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득 Jan 28. 2024

그늘

240128

 아이는 그늘을 좋아했다. 날이 더울 때는 물론이거니와 추울 때도 그늘에 앉아있곤 했다. 나무 밑, 천막 아래, 산 중턱 정자까지 어디든 아이는 행복했다. 시간이 흘러 길거리에 그늘이 생길만한 울창한 나무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가게 앞 천막에 이유 없이 몸을 숨기기엔 아이의 몸이 너무 커졌다. 정자들에는 아무도 눕지 못하도록 구조물과 안내문이 붙어갔다. 정이 없어졌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과거보다 사람들이 각박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서늘한 곳을 찾아 지하로 들어갔다. 지하주차장, 건물의 비상구, 으슥한 골목길같이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으며 깊숙이 들어갔다. 대개 그런 장소들은 어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런 곳에는 비슷한 이들이 모였다.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들은 같은 삶의 지향을 공유했다. 자연스레 그들만의 아지트가 되어갔다. 점점 규모가 커지자 그늘 밖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새어나갔다. 그들의 그늘을 각박한 어른들이 '비행의 온상'이나 '양아치 소굴' 정도로 퉁쳐서 부르기도 했지만 장소야 언제든 옮길 수 있었기에 크게 상관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그늘을 떠나야만 하는 이들이 생겼다. 대학으로 진학하거나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그늘에서 하던 일들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혹은 더 이상 예전만큼 그늘의 삶이 즐겁지 않기도 했다. 몇몇은 여전히 그늘에 남는 것을 택했다. 어른들은 그들을 향해 도태나 실패 같은 단어가 어울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늘은 매력적인 장소인 모양이다. 새로운 아이들이 그늘로 찾아오니 말이다. 하지만 이젠 지하주차장, 비상구, 골목길도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다들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골목길의 담벼락을 허물고 빛을 비췄다.


 쉽게 주변에서 그늘을 찾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른들은 예전보다 살기 좋아졌다 말한다. 내겐 그 말이 그늘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밀어버렸다는 듯이 들린다. 그래서인지 그늘의 아이들은 땅 밑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지하보다 더 아래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 같은 종의 생물이 일정 기간을 넘어 다른 환경에서 살게 되면 번식조차 서로 불가능한 종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늘에서만 살아가는 인간들도 있다. 빛을 피해 땅으로 들어가는 두더지처럼 말이다. 그들이 먹고 자고 살아가는 방식은 햇살 아래 자라는 아이들과 현저히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그늘을 싫어하는 어른들은 존재한다. 그런 어른들이 언제 또 그들을 아래를 끌어내릴지 모를 일이다.





*모든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의 근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