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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와이프가 있으면 좋겠다

아홉수의 고립

by 저나뮤나

지금부터 말하려는 고립은 흔히 떠올리는 - 문을 닫고 방에 홀로 앉아 있는 종류의 고립과는 조금 다르다. 외로움이나 단절 같은 감정 상태를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고립은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역할을 부여받고 그 역할들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을 때 더 선명하게 찾아오는 종류의 고립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고, 관계의 언어를 사용하고, 사회의 톱니바퀴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으면서도 그 구조 안에 정작 '나'는 없다는 자각, 내가 맡은 역할의 무게가 나라는 존재를 점차 지워버릴 때 내면 깊은 곳에서 서서히 형체를 갖추는 종류의 고립이다.


어떤 여성 변호사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뉴욕의 유력 로펌에서 일하던 그녀는 결혼과 출산을 거쳐 육아휴직을 마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그러나 복귀하고 보니 함께 입사했던 남성 동기들은 이미 그녀의 상급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밤낮으로 일을 했다. 하지만 도무지 입사 동기들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출산 후 떨어진 업무 감각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비난하던 그녀의 자신감은 곤두박질쳤고 삶은 균형을 잃어갔다. 결국 그녀는 이혼을 선택했고, 싱글맘이 된 그녀는 스스로의 붕괴를 막기 위해 내니를 고용했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뒤처졌던 건 자신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겐 '아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녀의 남성 동기들에게는 모두 '아내'가 있었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학교 행사에는 대신 참석하고, 설거지며 빨래 등 끝없이 반복되는 수많은 일들을 말없이 감당해 주는 사람,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삶이라는 무대가 돌아가도록 무대를 받치고 배경을 정리하고 조명을 켜주는 '아내'가 있었다. 남성 동기들은 변호사라는 자신의 역할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변호사이기 전에 엄마였고, 아내였고, 가사노동자였고, 균형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에세이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나도 와이프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 한 줄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단지 동의한다거나 공감한다는 차원이라기보다는 어떤 구조적 진실을 꿰뚫는 통찰에 대한 탄복 같은 것이다. 여기서 '와이프'라는 단어는 사랑의 대상도, 로맨스의 대상도 아니다. 여기서 '와이프'란 조용히 일상을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이며, 무너지는 것을 막아주는 실용적이고 지속가능한 구조이며, 감정적 위로보다는 실제적인 분담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력이다.


자기 몫을 누구보다 열심히 감당하면서도, 그 몫이 끝없이 늘어나는 현실 앞에서 문득, "왜 나는 이 모든 것을 혼자 다 떠안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세상은 역할이 분업되어 돌아가고 있지만 그 역할들을 지탱하기 위한 돌봄과 정리의 구조는 여전히 비대칭적이다. 역할은 나눠졌지만 감당은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다.


고립은 그리하여, 역할로만 채워진 존재가 어느 순간 자기를 잃고 자기의 고통을 말할 언어조차 잃어버리는 상태다. 변호사였던 그녀는 내니를 고용했고 고용으로 생겨난 안정된 생활 구조가 그녀의 삶을 지탱해 주었고, 그렇게 승진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은 것은 '능력'이 아니라 '구조'가 문제였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비단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너무나도 흔하고 그래서 더 이상 문제로 보이지 않게 된 수많은 이야기들, 여기저기서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현실이다.


우리 모두는 아마도 이 구조적인 고립의 어딘가에 서 있을 것이다. 육아든, 노동이든, 혹은 생의 감정적 무게이든, 각자의 삶의 한가운데에서 스스로를 견디고 있는 존재로서 말이다. 고립은 나만 겪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말해지지 않기에, 여전히 나만 그런 것처럼 느껴지고 그 느낌은 견디어 내기가 참 힘들다. 누군가가 도와줄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기대기도 애매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조용히 무너지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난다.


안정된 구조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누군가와 균형을 나눌 수 있는 삶, 내 기운이 다 닿지 못하는 틈을 메워줄 체계, 함께 울고 웃으며 무너지지 않게 해 줄 존재 같은 것들로 단단히 세워진 구조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다만 대개는 현실에서 안정된 구조를 경험하기 힘들기 때문에 삶을 스스로 견디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 삶에 와이프가 필요하다는 말은 지금 이 고립 속에서 내가 어떻게든 살아남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고립은 여전히 무겁지만 그 무게를 말하는 일이 가능한 순간 우리는 그 고립에서 아주 조금씩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립을 말로 바꾸고 말해진 고립을 공유하는 감각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지금 아홉수를 사는 내가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연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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