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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의 컨베이어 벨트

유월의 아홉수

by 저나뮤나

기억은 없었다. 다만,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만 있었다.


온통 회색인 방이었다. 벽도, 바닥도, 천장도 온통 회색이었다. 방 안에는 길게 뻗은 컨베이어 벨트 하나만 움직이고 있었다. 50dB 정도의 소리를 내며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는 숨을 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위에 올라탔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다. 방 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그저 숨 쉬며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를 바라보고 있자니 올라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벨트는 나를 태우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엔 검고 두꺼운 벨트 위에 앉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멍하니 생각을 하고, 어쩌다 좋아했던 노래를 떠올리며 흥얼거리기도 했다. 어느 순간 벨트 위로 물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상자, 문서 뭉치, 쓰임을 알 수 없는 전자기기, 서류가방, 알 수 없는 코드가 복잡하게 엉킨 케이블 따위였다.


떨어지는 물건들에는 질서가 없었다. 무작위로 떨어지는 물건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채워나갔다. 나는 물건들을 하나씩 집어 들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상자는 열어보고, 문서는 정리하고, 기기는 전원 버튼을 눌러봤고, 가방은 정리했고 코드는 풀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시간을 때우기엔 썩 괜찮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상자 안에 또 다른 상자가 들어 있는 상자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문서는 복잡하고 끝이 없었다. 기기의 전원은 작동하지 않았다. 가방은 열리지 않았고 코드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손은 점점 더 빨라졌고 쉬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눈을 들자 사방이 회색이었다.


아주 멀리, 벨트 저편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을 건네면 소리는 툭 끊겨 땅에 떨어졌다. 벨트는 점점 복잡한 것들을 내게 던졌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저 눈앞에 떨어진 것들을 해치웠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언가 만들고 있는 건가? 어쩌면 저 멀리, 끝도 없는 저 지점에서 이 모든 것들이 조립되어 하나의 거대한 무언가가 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생각뿐이었다. 내가 그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벨트는 나를 뒤로 끌어당기지 않았지만 앞으로 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같은 자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벨트 위에 조그만 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지금 멈춰도 괜찮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그 문장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내 위로 물건들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나는 집어 들지 않았다. 처음으로 물건들을 그냥 거기에 두었다. 그러자 벨트가 그것들을 데리고 나를 지나쳐 갔다. 그리곤 뒤따르던 다른 이가 그것들을 집었다. 멀리서 잠시 나를 쳐다보는 듯했지만 곧 그는 고개를 숙이고 옆에 있던 상자를 집어 올렸다.


나는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벨트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있지 않았다. 대신 낮은 바람이 부는 들판에 서 있었다. 발밑엔 부드러운 흙이 느껴졌다. 멀리 언덕 너머로 살구빛 해가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몸은 아직도 기계적인 움직임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고 호흡이 깊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물건들이 머리 위로 떨어지지도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작은 간이역에 도착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기차는 오지 않았다. 지금 막 불이 켜진 가로등 밑에는 등받이가 없는 길쭉한 나무 벤치가 있었고 자동판매기 하나가 그 뒤에서 덜컥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았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침묵이 단단하게 내 주위를 감쌌다. 컨베이어 위에서 내내 참았던 피로가 물처럼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벤치 옆에 누군가 조용히 앉았다. 옆얼굴만 보이는 낯선 사람이었다. 어쩐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이 흘러나가듯 그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내려왔군요." 그가 마침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쉬고 싶었나요?"


"그런 것 같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트는 늘 우리가 올라타길 기다리고 있죠. 내려온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아직 그 위에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나는 그의 말을 따라했다. 그 말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바람, 흙, 들판, 벤치, 이 모든 것들이 꼭 누군가 만들어낸 정지 화면 같았다.


"그럼 이건 뭐죠? 꿈인가요?"


"현실이에요. 그리고 동시에 꿈이죠. 둘은 그렇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나는 따라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그는 내가 그를 바라볼 때까지 기다렸다.


"그게 당신이라는 거예요. 그게 당신의 자리죠. 그리고 아주 가끔은,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벨트가 우리를 기다리기도 해요."


그는 천천히 사라졌다. 기찻길을 가로질러 걷던 그는 어느 순간 바람처럼 희미해졌다.

나는 다시 혼자였다. 문득 바지 주머니에 쪽지가 아직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 멈춰도 괜찮습니다."


나는 쪽지를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낮은 호흡이 어두운 바람 속에서 차분히 내려앉았다.


바람 속 땅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나는 고개를 숙인다. 발끝 아래 먼지처럼 얇게 깔린 흙 사이 검은 띠가 드러났다.


나는 눈을 감는다.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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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