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에도 게으른 베짱이의 버릇을 버리지 못한 나는 '뭘 어떻게 잘해볼까'라는 고민으로 미적거리고만 있었다. 이러다 수입 하나 없이 굶어 죽겠다는 불안감이 들자 게으른 내 몸뚱이를 움직이게 만들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세 가지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와다다다 일 벌이기
실행 없이 고민만 하고 있던 그때, 닥터 스트레인지로 유명한 배우 베네딕트 컴버베치의 동기 부여 영상이 떠올랐다. 3분 내외의 이 영상에서 그는 욕까지 섞어가며 절규하듯 하나만 계속 부르짖는다.
해! 그냥 해! 제발, 좀, 해, 그냥!
Just Do it!
퇴사 당시 나는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퇴사 전 하고 싶었던 것들, 해야겠다 생각하는 것들은 있었지만 뭘로 날 먹여 살릴 수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일단 일을 벌여 보기로 했다. 어떤 일을 하기 전 고민이 많은 나에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고민이 깊어지면 실행에 따라 올 문제만 생각나고 겁만 더 난다. 오래 고민하고 리스크도 따져 보고 생각 끝에 실행을 하면 모든 일이 챡챡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지만 내가 생각지 못했던 상상 초월의 이슈들이 발생한다.
어차피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철저하게 대비해도 일어날 이슈는 일어난다. 계획 없이 퇴사까지 한 마당에 그냥 저질러 보자.
그때부터 고민만 하던 것들을 일단 저지르기 시작했다. 스마트스토어와 쿠팡 스토어를 열었고 100개 이상의 상품을 소싱해서 올렸다. 블로그와 브런치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오디오 콘텐츠 채널을 오픈해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제주 한 달 살기의 팁과 노하우를 전자책으로 만들어 플랫폼에 판매를 시작했다. 프리랜서 마케터로 포트폴리오를 정비하고 서비스를 구성해 프리랜서 플랫폼에 업로드했다. 노션에 기록한 실행 중인 프로젝트만 10개가 넘었다. 오래 고민한 게 머쓱하게도 이 모든 것들을 하는데 2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기대와는 달리 뭐 하나 그럴듯한 수익이 나지 않았지만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다. 각각의 프로젝트들을 개선하고 디벨롭해 나가기 시작했다.
TODO 쪼개기
성실하게 일을 벌일 수 있었던 이유는 TODO 쪼개기가 있어 가능했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일이 너무 많아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를 때 썼던 방법이었다. 예를 들면 이번 주까지 해야 할 TODO가 스마트스토어 오픈이라면 단계별로 쪼개 스토어 개설하기, 스토어 네이밍, 로고 디자인해서 세팅하기, 상품 업로드하기 이런 식으로 하나씩 해나가는 것이다.
스마트스토어 오픈이라는 큰 TODO 하나를 가지고 간다면, 이 TODO는 일주일 내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뭐부터 해야 하는 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습관처럼 이 일을 미룰 것이다. 결국 주말쯤 후다닥 일을 처리하다가 다음 주에 마무리해볼까 하는 마음이 서서히 고개를 들 것이다.
그러나 작은 TODO를 쪼개 단계별로 여러 개를 적어 두면 하나씩 체크박스에 체크하면서 '내가 비록 게으름을 피우고 있지만 그래도 이걸 했구나' 하는 성취감과 다음 일을 할 수 있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다. TODO 체크박스를 채우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모일수록 큰 원동력이 되었다.
주 40시간으로 돌아가기
프리랜서나 프리워커로 일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에 따라 워킹 타임이 유동적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일이 많을 때는 주 50시간을 일하더라도 일이 없을 때는 주 20~30시간으로 탄력적으로 조정한다는 것이다.
당시 벌려 놓은 일이 많은 나에게는 주어진 일을 끝낸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일의 많고 적음을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 다닐 때처럼 무조건 주 40시간 이상을 일하기로 했다. 매일매일 워킹 타임을 체크했고 언제 어디서 일을 하든 주에 40시간을 채웠다.
위와 같이 일간, 주간(Weekly) 별로 워킹 타임을 노션에 기록했고 뭘 했는지도 체크하면서 TODO도 관리도 함께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기간 별로 주요 프로젝트를 설정해 하나 또는 두 개의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노션에 프로젝트 템플릿을 예쁘게 만든 김에 각각의 프로젝트 목표까지 설정해 보았다. 소싱 프로젝트라면 목표는 100개의 상품을 소싱해 올리면서 소싱과 온라인 셀링에 대한 감을 익히는 것으로 설정하고 실행했다. 이렇게 일간, 주간, 프로젝트 별 목표와 회고까지 기록하면서 프로젝트를 스스로 기획하고 실행하게 되었다.
일을 미룬다는 것은 단순히 귀찮아서, 게을러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 시절, 프로젝트를 데드라인 전까지 미루고 마감 전 날에 후다닥 해치웠던 이유는 어쩌면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100%를 쏟았을 때, 결과가 안 좋으면 어떡하지, 저 친구보다 더 못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기에 나는 미루고 또 미루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데드라인에 맞춰 후다닥 해치운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스스로의 방패막이되었다. 그리고 다음에 더 잘하자라는 무한 긍정 회로만 돌렸고 늘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퇴사 후 진화한 베짱이는 회사라는 시스템이 없이도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만들고 나름 늦지 않게 처리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머뭇거린다. 실패가 두려울 때도 있고, 했다가 문제 생기면 어떡하지, 걱정과 고민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일단 고민은 잠깐 접어 두고 뭐라도 저질러 본다.
당연히 하기 싫은 일도 있고 결과는 실패일 때가 더 많다. 그래도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고, 작은 결과라도 얻었을 때 해냈다는 소소한 행복과 뿌듯함을 느낀다. 꾸준히 씨를 뿌리면 언젠가 뭐라도 자라겠지. 오늘도 진화하고 있는 베짱이는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씨를 뿌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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