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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쫑 Oct 21. 2023

지각하는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9시 업무 전, 회사는 항상 분주했다. 늦지 않게 헐레벌떡 오는 직원들, 여유 있게 커피를 사서 볼일을 보는 사람들, 옆팀은 코인과 주식을 대화 주제로 삼아 이야기 중이었다. 팀마다 출근시간 활용은 다양했지만, 어느 팀이나 업무 전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팀만큼은 매일 아침 9시 전은 항상 조용했다. 커피, 주식, 코인보다 더 재밌는 일이 아침마다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바로 오과장의 지각 여부였다. 나, 진대리, 이대리, 송대리, 김주임은 조용히 모니터 우측 하단의 시간만 보고 있었다. 째깍째깍. 8시 57분.. 8시 58분.. 드디어 9시!! 순간 오른쪽 밑 [탈 개미] 단톡방의 대화창이 반짝였다.


"창립멤버이자 최고 고인물 오과장 오늘도 지각이네요. 5분 이상 업앤 다운 내기 가실 분?"


이런 표현을 쓰긴 뭐하지만.... 오과장을 처음 봤을 때 당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오덕]이었다. 안경을 쓰고, 여드름이 많고, 관리하지 않는 뚱보의 체형에 슬리퍼를 찍찍 끌며 "허, 허"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다닐 때마다 방구석 오덕이 느껴졌다. 머리를 안 감은 건지 원래 빨리 기름진 건지 알 수 없는 떡진 머리와 어설프게 껴있는 눈곱들을 볼 때면 이러면 안되는데.... 참 사람은 편견 가득한 동물이구나 느껴졌다. 금융업계의 일이란 정말 유능한 직원 아니고선 성과라는 게 도긴개긴이라 업무 평가가 어렵기 때문에 평판, 근태, 사회성 등이 중요한데 이 모든 면에서 오과장은 꽝이었다. 특히, 오과장의 지각은 너무 티가 났다. 9시 전에 오면 큰 팀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했고, 이후에 오면 아무 말 없이 유령처럼 쓱 앉았다. 평소에 끌던 신발 소리 하나 안 내고 육중한 몸을 사뿐사뿐. 어! 언제 오과장이 왔지 싶으면 십중팔구 지각이었다. 오과장의 지각에 대해 말은 많았지만 사실 그것 때문에 직원들이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회사는 점심시간의 여유로움을 인정해주는 문화였다. 시간 자체도 11시 40분부터 12시 50분까지로 다른 회사보다 십분 길었다. 복지가 좋은 회사의 경우 한 시간 반 점심시간도 많았으나 통상 보험회사는 한 시간이 대다수라 십 분이 어디냐 싶었다. 가끔 따로 약속이 있거나 한 날은 대충 11시 30분 정도에 나가거나 1시 정도에 들어와도 이야기만 잘하면 허용됐다. 한 시간을 칼같이 지켰던 전 회사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서를 막론하고 점심시간에 유한 분위기였는데, 오직 오과장만 단속을 했다. 팀의 직속 후배인 이대리, 진대리는 정확히 점심시간에만 자리를 비울 수 있고, 50분 살짝 넘어서 들어오면 대단히 눈치를 줬다. 얼굴 한번 보고 시계를 한번 본다던가, 큰소리로 "어 지금 오네."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점심시간이 시작하는 11시 40분에 칼같이 일어나면 또 그것대로 눈치를 줬다. 퇴근도 윗사람 먼저라는 90년대 마인드를 지닌 사람으로서 점심시간도 '내가 일어나기 전까진 일어나지 마'라는 무언의 공기를 뿜어냈다.


친구들과 가끔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진대리는 3~4분 늦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앞에서는 "좀 늦네.", "지금 몇 시지?" 등의 문장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고, 진대리는 꾹 참으며 폭풍 메신저질을 했다. '아니 지는 매일 지각하면서 나한테 왜 자꾸 모라고 하나요.' '하.. 한마디 하려다 참았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잘했어. 그냥 한 귀로 흘려들어.'라든지 '그냥 모두의 평화를 위해 조용히 넘어가자.' 같은 메신저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가을바람이 황홀하고 낙엽이 만개한 날이었다. 날에 취해 탄천을 걷다 10분 늦게 들어온 진대리에게 "제정신이냐." "지금 몇 시냐", "전화는 왜 안 받냐."라고 갈궜고 욱함을 참지 못한 진대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좀 늦었다고 열 번이나 전화하는 건 심하지 않나요?"

"솔직히 어제 과장님도 지각했잖아요."

