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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늬 Oct 24. 2021

#6 나는 너를 흡수했다

텅 빈 교실에서 칠판을 지우고 퇴근했다. 퇴근하는 길에 잠깐 슈퍼에 들렸다. 돌았던 코너를 다시 돌고, 집었던 상품을 다시 이리저리 만져봤다. 결국엔 또 그 과자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이 과자를 정말 좋아했다. 그녀는 밥보단 과자를 좋아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바삭하게 들린다. 


“내 글을 꼭 간직해줘” 


그녀와는 작년쯤에 헤어졌다. 글을 쓰는 여자였고,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사회문제에 항상 관심이 많았으며 되도록이면 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주 명상을 했고, 바다를 좋아했다. 반전은 그녀가 수제 햄버거를 엄청 좋아한다는 것이다. 


햄버거를 먹을 때면 마치 그녀의 영혼 한줌이 그녀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간헐적 채식주의자인 그녀에게 부지런히 햄버거 맛집을 소개했다. 끝내주는 햄버거 집에서 그녀는 조그마한 입으로 우물거리며 말했다. "우리 사귈까?"


나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소년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고 남고에서 소년들을 가르치는 위치가 되자 아무도 나를 소년으로 보지 않았다. 나 역시 소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소년들 중에는 나보다 어른이 있었다. 일찍 어른이 된 녀석들을 보면 기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찡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 소년이었을 때 만났던 동창들을 만나면 나 역시 솔직한 소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제 자식이나 부동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소년을 지우며 살았다. 그러다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소리를 좋아해서 자주 걸었고, 첫눈이 오게 되면 무조건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소녀였다. 그리하여 나는 소년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둘은 신생아처럼 살이 포동포동 쪘다. 그녀는 나보다 세 살 어렸다. 나는 그녀의 나이를 지나왔지만, 그녀는 나에게 완전히 미지의 존재였다. 그녀는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나의 척도를 무너뜨렸다. 그녀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나는 매번 낙관적인 그녀의 모습이 신기했는데, 일본 여행에서 갑자기 일본어를 줄줄 하는 그녀를 보고는 조금 위대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가 정말 모르는 것 투성이었더. 그녀의 가능성은 그녀의 능력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에겐 엄청난 비밀이 있었다. 바로 사랑하는 상대의 재능을 흡수하는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게 소녀를 조금씩 삼켰다. 문제는 어디서 가져오느냐가 아니었다. 어디로 가져가느냐였다. 나는 그녀의 젊음을 소화시키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상하게 글이 안 써진다고 했다. 그녀의 글은 시름시름 앓아갔다. 나의 글은 양이 방대해지며 풍부해졌다. 그녀는 칭찬을 많이 해주었다. 비겁했다. 지금껏 이렇게 비겁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말하지 못했다. 어느날, 그녀는 글이 단 한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름밖에 쓰질 못하겠다고 했다. 글이 없으면 자신은 죽은 사람이라고 헤어지저고 했다. 병원을 간다고 했다 이미 말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흡수된 재능을 다시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녀가 자주 말하는 가능성은 입술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만 그녀는 나의 글에서 어떠한 가능성을 본 것 같았다. 그것은 그녀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헤어지면서 자신은 이제 글을 안 쓸 거라며 지금껏 써온 모든 글을 출력한 후 제본을 해서 주었다. 나는 그 제본이 된 것을 받고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녀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연락오지 않았고, 나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진짜로 죽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안부를 묻지도 못했다. 나는 비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득 오늘의 이 과자가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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