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수 내리기 좋은 날.
그런 날이 있다.
입맛은 없고, (그래서 밥은 더더욱 하기 싫고) 맛있는 한 끼는 먹어야겠고.
더위의 초입- 급격한 더위에 몸도 놀란 듯 기력이 소진된 날. 고기는 무거워 싫고, 그럼에도 묵직한 영양가를 몸에 보충해주고 싶은 날. 마음이 허한 날, 그런 날 육수를 내린다.
진하게 육수를 내려 나의 마음씀을 한 방울의 국물에 모두 쏟아 내고 싶은 날. 비릿한 멸치 냄새에 내 눈물의 짠맛도 모두 쏟아버리고 싶은 날. 그날이 바로 육수 내리는 날이다. 한 달에 두어 번쯤 그런 날이 찾아온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최대한 겸허하게, 비장한 숨-을 내쉬며. 내 살림 중 가장 커다란 곰솥을 의자를 밟고 올라가 선반에서 꺼낸다. 깨끗하게 보관해두었지만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한 번 더 깨끗한 물에 뽀드득 닦아내고, 쏴- 물을 받는 것으로 육수 내리기의 첫 시작을 연다.
육수가 모두 우러난 단계, 고생했다 얘들아.
인생의 고민과, 삶의 깊이와, 인간의 성숙도까지를 고민하게 되는 겸허한- 시간.
곰솥의 크기가 크니 물을 받는 시간도 꽤 길다. 물을 받는 시간. 멍하니 냄비에 물이 차오르는 순간을 지켜본다. 찰랑찰랑-
꼴랑 이 물 받는 과정이 뭐라고. (제일 설렌다.)
어디까지 받아내야 할까,
얼마만큼 끓이고 기다려야 할까.
얼마나 오래 끓여야
너의 깊이를 진하게 우려낼 수 있을까.
꼴랑 이 물 받는 과정이 뭐라고, 찰나의 시간에 인생의 고민과, 삶의 깊이와, 인간의 성숙도까지 걸리는 시간이 어느 정도나 될지를 꽤나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인생의 고뇌를 잊게 해 주는 육수 물 받기 ASMR
물을 받은 후부터는 인고의 시간이 시작된다. 가정용 가스레인지의 화력으로는 커다란 곰솥의 물이 끓는 시점까지만 해도 15분 이상은 족히 걸린다. 여유 있게 물을 올려둔 후, 감성을 적셔줄 음악부터 튼다. 그리곤 나의 비장의 무기, 면포 주머니를 꺼낸다. 살림 고수들에게는 이미 있을, 백종원 아저씨가 본다면 비웃을, 사실 별 것 아닌 아이템이지만. 살림 초보인 나로서는 대단하게 큰 마음먹고 산 장비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면포 주머니. 육수 우리기를 취미 삼아 시작한 이후로, 스테인리스 통을 쓰다가 면포로 갈아탔다. 그것도 여유 있게 3장이나 샀다. 이 녀석 덕분에 육수 우리기의 마지막 단계에서 원재료들에 숨겨진 마지막 방울까지 쭉- 짜내는 희열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면포 주머니 안에 누구누구를 넣어줄까. 냉장고를 보자 보자-
바다 친구들 - 황태 머리 2개 / 멸치 2줌 / 디포리 1줌 / 다시마 5개쯤 / 마른 새우도 한 줌-
육지 친구들 - 대파 흰 부분 한 줌 / 무 넉넉히 / 양파 1개 / 마른 표고버섯 / 다진 마늘 세 스푼까지.
마법 마녀가 요술 수프를 끓이듯 신비하고 즐거운 기다림.
아낌없이 좋은 재료를 가득 담아, 끓기 시작한 물에 퐁당- 담그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기다려주기만 하면 너는 진하고 구수한 향내를 풍기며, 마법의 육수로 변신할 테니. 마법 마녀가 요술 수프를 끓이는 것처럼- 신비하고 즐거운 기다림의 세계로 빠져든다.
인터넷 레시피 상에서는 대략 15분 정도 끓이면 완성이라고 하지만 나는 최소 1시간~2시간을 약한 불로 아주 오래오래 끓인다. 오래 끓일수록 장인의 숙성된 맛과 색에 가까워지는 것이 보여 최대한 오래 끓이며, 시간이 주는 마법의 힘을 보태본다. 인생도 이렇게 오래 기다려주면, 시간의 마법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집 안 전체에 구리구리한, 구수한- 시골의 향이 가득 퍼져나가 엘리베이터 앞, 복도에 우리 집 멸치 육수 냄새가 가득 찬다.
이 집, 오늘 육수 끓이는구나. 거하게- 한 냄비 우려내는구나.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향기 시그널.
중간중간 거품을 걷어내며, 진한 갈색으로 변해가는 육수를 지켜본다.
안도현 시인의 한 구절처럼,
너에게 당부한다.
멸치 육수 함부로 들이키지 마라.
너는 한 번이라도 오랜 시간, 우려 내진적 있었느냐.
지금 내 길 위에서, 나는 깊이가 있는 사람으로 우려내지고 있을까? 내 삶의 육수는 깊이 몇 m쯤일까?