"한번 다 말해볼까요. 어제만 지각했나요. 지난주에는 9시 30분에 오셨잖아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하고,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법이다. 뭔가 핵심을 묘하게 비껴간 비유를 한 것 같은데, 요는 개도 지렁이도 빡치는 지점이 있다는 거다. 나조차도 집단생활을 하면서 하나둘씩 추가해온 '못 참아 목록'이 있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전화든 막말이든 진대리의 못 참아 버튼을 누른 게 틀림없었다. 영화관에서 몰입도가 높고 텐션이 가장 팽팽한 장면을 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푸근하고 나른한 모두에게 평범했던 오후가 한 직원의 따발총 같은 외침으로 긴장감과 박진감을 주는 곳으로 변모됐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모니터를 보고 있지만 손을 다 내려놔 키보드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그런 순간이었다. 오과장은 손가락을 쭉 피면서 손바닥을 진대리한테 보이며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대리. 이건 아니지. 여기 사무실이야. 다른 사람들도 보는데 예의 없이 뭐 하는 거야."


주위를 흘깃 보고나서 진대리는 곧 썩은 표정을 짓고 애매모호한 "죄송하네요. 네에↗"를 외치며 자리에 앉았다. 굳은 표정으로 오과장은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내 메신저는 반짝였다. '이번에 실수했네요. 이렇게 들이박으면 지는 건데.' 그리고 만든 단톡방이 '탈 개미'였다. 그리고 한 번쯤 당해본 팀원들을 섭외해나갔다. 오과장과 이대리, 오과장과 이사원, 오과장과 안대리. 진대리 이전에도 당한 사람은 많았다. 몇몇은 퇴사했고, 몇몇은 버티고 있었다. 별동대같이 일했던 나에게 오과장의 행동은 남과 남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참견할 만한 일도 아니고, 참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제주도 워크샵 이후에야 오과장과 김부장의 실체를 깨달은 나에게 진대리는 감춰왔던 대나무 숲을 공개했다.


탈 개미방, 그곳은 마치 차곡차곡 단서를 모으는 집단지성의 장이었다. 그의 실수 하나, 지각 한번, 막말 한 스푼들이 차곡차곡 쌓여 데이터화 되었다. 짝꿍이자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이대리는 그의 이상행동을 신랄하게 이야기했다. 그 방에서 새로 알게 된 게 많았다. 그가 생각보다 지각을 많이 한다는 것. 일주일에 세네 번은 기본이오, 열 시 넘어서 오는 날도 왕왕 있었다. 그리고 이석도 많다는 것. 인터뷰를 빙자해 매일 한두시간 비우는 건 일상이오, 심지어 몰래 조기 퇴근하는 일도 잦았다. 오후 다섯 시쯤 되면 반복적으로 하는 게 있었다. 구글 어스로 전 세계 캠핑장을 아이 트레블링 한다던가 와우(WOW) 사이트에서 아이템, 캐릭터 등을 보는 행위였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있으랴. 크게 보면 업무태만 등의 징계사유가 될 만했으나 또 따지고 들면 자잘한 그런 애매한 것들이었다.


사실 우리도 비슷하지 않나? 사무실 문을 열고 문에서 직원들을 멀리서 보자면 다들 모니터를 보고 키보드만들 두드리는 영혼 없는 여러 개의 점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들여본다면, 각각 소소하게 재미를 찾는 걸 볼 수 있다. 마음 맞는 동기들끼리 메신저 그룹방을 만들어 시시콜콜 이야기를 하는 직원들, 현란하게 알트 탭을 써가며 찰나의 순간을 이용해 쇼핑과 티켓팅을 하는 직원들, 화장실 변기 위에서 잠깐 숙면을 취하는 직원들. 경력이 조금 차면 나름의 방법으로 업무시간을 단짠하게 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일이 한가한 날이면 봄, 가을엔 탄천을 여름엔 카페를 전전했던 나도 나름의 달달한 루틴을 찾았다. 오과장도 어찌 보면 그랬다.


-이게 의미가 있을까?

-이건 일종의 근거 자료라 생각해야죠. 큰 거... 큰 거 하나만 잡으면.. 다 합쳐서 이야기할 거예요. 그리고 안되면 나가려고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총대는 제가 멜 테니 과장님이 꼭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22년 회사의 판매 전략과 교육 계획을 줌(Zoom)으로 설계사들에게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전국에 800명이 넘는 설계사가 듣는 자리였다. 김부장과 오과장, 염대리가 돌아가면서 발표를 하며 피피티를 넘겨야 했다. 다수가 들어올 때의 상황을 대비하여 마이크, 오디오 테스트 등도 심도 있게 진행했다. 한치의 오차도 있으면 안 되는 자리였다. 문제는 당일에 터졌다. 오과장이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9시 10분.. 9시 20분.. 9시 30분...


