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입구, 비빔국수

사랑 끝, 라이딩 시작 4

by 장명진


5월의 끝자락, 여름이 시작되는 주말이었다. 자전거 커피의 전기연료를 채우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선거 공약에 따르면 대한민국 최고의 레저스포츠 관광지대가 될 예정인 동네 강변을 따라서 달렸다. ‘시민 A’에서 ‘라이더’로 변신한 이들이 줄지어 돌진해오고, 나를 지나쳐 달려나갔다. 많은 사람들에게 ‘라이딩’이란 그 옛날 우뢰매의 에스퍼맨이나 데일리가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라이더가 되어 자전거에 탈 때 그들은 자전거도로 위의 히어로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에 비해 나는 늘 그대로 데이트를 나가도 좋을 복장으로 자전거를 탄다. 안전모 착용 권고 규정 같은 것은 불어오는 바람에게 실례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바람을 가르는 기분, 바람이 머리칼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아무렇게나 되어버려! 의 쾌감이 없다면 자전거 따위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도 나는 무규칙이종자전거시민답게 가지 않은 길목으로 핸들을 움직였다.


초여름의 햇볕이 깔린 비포장 흙길을 달려 낯선 장소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국수가게가 있었다. 국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운명의 계시라고 해도 좋을 일이었다. 퇴근 후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는 것처럼 2층에 위치한 국수가게의 계단을 올랐다.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비빔국수를 주문할 때까지만 해도 대단한 기대는 없었다. 뷔페식으로 반찬을 가져다 먹을 수 있다는 점도 흠 괜찮군 정도의 기분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비빔국수가 나오자 모든 것은 변했다.


이 비빔국수를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20대 초반의 어느 여름, 귀농운동 단체에서 주관한 농활 캠프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감자였던가, 상추였던가를 심기 위해 두 시간 가까이 호미로 밭을 갈았다. 몸의 수분이 모두 사라질 것처럼 땀이 쏟아졌다.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져 나는 잎이 무성한 나무의 그늘 아래 놓인 평상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나뭇잎 사이로 거대한 뭉게구름들이 인간세상을 구경하며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 신이 존재한다고 치면 워커홀릭보다는 좀 유유자적한 사람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밀짚모자를 쓴 현지의 농부 아주머니가 내게 반토막으로 자른 오이를 건넸다. 누운 채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대로 한 입 아삭 베어 물었다. 시원한 강물이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여름이구나… 라는 감상이 저절로 떠오르는 그런 맛이었다.


2022년 여름의 입구에서 만난 비빔국수는 왠지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2022라는 숫자는 아무래도 SF에 어울리는 숫자인 것만 같아서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그러나 년도를 지우고, 나이를 지우고, 모든 숫자를 지운 뒤 생각해보면 우리의 여름은 언제나 그저 여름일 뿐인 것이다. 맛있는 비빔국수를 먹고, 길게 이어진 한적한 오솔길을 자전거로 달렸다. 혼자인 것이 전혀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2022. 6. 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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