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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쫑 Oct 26. 2021

오늘도 와사비한 하루였어요

월요일 오전 열 시. 김부장이 제일 좋아하는 주간회의 시간이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각 팀원이 해야 할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공통의 주제에 관해 토론하는 시간으로, 다른 팀원들의 업무에 대해서도 듣고 팀의 방향에 대해서 논의하는 한국 기업들에 널리 쓰이는 소통 방법이다. 보통은 이렇다. 팀원 한 명 한 명이 회의자료에 적힌 지난주 업무와 이번 주 할 일에 관해 설명을 하고 팀의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 같이 토론한다. 이번 주의 주제는 [최우수 설계사 워크숍 기획] 관련이었다. 최우수 설계사는 연 소득 3억 이상 설계사로 나름 회사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우수 인재였다. 문제는 최우수 설계사가 70명가량 되고 지금이 코로나 시국이라는 것. 5인 이상 모임 금지를 지키며 대규모 여행을 기획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인원과 시간 제약이 있는 이상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진행한다고 해도 서로 불편할 텐데 꼭 해야 할까요?"  "마스크 쓰고 다니고 서로 아는 체도 못하는데 설계사들도 불편하지 않을까요?"  

   

특히 원여행 교육팀에서 온 진대리는 5인 이상 모임을 어기고 여행사를 통해 모임을 진행하다 언론에 나온 사례를 이야기하며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뭐, 코로나 때문에 퇴직하고 이곳에 왔는데 다시 여행 기획이라니 지긋지긋하겠지. 진대리 말고도 팀원 대다수는 부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내가 생각해도 준비할 것도 많고 고려해야 할 것도 많은 그리고 고려한다 하더라도 분명 사건사고가 터질 것 같은 여행이었다.     


"갑시다. 제주도"     


주간회의의 문제는 팀원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항상 결론은 팀의 터줏대감인 김부장과 오과장이 마지막 방향을 일방적으로 정했다. "제주도"로 운을 띠운 최부장은 "2014년"으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2014년은 무슨 해일까? 바로 최우수 설계사 워크숍이 시작된 날이었다. 최부장은 7년 동안의 세월 동안 최우수 설계사 워크숍이 어떻게 정착되었는지, 그리고 이 사업을 왜 교육팀이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 7년은 코로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휘몰아치는 폭풍과 거센 바람이 넘쳐나는 시간이었고 그 폭풍과 거센 바람을 뚫고 최부장은 성공했다. msg 흘러넘치는 라떼 이야기였다. 요점은 [똘똘 뭉치면 안 되는 게 없 다!]였다. 최부장은 봤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직원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중학교 애국 조회시간이 생각났다. 본인 뽕에 취해 이야기하는 교장 선생님과 그럴 때마다 썩소를 날렸던 우리들.      


"워크숍은 6월. 이제 한 달 남았으니까 교육팀은 워크숍 관련해서 기획과 일정을 짜고 영상팀은 워크숍에 들어갈 영상을 만들어봐. 그리고 김과장은 워크숍 때 같이 가서 도와주기만 해."     


나는 이 부서에서 깍두기 같은 존재였다. 게임으로 치면 NPC, 문학으로 치면 뭐.. 3인칭 힘없는 작가 시점이랄까. 교육성장부서였지만 업무는 플랫폼 개발 같은 신사업 기획이나 업계 현황 조사 등 혼자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고 타 팀원들과의 교류가 더 많았다. 그러다보니 나 또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여기 왜 있지?' 곰곰히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서 공동 업무에도 빠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최우수 설계사 워크숍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하니까 일손 부족할때만 참여 해라. 음. 나쁘지 않지. 오히려 그래서 공동 업무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그저 [넵], [알겠습니다]만 하면 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외로울 때도 종종 있지만 좋은 점도 있다. 부서에서 업무에 엮인 사람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부서원들의 대나무 숲 같은 존재가 되었다. 업무의 애로사항이라던가 보험 산업에 대한 궁금증 등. 뭐 원래, 일로만 엮이지 않는다면 모두 다 착한 사람 아니겠는가. 우린 왜 여기서 만났을까. 오늘도 주간회의가 끝나고 진대리는 폭풍 메신저를 시작했다. '보험회사는 원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자주 꾸미나요.'로 시작해 '과장님이 부러워요. 오과장하고 김부장하고 같이 일 많이 안 하잖아요.'로 끝나는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들.      


워크숍 준비가 진행될수록 전대리의 메신저 빡침은 심해졌다. '과장님, 이 사람들 제정신이 아니에요.' 라던지 '실내에서 캠핑 분위기 나는 포차를 꾸며보겠데요. 실내에 타프를 설치한다네요. 다 불태워버리고 싶네요.' 같은 메신저들. 그때마다 나는 '그래도 잘해봐. 얼마 안 남았잖아.'라든지 '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 같은 메신저를 보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때까지만 해도 진대리가 너무 수동적인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하지만 와사비와 말 육포 사건을 직접 경험하고 내 생각은 백팔십도 변했다.     

