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4살 꼬맹이가 아빠에게 배운 이 몹쓸 노래가 이렇게도 서글프게 들리다니. 게다가 밖에는 진짜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미세먼지까지 잔뜩 껴서 집 안 공기까지 우중충하다.
아침먹이고 치우고 땡.
점심 먹이고 치우고 땡.
돌아서자마자
저녁 만들어 먹일 시간-
에라이 오늘 하루도 이렇게 땡땡땡이다.
비도 오는데 거울을 보니 이마엔 주름 지렁이 세 마리가 기어간다. 처녀 적 맞았던 이마 보톡스도 이젠 약발이 다 떨어졌을 만도 하지. 축 가라앉아서 힘 없이 뻗친 머리 꼴 하며 생기가 쫙 빠진 눈가엔 다크서클과 온갖 사이즈의 잡티가 가득한 내 얼굴. 이게 바로 해골바가지- 아이고 무서워.
반짝이던 내 20대 청춘아 어디 갔니.
내 생기를 쫙 다 뽑아갔을지라도, 볼 때마다 뽀뽀 쪽쪽 해주는 예쁜 내 아이가 생겼지만 임신과 출산을 두 번 겪는 동안 거울 보고 정신을 차릴 새도 없었다. 창가에 비친 무미건조하고 팍팍한 표정의 저 사람은 누구일까. 볼 때마다 너-낯설다. 진짜 난 어디 갔나 싶다.
내 손길이 아니면 먹고 자고 싸는 기본적인 것조차 못하는 아기들을 하루 종일 돌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쪽쪽 물고 빨고 '이쁘다 이쁘다' 돌봐주긴 해도 어미새마냥 하루 종일 먹이고 놀아주고 씻기고 자장자장 재우고 나면 아, 오늘도 잘 버텼다~ 소리가 절로 나오거나, 아니면 그조차도 못하고 그냥 쓰러져 잠들거나, 둘 중 하나다.
오늘 잘 보냈어? 밥은 먹었어? 낮에 뭐했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애기가 신생아 시절엔 이렇게 물어봐주는 티비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대사가 왜 그리 서럽고 슬프게 들리던지. 드라마를 보다가 이런류의 대사 한마디가 나오면 난 주책맞게 끄억끄억 울었다. 이젠 단련이 된 건지, 엄마가 된 건지, 아줌마가 된 건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로맨스가 필요해-'류의 자잘한 미세 감정의 욕구에는 무뎌졌다.
하지만 내 이름 석자로서의 삶, 여자로서의 삶이 없어졌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에는 왜 이리 마음 한구석이 아릴까. 우리 엄마도 이렇게 살았겠거니 싶다가도, 애들이 예쁘니 이 정도야 감수해야지.. 싶다가도, 애들 저녁밥이나 해줘야지 하고 현실에 순응하려다가도, 설거지하던 수세미를 괜히 팽개치며
순간,
뭘 해도 넘치는 파이팅으로 반짝이던 청춘시절의 열정, 미래를 꿈꾸며 밤을 새우면서 마시던 새벽 공기, 예쁜 옷도 입고 화장을 하면서 거울 보고 나도 모르게 씩~짓던 미소들이. 모두 모두 그리워진다.
그립다고만 말하기에는 손 닿을 듯 그 시절이 간질간질한데 현실은 육아에 지져 바닥난 체력에 허우덕거릴뿐. 그럼에도 드라마와 맥주에 의존해서 하루를 마감하고 내 지친 마음의 위로를 맡겨버리기에는 너무 아쉽다. 내 안에 숨겨진 빛이 아직 무언가를 하고 싶다며 꿈틀거린다.
우린 모두 잘하고 있는 거 맞다.
우린 모두 엄마로 잘하고 있는 거 맞다. 엄마로 사는 하루, 정말 수고 많았다. 이제 나로서의 삶, 여자로서의 삶. 도 찾아보자. 대단하진 않더라도 내 안에 숨겨놓은 나름의 내공이 육아 터널을 지나오는 순간순간마다 더 농도 짙게 성숙되었을 것이고, 이젠 푹 익어서 세상에 꺼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
시간이 더 지나면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지금부터라도 하자. 뭐라도 하자. 해보자.
아이들이 자고 나면 꼭 나에게 물어봐주자. 지치고 쓰러져 잠드는 날도 있겠지만 잠 안 오는 날 가끔은 물어봐주고 내 마음을 읽어주자.
오늘 하루 괜찮았나요? 마음은 괜찮나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다시 내 이름 석자 걸어하고 싶은 일이 생길 것이다.
다시 한번 해내고 싶다, 잘해보고 싶다는 반짝이는 열정도 다시 그대 마음을 달아오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