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생도 그런 말 안 쓰는데...."
드라마를 잘 안 보는 편인데, 요즘은 유튜브를 보면 그 길고 긴 드라마들을 1시간에서 길어야 두 시간 안에 다 볼 수 있도록 편집해 놓은 동영상이 많이 올라와 종종 그걸로 때우기도 한다. 지난번에 '글로리'를 그런 동영상으로 처음보고 거 괜찮네... 하고 그만뒀었는데, 오후 내내 포르투갈어 공부를 했더니 기진맥진해서 소파에 드러누워 뭐 괜찮은 게 없다가 눈에 읽은 제목이 하나 들어왔다.
나의 해방일지.
사실 처음에 제목을 봤을 땐 '어디서 본 제목인데...'라는 생각으로 그냥 눌러보았다. 중반부까지도(물론 끝까지도 그랬지만) 여주인공이 되게 이쁜 거 말고는 뭐가 주제고 뭐가 재밌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보다 보니 아~ 예전에 어느 직원이 "날 추앙하세요~"라고 하길래 '추한 놈이군.'이란 생각만 들었었는데 그게 바로 여기서 나온 대사였고, '구 씨'라고 나오는 주인공을 보면서 아내에게 "저 놈은 좋겠다. 대사가 저렇게 없으니 외우느라 고생도 안 하고 날로 먹기아냐? 인상이나 쓰다가 소주나 몇 잔 먹고. 무명배우라 그런가 봐." 하니까, 아내가 "쟤가 바로 손석구야!"라고 해서 손석구가 누군지 처음 알았다.
드라마는 정말 평범한 스토리인 것 같아 보는 내내 '뭐가 재밌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냥 주변에 저런 스토리가 있을 수 있겠네...(물론 사무실에 김지원 같은 직원이 출근한다면 난리 나겠지) 하는. 다만, 중간에 뜨끔한 가사가 있었으니...
"요새 누가 애인이라는 말을 쓰냐! 70년대생도 그런 말 안쓰는데 너 진짜 끔찍하게 촌스럽다"
집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 우리도 젊은 애들한테 저런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됐네.
요약 동영상을 보고 나서 이 드라마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니, 인기를 얻었던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20,30대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렇게 재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동영상을 보듯 바로 꺼버리고 나가지 않고 계속 보게 하는 힘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주인공들은 젊은 청춘들에 공감할 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뭔가 끌어당기는 작가만의 힘이 있다고나 할까? 하여간 완주해서 다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해방일지를 보고 20,30대가 공감하는 스토리라면, 40,50대가 공감하는 스토리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 유튜브를 계속 검색해 보았다. 전에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느꼈던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라는 공감을 누리듯, 지금도 그런 드라마나 영화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 검색을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제일 많이 나오는 건 기껏해야 50대 남자가 어떻게 여자를 꼬시느냐는 내용이거나 보기만 해도 조잡한 배경을 바탕으로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나오셔서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법이나 내 나이에 비하면 넌 젊어 임마 내지 니 나이라도 되면 나는 펄펄 날아다니겠다 식의 공자님 말씀을 설파하는... 물론 법륜스님의 동영상도 있었으나(스님의 대부분 말씀이 그렇듯 나도 몰라요~식이어서...) 역시 크게 와닿는 것은 없었다.
여주인공인 김지원이 나오는 '쌈. 마이웨이'도 역시 동년배들에게 공감을 많이 받았다는데, 우리 나이도 그런 드라마가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끔찍하게 촌스러운 70년대생의 이야기도 멋지게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상상과 함께.
