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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Apr 08. 2016

벚꽃이 지던 밤, 우리는 청계천변을 걸었어

꽁트 no. 23

당신의 첫 번째 기억은 뭔가요?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굳이 단도직입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을지는 나 역시 확신이 없지만. 우리는 한 달 후면 오픈할 예정이라는 청계천변에 서서 물길이 흐르는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우리는 영풍문고에서 처음 만났고, 그 전에는 전혀 만나지 않던 사이였으며, 서로의 본명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운영자님이라고 불렀고, 나는 그녀를 줄리아라고 불렀다. 나는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싸이월드 클럽 ‘로만띠끄’의 운영자로 1년째 활동 중이었다. 회원수는 120여 명에 달했지만 실제로 글을 쓰는 것은 나뿐이었고, 댓글을 달아주는 것은 그녀 뿐이었다. 불필요한 데이트 신청 메일 따위를 받지 않기 위해 나는 성별을 숨긴 채 활동했는데, 덕분에 양성 모두에게 틈틈이 번개 신청 메일을 받고 있었다. 그런 쪽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으므로 답장 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메일을 보낼 시간에 댓글이나 좀 달아주라고!라고 답 메일을 보내볼까도 생각했지만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줄리아는 로만띠끄에서는 ‘줄리’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다. 가입 인사 글을 남기는 게시판에 그녀는 <비포 선라이즈>에 출연한 줄리 델피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닉네임의 변을 남겼었다.


그날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원래 있던 친구와의 약속이 펑크가 났고, 봄은 너무나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나는 연애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지 2년째였다. 심심한 나머지 로만띠끄에 접속을 했고, 같은 시간에 역시 심심해하고 있던 줄리아로부터 즉석 채팅 쪽지를 받았다. 평소였으면 무시한 채 클럽을 나왔을 텐데, 그날은 별생각 없이 수락하고 말았다. 채팅을 하면서 우리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봄날은 간다>까지 이어지는 허진호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음악 얘기로 넘어갔다. 그녀는 레니 크레비츠라는 흑인 팝스타에 대해 소개했고, 나는 비틀즈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나는 농담처럼 그녀를 줄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먼 옛날부터 그러기로 약속한 것처럼 영풍문고 앞에서 곧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끝까지 내 성별을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녀는 내가 XY 염색체의 소유자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약속 장소에 1시간이나 일찍 나갔는데, 그녀 역시 1시간 일찍 나와 있었다. 그녀는 여태껏 번개로 만나보았던 여자들과는 다르게 굉장한 미인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우리는 문학 서가를 기웃거리며 서로의 문학 지식을 뽐내다가 밖으로 나왔다. 밤의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바람에서 몽글몽글한 감촉이 느껴져 기분이 무척 좋았다. 마무리 공사 중인 청계천변을 걷자는 건 그녀의 제안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옛 연인과 닮아 있었다. 천변으로 가는 길에 벚꽃이 만개한 벚나무를 보았다.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진다는 벚꽃잎을 눈을 감고 잡는 놀이를 했다. 그녀는 잡았고, 나는 잡지 못했다. 그녀는 올봄에는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것 같다고 좋아했다. 나는 잡지 못했으므로 그 상대가 내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아니, 그런 건 어쩌면 미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손톱 크기의 벚꽃을 고이 모셔둔 가방을 든 그녀와 나는 천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당신의 첫 번째 기억은 뭔가요?


나는 꽃밭을 기어 다니고 있는 장면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두 살 때의 기억이라고. 그 나이 즈음에 나는 밀양의 꽃동산이 있던 마을에 살았다. 다른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풍경이라고, 어떤 고통이 찾아들 때에도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운 기억이라며 활짝 웃었다. 언젠가 누군가 당신이 만난 여자 중에 가장 미소가 아름다웠던 여자는 누구였나요 라고 물어본다면 줄리아를 꼽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웃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은?이라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아래로 내려가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나로 말하자면 갑자기 출동한 구급차가 아니면 절대 차가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새벽 3시의 동네 1차로의 신호등도 지키는 부류였다.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에 이끌려 아래로 내려갔다.


완공 전의 청계천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준비 중인 무대 같았다. 그녀는 <비포 선 셋>을 보았는지 물었다. 당연하다고 답했다. 그 말은 당연히 손을 잡아도 좋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손을 잡았다. 종로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물길을 따라 걸었다.


그녀의 첫 번째 기억은 바다라고 말했다. 모래톱에 앉아 모래성을 쌓다가 바다를 바라보는데 까마득히 멀리 수평선에서부터 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장면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어떤 고통이 찾아들 때에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고 나를 흉내 내어 말했다. 그녀의 고향은 남해였다. 우리는 서로 가까운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며 놀라워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우리는 키스를 할 뻔했다. 하지만 아직은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며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우리는 서둘러 서로를 알아갔다. 그녀는 좋아하는 음식과 인상 깊었던 여행지를 물었고, 나는 앞으로 이루고픈 꿈과 저지르고 싶은 일탈에 대해 물었다. 나는 떡볶이를 떠올렸으나 알리오 에 올리오라고 답했고, 옛 연인과 같던 강릉이 떠올랐지만 혼자 갔던 여수 밤바다를 얘기했다. 그녀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고, 강남의 클럽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춰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여수로 여행을 가서 알리오 에 올리오를 먹고 밤바다에서 밤새 춤을 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아침에 동이 트는 것을 보며 시를 쓰고, 빈 유리병에 담아 유럽으로 띄워보내는 것이다. 우리 중 어느 쪽도 그 계획을 ‘함께’ 실행하자는 제안은 하지 않았다. 그런 건 암묵적인 동의니까.


동대문에 다다르자 완연한 밤이 되었고, 드문드문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어두운 천변의 돌길을 계속 걸었다. 길은 동대문 평화시장을 지나쳐 신설동 방향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이 길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감을 표했다. 그녀는 내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어떤 노래가 좋으냐고 물었다. 그녀는 비틀즈의 곡 중 하나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예스터데이’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존 레논의 ‘오 마이 러브’를 불러주었다. 노래를 하는 동안 그녀는 내게 더 다가와 팔짱을 꼈다.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노래가 끝나고 한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깊이 알아서는 곤란하다는 묵약이 있었다. 어른이란 그런 것이라는 데 우리는 동의하고 있었다.


그녀가 시계를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최대한 쿨한 답을 찾아내려고 애쓰다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 가방 속에 든 벚꽃 잎과 같은 거겠지요.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폴 매카트니가 부른 ‘줄리아’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고 조만간 ‘로만띠크’를 폐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벚꽃이 지던 밤이었다. 한때 우리로 존재했던 그녀와 나는 그날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청계천은 공사를 마쳤고 벚꽃은 다시 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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