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흥망'에서 '전쟁'보다 '평화'를!
[잊혀진 '삼산양수', 양주 회암사지] - 2013. 4. 21..
"저는 돌아가 어디에 살아야겠습니까?"
"'삼산양수'에 터를 잡아라..."
14세기 고려말에 인도에서 온 '지공화상'이라는 선사가 고려에 2년 넘게 머물다 돌아간 후, 고려 승려 '나옹화상'이 지공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귀국전 나눴다는 선문답이라 한다.
나옹은 '삼산'을 삼각산(북한산), '양수'를 임진강-한강으로 해석하여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터를 잡았단다.
기록상으로 회암사는 12세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니 나옹이 '삼산양수'를 따라 크게 중창했을 것이며, 지공이 고려에 있을때 회암사를 들러 '천축국에 있는 사원과 비슷하다'고 평한 것도 나옹의 '삼산양수' 해석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만큼 회암사는 고려시대부터 웅대한 명찰이었을 텐데, 16세기경 조선의 유생들 소행으로 추정되는 방화로 인해 지금은 '회암사지'로 남아있다.
조선 건국후 이성계와 함께 한양을 수도로 정한 무학대사 또한 지공화상의 제자로서 회암사에 머물렀다는데, 무학은 '삼산양수'를 세부적으로 해석하여 '삼산'을 삼각산-용문산-관악산으로, '양수'를 북한강-남한강으로 보아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추천했다는 설도 있단다.
이후 태종에 의해 상왕으로 물러난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올라가기 전 무학이 있던 회암사에 머물기도 하였고, 세종의 둘째형인 효령대군 등의 불자들에 의해 크게 흥했다지만 지금은 넓은 절터만으로 후세에게 역사적 흥망의 잔재를 보여주고 있다.
어린 자녀들은 그런 상념일랑 아랑곳없이 회암사지 바로옆이 군부대라는 말에 필받아 썩은 나뭇가지 들고 전쟁놀이에 여념이 없다.
얘들아,
역사의 흥망에서 전쟁보다는 평화가 더 중요하단다.
'회암사지'보다 '회암사'가 남았더라면 더 낫지 않았겠느냐!
(2013.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