"야 누가 오과장한테 전화해봐."


그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모든 팀원은 그 자리를 땜빵하느라 고생과 빡침을 동시에 느꼈다. 오과장이 나타난 건 오후 3시. 늦잠을 잤다는 말과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왔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ㅋㅋㅋ


진대리는 빠르게 최부장과 면담을 신청했다. 회의실에서 무엇을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을 열고 나오는 전대리의 표정은 밝았다. 메신저 창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김부장이었다.


-너네가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줄 몰랐다. 진대리와 같이 술 한잔 할까?

-그러시죠. 이왕 가는 거 맛집으로 가시죠.


장소는 중앙해장으로 잡았다. 해장국과 전골로 삼성역에서 제일가는 맛집이었다. 맛집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김부장. 하지만 여기서 오과장을 내보내야 한다고 말하면 당황하겠지. 마음속으로 대사도 준비했다. "근태와 업무능력 둘 다 안 되는 최고참이 위에 있으니 직원들이 다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 다른 팀으로는 보내시죠. 팀원들이 다 같은 생각입니다." 진대리가 치고 마지막에 쐐기를 박는 식으로 주고받기로 했다. 중앙해장에 들어가자 김부장만 있어야 하는 자리 옆에 오과장이 앉아있었다.


"네 명까지는 가능하기도 하고.. 겸사겸사 내가 불렀어. 그래도 얘기는 들어봐야지."


아.. 이럼 안되는데. 우리는 말없이 전골과 참이슬을 시켰다. 소주 한잔, 전골 한입 꾸역꾸역 넣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김부장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이런저런 얘기를 시도했지만 대화의 끝은 소주 한잔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다섯 병이 비워지고 알싸하게 취할 때 오과장이 울먹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부장님.. 부장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회사가 어려워서 다 나갈 때 저 혼자 버티고 있었던 거... 그리고 제가 회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치"


"제가 회사가 시키는 거 안 한 적이 있습니까?"


"없지.. 없지.."


"제가.. 부끄럽지만 요즘 지각이 많은 이유는요... 요즘 회사 생각에 잠을 잘 못 자서 그래요. 그래서.. 요즘 지각이 많아졌습니다."


그는 두서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애사심, 회사의 역사, 요즘 애들과의 관계에 대한 어려움. 라떼는 문제없었는데.. 를 중얼거리며 이런 고민에 잠 못 잔다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풋.. 하며 웃음이 나오던 찰나 고개를 돌려 김부장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아아. 이 바보 같으니. 지각의 이유에 대해 듣고 난 김부장의 표정은 걱정과 안심에 찬 표정이었다.


"그럼 그렇지.. 난 뭐 다른 이유가 있는줄 알았어.. 함께 걸어온 역사가 8년이야.. 앞으로도 쭉 가야지. 회사 걱정은 회사에서만 하자. 몸 챙기고."


전대리도 오과장이 여기 있는 것부터 본 순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떤 얘기를 해도 자기만 바보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애꿎은 전골과 참이슬 7병을 비웠다.


-김과장 미안해. 오과장은 나의 아픈 손가락이야. 우리 잘해보자.


비틀거리며 집에 가는 길. 김부장한테 문자가 왔다.


진대리는 "격 떨어져서 못 다니겠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진대리가 나가자 [탈 개미] 방은 해체됐다. 김부장은 나를 부르더니 새로운 사업을 해보라며 아무와도 엮일 일 없는 고객 보험금 찾아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손해사정사들하고 고객을 연결해주는 아주 보람된 일이지. 내가 좋은사람 소개해줄께" 좋은 일이라는데 팽당한 기분이었다. 그때 받은 번호가 엄 팀장의 번호였다.


그리고.. 오과장은.. 오차장이 되었다. 제주도에서 설계사들을 만족한 공로가 많이 인정되었다. 그래.. 그곳에 가기 위해 우리는 와사비를 먹었었지..  누가 만족했는지, 만족도 조사를 어떻게 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와차(와사비 차장)로 불렀다.


1월 2일은 회사의 우수사원과 승진자들에 대한 상장 수여식이 있는 날이었다. 기쁜 날이었지만 소수의 사람이 해당되어 분위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9시 전에 주식, 코인, 대선 얘기로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는 직원들. 이슈에 비슷한 하루처럼 보여도 대화 주제는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커피를 사고 이것저것 하고 있으면 업무시간은 금방 찾아왔다. 8시 50분, 메신저 창이 깜박거렸다. 이 대리였다.


"과장님 아직까지 와차가 안 왔습니다. 오늘 와차 9시 행사 늦는다 안 늦는다 내기 갈까요? "


오늘은 또 오차장이 뭐라 변명할까. 기대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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