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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Apr 22. 2016

어느 재즈 까페

꽁트 no. 25

두 페이지로 구성된 메뉴판을 받았다. ‘잇츠 온리 어 페이퍼 문’이 엘라 피츠제럴드의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글씨로 쓴 메뉴에는 커피 원두 산지의 이름들이 죽 나열되어 있다. 탄자니아, 브라질, 킬리만자로, 코나, 에티오피아, 케냐, 에콰도르, 페루. 어느 곳 하나 가본 적 없는 이국의 이름들이다.  신맛, 쓴맛, 바디감 등의 용어들이 쓰여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분명히 자각되지 않는다. 


좋은 걸로 주세요. 그런데 몇 시까지 하죠? 


열두 시까지라는 답을 듣는다. 휴대폰 화면을 켜본다. 아홉 시 삼십칠 분이다. 이곳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어 거리에 한참 내리고 있을 눈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우 하이 더 문’으로 곡이 바뀌었다. 테이블 앞의 무대에는 무명의 재즈밴드가 다음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까페로 들어오면서 공연 시간을 확인했었다. 이십삼 분 후면 저들의 공연이 시작된다. 큰 관심은 없다. 애초에 현대 재즈라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있을까. 블루스와 스윙, 비밥과 쿨을 거치면서 재즈는 보여줄 것을 다 보여준 것이 아닌가. 클래식이 과거의 영화를 되찾으려면 왕정복고와 귀족의 시대가 재림해야 하는 것처럼, 재즈가 명예를 회복하려면 흑인 노예제 사회가 재래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을 굳이 오늘 같은 날 하고 있을 이유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왕당파에도 KKK단에도 적을 두고 있지 않으니까. 심지어 이제는 직장에도 적이 없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목소리가 멈춘다. 무대 위에 연푸른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앳된 얼굴의 여자가 올라 겨자 색 조명이 쏟아지고 있는 그랜드 피아노 좌석에 사뿐히 앉는다. ‘문 리버’다. 여자의 나이를 추측해본다. 스물셋 정도이고, 남녀 공학이 아닌 여대의 대학생이겠다. 애인은 아마도 없어 보인다. 그 사이 커피가 나온다. 종업원이 커피의 원두를 말해주었지만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오늘 이 까페의 주인에게는 도연명이라도 빙의를 한 모양이다.  달과 관련된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보름달이 부드럽게 뜬 밤에 천변을 거닐다 한 여인과 키스를 한 일이 있다. 달빛을 삼킨 것 같은 입맞춤이었지. ‘문 리버’의 강물이 멈춘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다. 쓰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나와 밴드를 소개한다. 기타리스트인 그는 짧은 머리를 왁스를 발라 한껏 치켜세웠다. 키는 크지 않지만 언뜻 보아도 단단한 근육이 옷 속에 감춰져 있을 것만 같다. 허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해 보이고 손가락은 과히 가늘고 길다. 옆에 커다란 콘트라베이스를 품고 있는 또 한 명의 남자는 제 악기에 맞춰 살을 찌운 것만 같다.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이 밴드의 멤버다. 그들은 곧 연주를 시작하려고 한다. 


잠깐만, 그것이 옳은 판단일까 고민스럽다. 아무리 구석구석을 살펴보아도 관객이라곤 단 두 사람뿐이다. 그마저도 한 사람은 남자가 밴드를 소개하는 와중에도 읽고 있던 책에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은 여자다. 말리고 싶었지만 연주는 시작된다. 제목도 모르는 곡이다. 하는 수 없이 귀를 기울여 본다. 불협화음이다. 아무리 재즈라고는 하나 이래선 안 되지 않나 싶을 정도다. 휴대폰 화면을 켜본다. 열 시 십 분. 트위터 타임라인이라도 훑어볼까 하는데 눈 앞에 수심 가득한 기타리스트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만다. 한 숨을 내쉬며 다시 무대를 바라본다. 무대 쪽에서도 관객 따위는 안중에 없는 것만 같다. 그나마 안심이다. 십오 분 정도가 지나자 한 곡의 연주가 끝이 난다. 박수를 쳤다. 그런데 저편의 책 읽는 여자는 박수조차 치지 않는다. 아, 원래 쳐서는 안 되는 것인가. 


