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물에게 있어 살아가는 동안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다. 죽음은 대변환의 시점이자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한상황에 처했을 때 ‘죽음의 문턱’이니,‘생사의 기로’니‘사생결단’이니,‘죽음의 공포’니라고 말한다.
죽음이 일말 두려움의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의 크기와 모양까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무릅쓰고’자기의 할 일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죽기 살기’로 끝까지 혼신의 힘을 쏟아 붇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죽음만은 면하기 위해 죽기보다 싫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죽음을 악착같이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의 정도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크게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다. 지혜 있는 자는 믿는 자이고 어리석은 자는 믿지 않는 자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새로운 시작’일뿐이다.
성경에서는 죽음을 ‘잠잔다’고 표현하고 있다. 왜?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소중하고 가장 희망적인‘부활’을 일컬음이다. 바울은‘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라고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부활 때문이다. 선각자들의 순교가 가능했던 것은 부활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었다. 소위 죽음의 전문가이셨다. 주님의 죽음은 죄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셨고 주님의 부활은 죽음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주님의 그 죽으심과 부활이 바로 나의 죽음이었고 나의 부활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죽음을 이기었다는 것은 죽음이 필연인 우리의 시간에서 벗어나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내쫓김을 당해 노예로 팔려가고 정직하게 살려 하지만 감옥에 갇힘을 당할 때 요셉의 시간에서는 고난의 시간이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훗날 애굽을 총리하는 자리에 올라 민족을 구하게 되는 역사가 된다. 이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동안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동일한 시간대에 매여서 살지만 천국에 가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대에서 살게 된다.
천국(Kingdom of heaven)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열린 하늘나라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낙원(Paradise)에서 믿었던 자들이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께서도 “내가 거할 집을 구하러 간다”고 하셨던 것이다.
<芝仙>
블로그에 댓글 달아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선수’시라구요! 나도 이제 선수님을 따라 믿음으로 연습하며 살아가렵니다.
<西汀>
예, 댓글 지금 볼게요.
지난 한 주 그리움이 채워지는 멋진 나날이었습니다.
<芝仙>
오늘 안산에서 문학반 수업을 했어요. 벚꽃이 완전 만개하여 꽃바람에 꽃잎이 꽃비가 되어 날렸답니다. 몇 번이나 동지 생각이 났습니다.
<西汀>
좋은 시를 쓰는 시인과의 아름다운 교류가 나중 나중에도 기억되고 회자되기를 바래요. 지금쯤 어디 계실까? 시의 샘이 철철 넘쳤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