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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쫑 Oct 09. 2023

이주임의 이상한 승진

후유장해 진단서를 끊기 위해 의뢰인과 병원을 갔던 후배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병원에서 의뢰인에게 지속적인 무시, 모욕을 먹었단다. 고객을 상대하다 보면 실망감에 무시하거나 가끔은 욕을 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나는 고객들로부터 종종 "그럴 거면 그 자리에 왜 앉아있냐." 라던지 "괜히 들은 적이 있다. 대부분 받고 싶어 하는 보험금이 생각보다 적을 때 많이들 했던 말이었다. 이번에 후배가 들었다는 무시는 이런 것이었다. 


"전화하던 사람하고 다르네. 에휴, 경력도 얼마 안 된 안 마른 젊은 여자가 와가지고, 이게 잘 되겠나."


십자인대 파열로 수술한 의뢰인이었다. 병원에서 장해율을 끊기 위해 무릎의 운동 각도를 재는데 수술이 너무 잘돼 오히려 전보다 무릎이 더 잘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장해진단서를 써주는 걸 의사는 탐탁지 않아서 투덜거렸을 것이다. 그때부터 의뢰인의 불만이 말로 나오기 시작하다 대놓고 무안을 주는 상황까지 왔겠지. 워낙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보는 의사라 "그만하세요"라는 정도로 그쳤다 하니 큰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험한 꼴을 당하고 온 후배의 기분이 걱정되었는데 씩씩거리긴 해도 그다지 큰 타격은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괜찮으세요?"라고 물어보니 "뭐 사실 젊게 봐주는 것에 만족하고 있어요." 한다. 그래.. 그건 그렇다.


'전화하던 사람하고 다른' '경력도 얼마 안 된' '젊은 여자가'


의뢰인의 핵심적인 단어는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화로 상담하던(나) 사람과 다르다는 건 성별의 문제일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경력도 얼마 안 된 젊은 여자가 의뢰인을 상대한다는 거에 대한 불쾌감이었다. 딱히 젊다, 경력이 얼마 안 됐다는 말은 독립해서 놓고 사용하면 비난이라고 볼 만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런 말들이 오묘하게 특정 상황과 결합되어 선명한 모욕이 되었다.


의뢰인의 애매한 사건에 대한 보험금을 찾아주는 보상지원센터를 오픈한지 일 년째였다. 사망, 암, 백내장 등 최소 오백만원이 넘어가는 굵직굵직한 많은 사건들은 제휴 손해사정사들이 잘 맡아서 의뢰인과 해결했다. 문제는 소액건이었다. 보험금이 50~100만원 되는 소액건은 이겨도 실익이 없었다. 의뢰인이 100만원을 받기 위해서 진행해야 하는 비용(의사 자문비용, 손해사정사 비용)과 시간을 합치면 의뢰인이 받을 돈이 얼마 없었고, 그렇게 받을 수 있음에도 포기되는 것들이 왕왕 생겼다. 회사에서 제휴사에게 돈을 줄 수도 없는 상황, 참으로 난감했다.


최부장과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손해사정사를 고용해서 소액건을 무료로 처리하기로 했다. 그렇게 들어온 게 후배인 이주임이었다. 후배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바리스타를 하다 허리가 많이 아팠고, 보험금 때문에 보험회사랑 싸우면서 손해사정에 대한 니즈가 생긴 케이스였다. 카페 일을 그만두고 손해사정사 자격증을 2년 동안 공부해서 취득하고, 보험사 문을 두드렸으나 나이 때문에 받아주는 곳이 없었고, 그러다 우리를 만났다. 이주임은 경험을 쌓고, 우리도 싼 비용으로 지식도 쌓고, 사업도 확장하고, 겸사겸사. 어차피 큰 건은 안 맡기니까.


이주임이 맡은 대부분의 사건은 소액 장해 판정 건이었다. 십자인대 파열, 손가락 골절 등 수술하면 거의 정상인과 비슷해지는 증상은 보험을 크게 들지 않았으면 받는 돈이 적었다. 내가 50만원에서 100만원 정도로 유선으로 의뢰인에게 안내해주면 이주임이 의사와 보험사와 잘 협의해 돈을 받아냈다. 여기서 놀라운 건, 이주임의 능력이었다. 내가 50을 이야기하면, 결국 의뢰인에게는 70을 찾아줬고, 100을 이야기하면 130을 찾아줬다. 다년간의 사람을 상대했던 경험과 센스는 보험사와의 협상에서 힘을 발휘했다. 


