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빈 Jan 11. 2023

프리워커 적응기 #1 베짱이는 퇴사해도 베짱이

나에게 프리워커란 돈과 시간,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었다. 노트북 하나만 가지고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마드의 삶이었다. 퇴사 후 내 일을 시작하며 인사이트와 정보를 얻기 위해 여러 강의들을 들으러 다녔고, 그 중 프리워커로 일하고 있는 강사님을 만났다. 그녀는 프리워커를 이렇게 정의했다.


계약을 통해 일을 하는 프리랜서와 달리
스스로 일과 프로젝트를 만들어 수행하는 사람

크... 너무 멋있잖아? 나는 프리워커가 되기로 결심했다. 무작정 하고 싶은 일들을 시작했다. 혼자,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건 회사 일과는 달리 신나는 일이었지만, 문제도 있었다. 타고 나길 느긋한 성격으로 인생 모토가 여유였던 나는 데드라인이 하루 이틀 남은 그 때서야 집중해서 업무를 후다닥 처리하곤 했었다. 때로는 데드라인의 스릴을 즐기는 것도 같았다. 혼자 일하게 된다면 스스로 데드라인을 만들어야 하는 프리워커로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직장인이었던 나의 업무 패턴은 주로 이러했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된 날


언제나 새로운 프로젝트는 설레지. 자, 가보자고! 신나게 데이터 수집, 자료 조사 등 베이스가 되는 일들을 시작한다. 하다 보니 데이터가 좀 보고 싶다. 시작부터 딴짓아닌 딴짓에 관심을 둔다. 간단한 거 같은데 오랜만에 리대시나 좀 파볼까? 데이터 팀이 짜 준 쿼리도 좀 들여다 보고 구글링도 하고 리대시를 좀 끼적거려 본다.


짜잔, 쿼리가 완성되었습니다.


세상 뿌듯함과 나에 대한 애정이 솟아 오른다. 아직 프로젝트는 개요 조차 잡히지 않았지만 내일의 내가 훌륭하게 해낼 것을 기대하며 오늘은 집에 가야겠다.



프로젝트 마감 D-2
또 새로운 업무가 도착했습니다.


데이터를 획득했으니 이제 대략적인 기획을 좀 잡아 본다. 나에게 기획은 끼적거림부터 시작한다. 데이터와 자료 수집 결과 방향성은 이런 방향으로, 필요한 건 뭐고, 언제까지 실행할 것인지. 핵심적인 내용을 딱 이렇게 2~3줄을 끼적거려 놓고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시작한다. 머릿 속에서 구체화를 시켜 본다. 이건 이렇게하고, 저건 저렇게 하고, 근데 이건 어떻게 실행하지? 고민이다. 떠도는 생각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하다, 의자도 빙빙 돌리고 쓰지도 않을 펜도 딸깍거려 본다. 그러다 떠오르지 않으면 커피를 사러 나간다. 여유롭게 커피를 들고 다시 앉아서 생각을 시작한다. 어떻게 할지 좀 떠오르는 것 같으면 2~3줄을 끼적거려 보고 또 고민을 한다.


그러다 갑자기 새로운 업무가 치고 들어온다.


" 이거, 간단한 건데... 좀 해줄 수 있을까요? "

" 언제까지요? "

" 최대한 빠르면 좋아요. "


회사를 다니면서 특히 이렇게 업무가 치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상사들은 뭐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커피 마시고, 의자 돌리고 펜 딸깍거리는 내가 한가해 보여서 였던 거 같다. 나는 죽을 것 처럼 일이 많고 미친듯이 바쁜 극한의 상황이 아닌 이상 이런 업무들을 거절하지 않는 편이었다. 극단의 P형이라 시간 관리나 업무 스케줄 정리는 잘 못하기도 하고 일단 해봐야 아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언제나 이런 일들은 일을 잘 거절하지 않고, 왠지 좀 여유로워 보이고, 만만한 나에게 치고 들어오곤 했었다. 그리고 간단한 거라고 했던 일들은 전부 간단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치고 들어온 업무를 처리하느라 힘들었으니, 남은 일들은 내일의 나에게 미루어 본다.



프로젝트 마감 D-1


오늘은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날이다. 오후부터 약간의 스트레스가 찾아온다. 마음은 급한데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이제 이것저것 떠다녔던 것들을 정리해 본다. 일단 저녁부터 좀 먹고, 리프레시를 해보자.

결국 오후 9시가 넘어서야 집중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나왔던 것들을 호다다닥 정리하고 적당히 살도 좀 붙여본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야근은 새벽까지 이어진다. 열심히 했다고도, 안 했다고도 할 수 없는 이 상황, 마감일 전 날마다 게으른 베짱이는 구슬프게 베짱베짱 울었다.



평화로운 새벽 퇴근길





그리고 퇴사 후


항상 이런 패턴으로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며 자기 주도적 업무(?)를 해왔던 나는 퇴사 후 정해진 데드라인이 없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카페에 앉아 이것저것 찾아 보고, 구상하고, 고민하다가 매일 처리하지 못한 TODO를 남기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나 혼자 모든 일을 해야하는 1인워커이기에 매일매일 해야 할 TODO는 수두룩하게 쌓여 갔다. 게으른 베짱이는 퇴사해도 역시 베짱이었다.

실행보다 고민을 많이 했던 나는 직장인이었을 때의 업무 패턴을 퇴사하고 나서도 똑같이 반복했다. 실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오히려 조급했다. 내 아이템을 다른 사람이 먼저 해버리면 어떡하지. 발만 동동 구르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이전 05화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제주로 떠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