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속이기 in Sweden 외전(6) - 40대 마지막 도전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닌데, 어릴 때부터 혼자 공상에 빠질 시간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 전, 서울 변두리인 방화동이란 곳에서 살았는데 70년대 후반 그곳은 서울이란 것이 무색할 정도로 논과 밭이 많았고 뽕나무 밭도 많아 잠사공장도 있던 서울이지만 시골 같은 동네였다.
예닐곱 살이 되던 해, 같이 놀던 친구들이 모두 유치원에 가면서 나는 집에서 개나 고양이하고 놀거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물론 엄마가 계셨지만, 형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마루에 앉아 여러 가지 공상을 많이 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의 공상이 나를 글을 쓰는 것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1980년 3월, 1시간가량 걸어야 도착했던 학교를 가고 오는 길은(다들 이 얘기하면 서울에 산 거 맞는지, 70년대 생이 맞는지 물어본다) 그런 공상을 더 증폭시킬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볼거리를 많이 주었다. 하굣길에 다른 서울에선 누릴 수 없는 자연환경도 있었지만, 친구들과 가게에서 10원짜리 사탕 사 먹으면서 가져온 빨대(스트로)로 개구리를 잡아 꼽고 누가 빨리 터뜨리나 훅훅 부는 엽기적인 행각도 벌이고, 동네에서 호떡을 리어카에서 팔던 우리 집에 세 들어 사는 고등학생 누나가 불러 찌그러진 호떡 몇 개를 얻어먹고 오는 기억도 지금 생각하면 많은 상상의 소재가 되었던 거 같다.
그렇게 시골 같은 동네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중곡동이라 곳으로 이사를 오며 나는 큰 변화를 겪었다. 6월 초전학을 와서 다음 달에 경향신문사가 주최한 전국 학생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학교에 들어가 난생처음 받은 상이었다. 어머니는 너무 좋아 액자를 만들어 마루에 걸어놓았다. 언제 또 이런 거 타겠냐고.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탔다. 교내 백일장, 한국일보 등 언론 주관 전국 백일장까지. 글을 쓰는 것은 다른 애들에게 나의 존재감을 심어주는 좋은 기회가 됐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더 이상 교내 백일장에서도 상을 받지 못했다. 교지에 실리는 입상작들을 보면서 그들이 나의 글보다 뭐가 나은지 찾아보려고 했지만, 별로 잘 썼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다만, 입상자들이 곧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애들과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다면 이런 백일장에 나가는 것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일은 계속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가 가게를 하시기 시작했고, 아무도 없는 덩그란 집에 혼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게 제일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화도 그리고 글도 쓰면서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사춘기를 넘긴 것 같다. 고등학교 때까지 답답한 현실의 숨구멍이라고나 할까.
대학에 들어가 4학년 때 나는 처음 단편소설을 교지에 실었다. 누구나 그렇듯 소설이라는 명목하에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인데, 내가 쓴 글이 제한된 범위 내지만 활자화되어 불특정 다수에게 읽힌다는 것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족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그럴 일은 별로 없었다. 사회생활이란 것이 항상 발에 떨어진 것을 쳐내기에 바빴으니... 그런데도 항상 조금씩 습작은 했던 거 같다. 만화든 글이든... 그러다 보니 회사 SNS에도 게시되며 '역시 난 죽지 않았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40이 넘었다. 청소년기가 '질풍노도'의 시기라면 40은 '폭풍격랑'의 시기 같았다. 누구 말처럼 나도 40이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곳저곳 부딪치며 마음의 상처도 많이 난 것 같고, 괴로움에 잠 못 드는 날들도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아주 어렸을 때 그러듯 '엄마-'하며 소리칠 수도 없고, 20대와 30대 평생을 함께할 것 같던 친구들도 멀어진 지 오랜 상황에서 40대의 그 알 수 없는 거대한 무게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고, 집에서도 아내나 아들이 나를 의지하는 사람이지 내가 그들에게 의지를 해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도 40대에게는 전쟁터일 뿐 누군가와 교감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누가 그러듯 직장은 돈 벌러 가는 곳이지 사람을 사귀러 가는 곳이 아니라고 수없이 되뇌어도, 마음의 공허함을 달랠 길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30년째 쓰는 일기 속에서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뿐이었다. 지금 보면 그때의 기억은 말 상대가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 두드린 문을 열고 들어가 마지막 대화를 하는 느낌인 것 같았다. 지금 다시 봐도.. 별로 보고 싶지는 않은 기억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내가 느낀 것은, 하루를 보내며 내가 그 일기를 쓰고 뭔가를 쓰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그 시간이 편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반 평생 동안 가장 꾸준히 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꾸준히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또 글쓰기는 내가 세상에 버틸 수 있게 해 준 오랜 친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불현듯 과거 대학시절 단편소설을 발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아예 혼자만 쓰지 말고 밝은 세상 밖으로 나가볼까? 블로그에 글을 올릴까? 그런데 블로그에 쏟아지는 이상한 블로그 임대 요청 메일을 보면서 다른 쪽은 좋은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 우연히 카카오 브런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작가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주말에 그간 쓴 글이 없나 한참 뒤지다가 나름 잘 썼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듬어 작가 신청을 했다. 그래 옛날에 전국 대회에서도 상 받았고 사람들도 내가 글 잘 쓴다고 하는데 뭐~ 당연히 되지 않겠어? 작가가 되면 뭘 쓸까~ 등등 즐거운 상상을 하다가 일주일도 안 돼 회신을 받았다. 발신자가 'brunch'인 제목 '작가 신청 결과 안내 드립니다.'였는데, 이승환의 노래처럼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감이 딱 맞아떨어졌다.
아.. 충격이었다. 될 줄 알았는데. 그나마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냉철한 결과가 떨어지자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40대는 사그라져가는 시기구나라는 생각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것은 단순히 어느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상사에게서 질책받는 것과는 다른 실망감이었다. 정말 남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은 책상 속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것을 꺼냈는데 철저히 외면받은 느낌? 얼마동안은 마음속이 휑한 채로 일기도 쓰지 않았다. 인제 뭘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40대는 이렇게 잔불만 남는, 그렇게 사그라지는 나이라는 것이 처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