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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Mar 14. 2024

유리

꽁트 no. 45


- 안녕, 난 신이야.


올해 꽃샘추위가 정말 심하구나 싶었다. 멀쩡해 뵈는 여자아이도 실성할 정도의 추위라니. 정말 신이 있다면 그이는 사디스트이거나 몹시 심심한 녀석이 틀림없다. 종교인들의 말처럼 그이가 전지전능하다면 대체 이 절망과 희망의 무한 술래잡기를 계속할 이유가 무엇인가. 천국이 따로 있는데도, 구태여 금성과 화성 사이에 지구를 놓고, 거기다 어디 잘 살아보라며 80억 인간을 복작복작 흩뿌려 놓은 것이 신이란 작자다. 그리고선 흑막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음흉하기 짝이 없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내가 1년 넘게 직장을 못 구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 직장 구해줄까? 그게 소원야?


나는 여자아이의 동그란 안경을 유심히 살폈다. 엑스리얼 에이알 안경 최신형 같은 것은 표정을 스캔해서 마음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스마트글래스의 혐의점은 찾을 수 없었다.

- 이거 보통 안경이야. 신이지만 시력이 좀 나빠. 폰 많이 봐서 그런가.


나는 그냥 지나가던 흔한 무당이려니 하고, 강변 벤치에서 일어섰다. 붙잡을 줄 알았던 여자아이가 ‘잘 가-’하고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조금 귀엽나. 집에 돌아온 뒤로 계속 여자아이 생각이 났다.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이면지 뒤에 간단히 스케치를 해두었다. 구직급여를 받는 동안 워크넷 연계로 디자이너 직무연수를 받았던 게 요긴했다. 그걸로 직장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완연한 봄이 왔지만, 여자아이는 다시 오지 않았다. 다섯 번 정도 그날 공원의 벤치를 찾아가 서성였다. 그러는 사이 직장을 구했다. 공항에 입점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의 서빙 담당이었다. 그렇지만 주방에서 설거지를 더 많이 했다. 내가 온 뒤 채용된 아르바이트생의 영어 실력이 훨씬 훌륭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설거지는 내가 훨씬 잘했다.

신과 재회한 것은 늦여름 무렵이었다. 마감 시간인 밤 10시를 10분 남겨두고 여자아이가 레스토랑 문을 열고 나타났다.

- 오랜만. 아직 안 끝났지?


너무 자연스럽게 등장해서 스토커로 의심할 기분조차 나지 않았다. 영 한가한 공항이라 9시 이후로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여름부터 마감은 늘 내가 전담하고 있어서, 다른 직원들은 요리사까지 이미 퇴근한 뒤였다.

- 손님, 죄송합니다. 지금은 음료밖에 주문이 안 되는데요.

어디 보자~, 레모네이드.


신의 취향은 레모네이드로군. 홀에 흐르는 뉴진스의 음악을 들으며 긴 유리컵에 레모네이드 주스를 따랐다. 여자아이는 그런 내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관찰했는데, 그리 싫지 않았다. 역시 좀 귀엽나. 내가 마지막으로 컵에 빨대를 꽂으려고 하자, 여자아이는 큰 소리로 “노노! 빨대 네버네버!”라고 외치며 질색했다. 벨을 누르면 됐지만, 직접 여자아이가 앉은자리에 레모네이드를 가져다주었다.

명색이 신인데, 플라스틱은 안 되잖아. 그린피스가 실망할 거야. 것보다 앞에 좀 앉아봐.


나는 순순히 여자아이의 앞에 앉았다.

- 유리야.

네?

- 내 이름 ‘유리’라고.

신이 이름도 있어요?

- 신은 이름이 없어야 해?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 그래, 꼭 그런 게 아니라서 함 지어봤어. 어때?

뭐가요?

- 이름 말야.

좋아요. 근데 왜 유리예요?