감사합니다. 이번 곡은 ‘만나지 못할 세 사람’이라는 저희의 자작곡이었습니다. 다음 곡도 자작곡입니다. 제목은 ‘별들의 저녁식사’입니다. 


건조하고 기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기타리스트의 목소리. 헌데 곡의 제목만은 또렷이 들렸다. 피아니스트가 모짜르트의 반짝반짝 작은 별을 변주하면서 곡이 시작된다. 별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한다. 이어서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저음이 까페 안을 감싼다. 저녁 식탁을 차리기 시작한다. 별들이 총총걸음으로 식탁 앞에 모인다.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순으로 음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저녁 만찬 준비가 끝이 나자 강렬한 전자 기타의 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전자 기타. 세 악기가 왁자지껄한 대화를 나눈다. 별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화해한다. 슬퍼하고, 분노했다가, 우울해지고, 결국에는 평화를 되찾는다. 별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하나의 별은 발걸음이 축축 처진다. 콘트라베이스로 음이 바뀐다. 짙은 허무를 드리우며 곡이 끝난다. 


감사합니다. 2부는 십 분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멍하니 무대 쪽을 바라본다. 방금 그 연주는 대체 무엇이었나. 엄청난 연주가 아닌가. 책 읽는 여자의 테이블을 살핀다. 세상에 이미 자리를 뜨고 없다. 밴드가 연주하는 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는 말인가. 그 당당한 무례가  놀랍다. 밴드의 멤버들은 스스럼없이 종업원과 대화를 나눈다. 마치 방금 전의 공연 따위는 의무방어에 지나지 않았다는 듯이. 다른 손님은 전혀 들어올 기색이 없다. 혼자서 저런 엄청난 연주를 감당하고 있을 용기가 없다. 그만 나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일곱 번 정도 반복한다. 2부가 시작되어버린다. 


감사합니다. 2부 시작하겠습니다. 좀 깁니다. 


기타리스트는 이쪽을 보고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여기에 없는, 어쩌면 자기 상상 속에만 존재할 수백여 명의 관객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 눈 앞에 앉은 한 사람의 관객이 음악을 어떻게 듣고 있는가 하는 것은 적어도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혹은 그들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음악을 하고 있었다. 


세 번째 곡이 시작된다. 이번에는 콘트라베이스의 연주부터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듯 연신 입을 끔벅거리며 한 음 한 음을 흘려보낸다. 이어 나풀거리는 피아노 음이 들어온다. 콘트라베이스,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다시 피아노 순으로 음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마치 연인인 두 사람이 눈이 내리는 저녁의 길을 걸으며 나누는 대화 같이.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연인은 서로의 몸을 가까이한다. 둘의 체온이 하나의 온도를 이루며 추위를 조금씩 몰아낸다. 둘에게는 그만큼의 따스한 세계가 만들어진다. 콘트라베이스가 공기를 감싼다. 피아노가 그 속에서 자유롭게 팔랑거리며 춤을 춘다. 어쿠스틱 기타의 음이 시작된다. 명곡 '빈센트'의 변주.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펼쳐진다.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가 그 하늘을 올려다본다. 연인은 영원을 약속한다. 키스를 시작한다. 기타리스트가 오른손 검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인다. 음이 점점 고조된다. 기타리스트가 '한 번 더'를 알린다. 격정적인 음들이 까페를 가득 채운다.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제발 제발 하는 심정이 된다. 기타리스트가 한 번 더 검지 손가락을 든다. 그렇지! 손아귀에 땀이 흥건하다. 기타리스트는 어쿠스틱 기타를 내려놓고 전자 기타를 집어 든다. 무대가 뒤흔들린다. 피아니스트가 정신을 잃은 채 건반을 쳐나가기 시작한다. 초절기교. 콘트라베이스는 이미 연주자 스스로가 콘트라베이스가 되어버렸다. 


아, 아아... 기타리스트가 한 번 더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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