지난주에 비로소 출판사에 마지막 원고를 넘겼다. 어느 정도 책의 분량이 돼야 한다길래 글도 추가하고 아직도 모자란 만화까지 추가하다 보니 지난해 말 당선됐을 때의 분량보다 두 배는 넘은 것 같다. 지난해 말부터 주말에 조금씩 채워나가기 시작했는데, 출판사 측의 자세한 피드백을 받으면서 정말 책을 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고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에서 받은 피드백들은 그동안 자기 책을 내기 위한 안내서를 읽었던 것보다 몇 권 더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고, 다시 한번 글을 쓴다는 것이 단순히 내 일상을 정리하고 일기처럼 쓰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게 해 준 소중한 기회였다(나중에 시간이 되면 짧지만 그 과정에서 느꼈던 것도 자세히 적어보려고 한다).
피드백받은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것들 중 하나는 생각보다 내가 너무 우울하게 글을 썼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현타가 왔다는 것이다. 40대 후반의 글은 본질적으로 우울할 수밖에 없다. 그런 잿빛 하늘 같은 글을 내 일기장에 담는다면 모를까, 남들 앞에 보일 글로 옮긴다면 누가 좋아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끔찍하게 촌스러운 70년대생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처음 출판사에 넘긴 초고의 상당 부분을 삭제하고 조금 재밌게 윤색하려고 노력하면서, 지금의 내 모습도 이렇게 바꿔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스웨덴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를 지원해 주던 연구원과 점심을 먹을 때가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어를 전공하고 스웨덴에서 유학을 했으며 대사관에서도 근무한 지 오륙 년이 됐으니 스웨덴에 대한 경험만 십수 년이 되고 책을 쓸 만큼 전문성이 있는 친구였다. 내가 초기 스웨덴에 대한 부푼 희망을 품고 온 얘기를 하자, 그는 자신이 스웨덴에서 힘들게 살았던 여러 가지 경험들을 설명해 주며 심지어는 '사람들이 스웨덴에 관해 가진 그런 환상을 깨주고 싶다'라는 말을 하길래, 깜짝 놀라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스웨덴이나 북유럽에 대해 그렇게 좋게 묘사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글쎄요? 스웨덴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들이 얼마나 스웨덴에 대해서 알고 썼을까요? 심지어는 그들 중 스웨덴어를 구사하고 스웨덴 자료를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죠? 또 저처럼 여기서 10년 이상 살은 사람들이던가요? 대부분 길어야 한두 달 여행 내지는 단기 유학이나 취업하고 돌아간 사람들이 얼마나 알고 그렇게 쓰는지 모르겠어요."
"그래? 그럼 왜 스웨덴이나 북유럽에 대해 그런 비판적인 책 보다 낙원처럼 묘사하는 책들이 많지? 나도 오기 전에 스웨덴에 대한 책을 서너 권 읽었는데 모두 다 그런 내용이었어."
"그럼 스웨덴에 대해 안 좋게 묘사하면 누가 그 책을 살까요? 학자가 아닌 이상 사람들이 책을 사는 것도 그 책을 보고 기분 좋으라는 거지 그 책을 읽고 '여기도 우리하고 똑같구나'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책을 사겠어요. 그러니 출판을 기획하는 사람들도 희망적인 내용을 채택하는 것이겠지요."
그때는 그와의 대화는 충격적이었다. 아 앞으로 몇 년은 살아가야 하는데... 하지만, 이후로 '현실이 그렇다면 뭐 그 속에서 또 재미를 찾아보지 뭐. 희망적이고 낙원에서 사는 것처럼 말이야'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생활이 즐거워졌고, 결과적으로 나의 '스웨덴 일지'는 괜찮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몇 년이 흘러 나는 40대를 지나 50에 다다르며 나의 40대를 돌아보고 정리하는 기회를 갖게 되고 그것이 책으로 출간되는 행운까지 얻었다.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도 그랬지만 아직도 내가 그런 우울한 사춘기 감정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원고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느꼈다. 그래서 좀 더 밝은 느낌 그리고 재밌는 느낌이 드는 글로 보강하고 좋아하는 만화도 추가하면서 나 자신이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뀌는 느낌을 체험했다. 이번 출간 준비는 정말 나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 과정이었다.
그렇게
끔찍하게 촌스럽지 않은
70년대생으로 살아갔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