'나와 다르게' '경력을 뛰어넘으며' '센스 있게' 


의뢰인의 말과는 전혀 다른 이주임의 능력이었다.


동생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왜 그런 얘기를 듣는지 모른단 말이야 라는 표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녹내장을 전문으로 하니까 잘 알지. 진료받으러 오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수술은 다른 사람에게 받고 싶어 한다니깐. 단순히 내가 젊고 여자란 이유로."


오십 대가 넘어가는 의뢰인이 많은 손해사정 업계는 전통적으로 경력이 적거나 젊은 여성을 기본값으로 두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손해사정사의 상은 중년의 남성이다. 회색이나 검은 양복을 입었고 진중한 말투를 구사하면서 어려움을 봐도 이쯤이야 하는 표정으로 '허! 허! 허!' 하며 웃고, 외모는 약간 따분해 보일 수 있지만 의뢰인의 말에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을 생각한다. 보험사라는 대기업과 싸우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런가. 젊은 여성 손해사정사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정관념으로부터 가장 늦게 열리는 곳 중 하나였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측면에서 젊다와 경력이 얼마 안 됐다 라는 것은 손해사정사로서 신뢰를 떨어트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맞을 수도 있지만, 꼭 옳은 말은 아니다. 손해사정사는 보험과 의료 지식, 법률적 해석, 그리고 의뢰인의 상황을 보고 합리적으로 응용하는 능력이 가장 우선시하도록 훈련이 필요한 직업이다. 1년에 고작 500여명에게만 문을 열어주는 자격은 그 어려움을 반증한다. 부족의 가장 나이 많은 영감처럼 그간의 경험으로 판단을 하고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많다와 적다는 동사는 등가교환 같아서 어딘가에 장점이 있으면 항상 어딘가에서 단점이 발견됐다. 연륜과 경험은 지혜가 되기도 하지만 고집과 편견이 되기도 하고, 오히려 경험만 자랑하다 뒤떨어진 적응을 보여주는 사람도 여럿 봤다. 성별과 경력으로 판단하는 건 오해와 편견이 다분했다. 


-그럼 너는 어떻게 했어?


-뭐 그냥 원장님 안내해드리지. 예전에야 속상했지만 지금은 페이닥터의 기분으로 살고 있어. 에잇! 망할 놈의 편견 이러면서.


-그렇지. 월급은 그대로 나오니까. 난 그러면 안 되는데. 밑에 직원이 이런 걸로 속상해서 쉽이 떨어지면 안 되거든.


-그럼, 일단 명함부터 바꿔. '차장' 정도로


-오, 그리고?


-그리고 의뢰인과 전화로 상대할 때 이주임을 은근히 띠워줘. 그러면 돼.


-진짜 그거면 돼?


-나이 든 사람들은 30대, 40대 구분 잘 못해. 명함보고 대략 구분하는 거지. 뭐.. 의상, 외모도 중요하지만.. 일단 한번 해봐.


그렇게 이주임은 명함 안에서만 차장으로 승진을 했다. 명함 속 [손해사정사]는 선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 금색으로 새겼다. "제가 또 언제 회사에서 차장 직책 달아보겠습니까." 회사를 오래 다닐 생각이 없는 이주임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뭐.. 원래 회사 제대로 다녔으면 차장 정도 됐겠죠. 의뢰인 만날 때 시원시원하게 말하고 오세요"


항상 남성보다 여성이 많은 보험업계였지만 이상하게 보험금 청구 관련 업무는 거의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자동차사고 경험을 한번 떠올려보자. 차 사고났을때 보험사가 여자 손해사정사를 보낸 걸 본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싸우고 다툼이 많은 직업이라는 편견이 이렇게 만들었나? 여자가 약하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까? 그래서 여전히 보상을 처리할 때 젊은 여자가 나온다면 아니꼽게 생각하는 게 현실이었다. 개별적 인격의 특성을 직업, 그리고 사회와 조율하고 적응하기도 힘든 마당에, 편견 하고도 싸워야 하니 더 빨리 지칠 수밖에 없었다.


명함을 바꾼 건 100% 효과 만점이었다. 의뢰인의 폭언은 없어졌고 만족도는 높아졌으며 소개까지 나왔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뭐 이주임이야 워낙 산전수전 겪은 사람이라 그렇든 말든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사람이 얼마나 보이는 것만 보고 치중하면서 사는지 참, 아리송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더더더 많은 젊은 여성 손해사정사들이 병원에서 현장에서 종횡무진하며 유쾌하게 보험사건을 풀어갈 날들을, 세상이 조금 더 빨리 바뀌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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