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오리빌라
<오만과 편견>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집필실은 현관문 옆의 1인용 탁자 하나였다. 하류 소설가들의 단골 핑곗거리 중 하나는 ‘집필실’이 없어서 좋은 글을 못 쓴다는 것이다. 하류 중의 1인인 나는 그 핑계의 애호가 중에서는 상류였음에 틀림없다. 돌이켜 보면 내가 쓴 작품 중에 그럴듯한 작품들은 대체로 그럴듯한 집필실이 없었던 때에 탄생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객관적 통계 따위 무시한 채, 이사를 가면 새로운 집필실 만들 생각에 들뜨곤 했다.
오리빌라는 15평 전용에 3평, 4평, 5평 정도 크기의 방 3개가 있는 공간이었다. 각각 침실, 서재, 라운지룸으로 배치하고 나니 집필실로 쓸 방은 없었다. 서재에서 글을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하실 테지만, 책이 가득한 정신 산만한 공간에서 하류 소설가는 도무지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담백하고,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이, 오로지 내 정신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필요했다. 제인 오스틴이 되기에는 애당초 글러먹은 것이다.
방이 없으면 방을 만드는 것이 인테리어 불도저 같은 나의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작을지도 모를 0.5평짜리 집필실 제작에 돌입했다. 가장 큰 문제는 초기 서재 인테리어를 거의 완성한 다음에서야 집필실의 이미지를 떠올렸다는 것이었다. 머릿속에 그려진 집필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재 인테리어를 모두 철거하고 다시 공간 면적을 계산해서 시공을 시작해야 했다. 글로 쓰니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3,000권이 넘는 책을 모두 빼서 다시 꽂아야 하는 지옥의 불구덩이였다.
다행히도(?) 2018년 당시의 나는 기괴한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그 모든 고통을 자처할 수 있었다. 이틀에 걸쳐 서재 인테리어를 제로로 돌리고, 처음 해보는 벽면 합판 시공 작업에 도전했다. 벽에 합판을 덧대는 작업은 비교적 순조로왔으나, 천정에 합판을 붙이는 작업은 도대체 우주의 어떤 힘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는지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천정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돌가루와 나의 DNA를 뒤섞는 과정을 겪은 후에야 나는 그 우주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완성된 0.5평 집필실은 갓벽하게 아름다웠으며, 동시에 기막히게 덥고 사무치게 추웠다. 가혹한 집필 환경 덕분이었는지 나는 그곳에서 내 작품 중에서 손에 꼽을 수 있는 두 작품 <데미안이 떨어진 날>과 <우리가 지금 멀리 있을지라도>의 초고를 완성했다. 별은 역시 짙은 어둠 속에서 반짝 떠오르는 법인 것이다.
정말 고생해서 만든 집필실이었지만 그곳에서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시절 썼던 내 글들을 다시 읽을 때면 세상에서 제일 작았던 나의 집필실이 여전히 떠올라온다. 조금 작가다운 말을 하자면 크던 작던 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곳이 바로 가장 위대한 집필실이다. 인테리어는 거들뿐. 이것은 지금 현재 내 생애 가장 훌륭한 집필실을 소유하고도 가장 게으르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2022. 9. 3.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