- 유리는 고체처럼 보이지만 실은 엄청 느린 액체인 거 알아? 그런 점이 너무 깜찍하잖아. 안 그래?

그런 것 같다고 해두죠.

- 내가 준 직장은 맘에 들고?

그쪽이 줬다고요?

- 직장 달라매.

제가 직접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 아, 그렇구나! 이런 또 실수했다. 어떡해? 물릴까?

아뇨, 그래도 백수보단 나으니까.

- 그치? 내게 감사하며 살아.

감사합니다.

- 옳지 옳지.


유리는 그 뒤 나를 앞에 두고 10분간 휴대폰을 노려 보며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휴대폰의 창백한 푸른빛이 유리의 얼굴을 더 희게 만들었다. 다음에 만나는 것은 또 몇 번의 계절이 지난 뒤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턱을 괸 채로 유리를 들여다보는 일이 어쩐지 오랜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 좀 기억이 나?

뭐가요?

- 아직이구나.

그러니까 뭐가요?

- 신앙심을 좀 길러봐. 우주란 건 말야, 믿는 대로 보이는 법이야.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싶었다. 역시 대순진리회 그런 종류일까.
   

- 그게 아니구. 하여튼. 다 마셨다. 이제 나 간다. 더 할 말 없지?


유리는 떠났다. 레스토랑의 불을 끄며 유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도 내내 생각했다. 이면지 스케치에 디테일을 추가했다. 눈썹의 굵기와 점의 위치, 입술 모양이 바뀌자 훨씬 유리다워졌다. 해가 바뀌고 다시 봄이 오는 동안 매일 유리를 그리워했다. 밤하늘의 손톱달도 유리였고, 불어오는 실바람도 유리였다. 레모네이드의 투명한 연노랑빛을 보면 심장이 뛰었다. 느리게 춤추는 물결을 사랑하게 되었다. 일이 고단할 때면, 유리가 앉았던 자리를 바라봤다. 어느덧 나의 온 세상이 유리였다.





처음 만났던 벤치에 아마도 99번째 찾아갔을 때, 드디어 유리를 만날 수 있었다. 눈부신 여름이었다. 나는 있는 힘껏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유리 옆에 앉았다.

   

-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스크류바.

- 여기 있어야 돼요.

응.


우리는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핑크색 스크류바를 후룩후룩 돌려 먹었다. 행복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엔딩 장면이었으면 했다.
   

- 아니야 아니야! 그런 소원은 함부로 또 빌지 마! 지난번에 그래서 우주가 끝났잖아. 재밌을 것 같아서 들어줬다 후회 막심였어. 쿼크부터 하나하나 다시 쌓는 것도 중노동이고, 뭣보다 널 다시 만날 때까지 135억 년 걸려서 지루해 죽는 줄. 넌 대체 뭘까? 내가 만든 게 아닌 건 분명해. 니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겠어. 신기해 너무. 신에게 이런 감정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넌 모르지?

신도 모르는 게 있어요?

- 그러니까! 그러니까 엄청난 거라니까 넌. 초희귀 케이스야. 신종 사기 아니구. 코인 투자 권유 아니구. 다단계 아니구. 신도 모집 아닌 건 저번에 말했지?

하하하.


나는 유리가 신이란 말을 믿기로 했다. 이제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스크류바를 해치운 우리는 손을 맞잡고, 어린 빛들이 와글대는 강변을 산책했다. 유리가 반짝 말했다.


- 설거지 싫으면 취소하고 딴 소원 들어줄까? 자,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됐어요. 당신이 유리로 있으면 돼.

- 딩동! 정답! 합격이네 자네.


신과 나는 일렁이는 태양빛 속으로 나란히 걸어갔다.



2024. 2. 16. 장명진.




* 소설 플랫폼 '원페이지스토리(https://1pagestory.com/38421)' 14호 컬렉션 선정작입니다 : )  

* 그림은 일러스트레이터 '히로' 님의 작품입니다.


삽화 = 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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