 곧 스승의 날이잖아요. 대신이에요. 걱정 말아요. 선생님은 저를 망치지 않았어요.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글쓰기를 몰랐다면 이 끔찍한 삶을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오히려 나를 다독이는 제자의 위로. 누가 선생인지.
서점에 들러 원하는 책 몇 권을 사주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는 녀석을 보니, 어릴 적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빈 노트 하나가 없어 찢어낸 일력 뒤에 이야기를 끄적이던, 그것을 엮어 책인 양 소중히 간직하던 나. 매일 밤 호모 스크리벤스를 꿈꾸던 아해는 어디로 갔을까. 기꺼이 글쟁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겨우 살아지다 못해 사라지려는 겁쟁이만 여기에 남아 있는데.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 용기를 내 제자에게 비루한 반성문을 적어 보냈다.
나는 이제 글을 놓고 싶고
너는 이제 글을 쓰고 싶고
너나 나나 예술이 고픈데
원할수록 배만 고프네
희망이 형벌이 되고
열심이 결핍을 낳는
헤모글로빈 대신 적빈을 품게 된
우리의 핏빛 운명
내일 없이 어제뿐인 시간의 함정 속에서
영혼 없이 나누는 안녕은 과연 hi일까 bye일까
죽고 싶은 자가
죽어가는 이에게 건네는 악수 따위 무슨 소용인지
그.
러.
나.
끝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마주 잡은 차가운 손과 차가운 손이
서로를 녹이더라는, 당연한 기적
나의 아이야. 너로 인해 다시금 펜을 든다. 부디 작가가 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작가로 머물기를. 끝끝내, 꿋꿋이.
image_©Laura Makabres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