진한 육수를 우려낸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존귀한 작업임을 아는 이만이 제대로 우러난 육수를 만났을 때, 육수 국물 한 방울을 헛되이 들이키지 못할 것이다. 일산의 오래된 어느 칼국수집에서 제대로 정성껏 우려진 진한 육수의 칼국수를 처음 맛보고 나오던 날, 주인 할머님께 '정말 맛있어요.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머리 숙여 인사를 했더랬다. 한 그릇의 육수에 담겨 있을 할머님 인생 그래프의 파동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육수 한 켠에 느껴진 그 깊이에 절로 인사가 나왔더랬다.
종갓집 칼국수의 육수 색감과 근사하게 잘 뽑아진 나의 육수에 경배를!!
종갓집 칼국수의 육수 색감과 근사하게 잘 뽑아진 나의 육수에 경배를!!
드디어 육수가 만족할만하게 우려 졌을 때.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거의 막바지 단계를 수행한다. 바로 식히기 단계. 물론 그날의 식사는 갓 끓여낸 육수를 일부 덜어내어 후다닥 만든다. 그리고는 나머지 육수의 곰솥을 베란다로 옮겨 하룻밤을 식힌다. 육수가 식으면서 면포 주머니 안의 재료가 최대한 더 우려 나올 수 있도록 24시간 이상 기다려주기만 하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무적 마법의 육수-가 완성된다.
잘 식은 육수에서 면포를 꺼내어 재료에게 고생했다고 토닥토닥- 마지막 육수까지 쥐어짜 낸다. 고생했다, 나의 육수 전사들!
육수의 변신이 시작될 차례.
첫날의 육수는 냉장고에서 탈탈 털은 재료들을 잔뜩 올린 냉국수로 변신시키고, 두 번째 날의 육수는 소고기 파개장의 베이스로 활용하여 빨간색 고춧가루 다진 양념과 고추 송송 썰은 간장 양념으로 화려한 변신을 시켜준다. 그다음의 육수는 일단, 잘 소분하여 무적 파워 나만의 비법 육수라고 이름 짓고 냉장고 한 켠을 지키도록 고이고이 보관해준다.
첫날의 육수는 냉장고에서 탈탈 털은 재료들을 잔뜩 올린 냉국수로 변신
견뎌내느라 고생했다. 잘 우러나주어 고맙다.
당분간은 나와 함께하자. 네가 있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구나.
보잘것없는 육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쏟아낸 후, 길냥이에게 가져다 줄, 부드러워진 멸치의 염분을 빼내어 따로 담아두는 것을 끝으로 오늘의 주방을 마감한다.
길냥이에게 가져다 줄, 부드러워진 멸치의 염분을 빼내어 따로 담아두는 것을 끝으로 오늘의 주방을 마감.
견뎌내느라 고생했다.
어둠의 터널 속을 느리게나마 걸어 나온 나에게 해주고 싶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참동안 자신의 뼈와 살을 내어주고 난 후에도, 면포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냄을 견뎌낸 멸치에게 건넨 말은, 사실 내가 듣고 싶던 말이었다. 견뎌내느라 고생했다고, 잘 견디고 있다고, 그렇게 견뎌냈기에 진한 육수가 우려진거라고 무언의 칭찬 박수를 잔뜩 보낸다. 정성스레 육수를 옮겨담고 보관하는 과정 내내 나의 마음을 쓰다듬어준다. 견뎌내는 시간만큼 덜 익었던 내 성숙도가 진해져있었을거라고, 네 인생 잘 우러나고 있는 중이라고 다독여본다.
너의 찬란한 변신을 기대해.
육수야 잘 부탁해. 지치고 힘든 여름날의 식탁을. 너의 찬란한 변신을 기대할게.
진한 육수를 우려내기 위해 오랜 시간 들여다보며 불을 조절하고, 하루를 꼬박 재우며 식히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쥐어짜내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위해 밤 잠을 줄였고, 한 자, 한 자. 남모를 고뇌를 하며, 마지막까지 면포에서 비틀어지듯 머리를 쥐어짜내어 문장을 우려낸다.
육수처럼 진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누군가의 마음을 울려주기를, 나의 마음에 오아시스 같은 빛이 되어주기를, 그 찬란한 변신을 기대해본다.
육수 뚜껑을 꽈악- 닫아 냉장고 안에 들여보내는 마음으로, 어제의 아픔들도 한 곳에 잘 담아 꽈-악 뚜껑을 닫고 기억 저 편으로 흘려보낸다. 잘 가라- 멸치! 잘 가라- 눈물아!
<반창고 문장> 여러분의 마음에 문장으로 반창고를 붙여드립니다.
뱅어포로 육수를 낼 수 없고, 디포리로는 뱅어포 구이를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내면의 힘으로 오롯이 자신의 색과 향을 우려내며 사는 세상살이가 때로 힘들고, 종종 버거울 겁니다.
그럼에도 나답게 사는 마음의 근육과 자유를 찾아,
불필요한 무게들은 덜어내고, 덜 기대하며 덜 된 나를 끌어안고 사는 삶은
행복한 것이라고 우겨봅니다.
테스형의‘선하게’란 ‘행복하게’라는 의미라는 해석을 믿습니다. 덜덜덜-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안도현 시인, 연탄 한 장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