 

"김 과장! 잠깐 회의실로 들어와. 우리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는데 결론이 안 나서 그래. 그냥 의견만 내면 돼."      


주말마다 지긋지긋하게 내리던 비는 그치고 하늘이 매우 맑아 창밖을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은 그런 날, 회의실로 부장이 날 불렀다. 워크숍 2주 전이었다. 회의실 문을 여는 순간 알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눈앞에는 일회용 접시 다섯 개, 그리고 그 위에 녹색 와사비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부장은 신이 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 먹을 횟감과 사장님을 직접 섭외했는데 사장님이 와사비만 가져와달라고 부탁했고, 아무 와사비나 살 수 없으니 본인이 직접 평이 좋은 다섯 종류의 와사비를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삼광, 풀무원, 화홍, 청정원, 움트리. 그리고 옆에는 제주도 웰컴 선물인 말 육포와 제주도 감귤이 있었다. 소과장과 부장을 제외한 나머지 팀원은 와사비보다 더 푸르게 질려있었다. 두 시간 동안 얼마나 먹어봤을까.    

 

 "김과장도 한번 먹어봐. 난 삼광이 좋은데 소과장은 풀무원이 낫다네. 맵다 싶으면 여기 육포랑 귤도 같이 먹으면 돼."     


이걸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어차피 회랑 같이 먹을 건데. 와사비만 먹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회를 시킬 순 없잖아. 회와 같이 먹는다 생각하고 와사비 맛을 봐야지. 먹어보고 각각 요리왕 비룡이처럼 표현해봐."     


"횟집 사장님한테 추천받아 보시죠. 저희보다 잘 알 텐데."     


"에이 그러면 정성이 없지. 설계사들이 제주도에서 먹는 음식 중에 우리가 먹어보지 않고 추천하는 경우가 있어선 안돼."     


"약간 맵다 싶으면 귤 하고 같이 먹어봐."     


이 순간을 모면하는 길은 빨리 와사비를 먹고 추천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삼광, 풀무원, 화홍, 청정원, 그리고 움트리. 로마 황제도 이 정도로 대접 안 했을 텐데.     


"고등어회랑은 삼광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뭔가 매우면서도 끝에 달짝지근함이 느껴지는 게 고등어의 비릿함을 잘 잡아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도 와사비 토론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떤 와사비를 써야 하는지. 제주 감귤은 숙소당 한 상자를 넣을지 두 상자를 넣을지, 말 육포를 선물에 넣어야 하는지 따위에 하루를 다 소비하고 말았다. 귤이 모자라면 그만 먹으면 되고 남으면 가져가면 되는 거 아닌가. 쓸데없는데 디테일한 부장 때문이었다. 회의실 문을 나왔을 때 창가에 비치던 노을은 푸른색처럼 보였으며, 자리에 앉아서 다른 일을 하려 해도 와사비를 먹으며 품평하던 내 모습만이 떠올랐다.     


-과장님 제가 말했죠. 이 사람들 미쳤다니까요. 모든 회의가 다 이래요.     

-와사비 같다는 말이지?     

-1일 2와사비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미쳐버리겠어요.     

-하.. 참. 1일 2와사비라. 이걸 어떻게 견뎠지?     

-저 교육파트 경력직인데, 여기서 교육 빼고 다해보는 거 같아요    

-내가 혹시 나중에 너랑 일하다가 좀 병신 같거나 꼰데 같을 때가 있으면...     

-그러면요?     

-과장님 와사비. 여섯 단어만 말해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과장님 우리 부서에서 서열 두 번째인데 부장님한테 한마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희 미쳐버리겠다고요.     

-음... 쉽지 않아.     



전 와사비 맛을 너무 잘 알아요! - 지큐 GQ Korea 2021.11


그래. 이건 아니지. 곰곰이 생각하다 부장님께 메신저를 보냈다.     


-부장님.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     

-오! 김과장이 저녁을 다 먹자 하고. 무슨 일 있어?     


평소 부장이랑 밥을 잘 안 먹어서 밥만 먹자고 해도 좋아하는 김부장. 하지만 내가 오늘 와사비같은 회의는 그만하면 좋겠다라고 말하면 당황하겠지. 마음속으로 몇 가지 멘트를 준비했다. '그냥 정하고 실행할 것과 토론할 게 혼동되어 있어 회의시간이 길어집니다.‘ 라든지 ’와사비같은건 그냥.. 검색해보고 시키죠.' 같은 멘트들. 저녁 장소는 삼성역 앞에 있는 XX바락이었다. 모둠회와 간장새우, 카레우동이 일품인 곳이었다. 우리가 시킨 메뉴도 모둠회와 간장새우, 그리고 한라산 한병. 어두운 분위기에 홀연히 빛나는 제등은 일식집의 분위기를 빛냈으며 갓 나온 모둠회 한 접시는 영롱함 그 자체였다. 시작은 잡담이었다. 김부장이 좋아하는 요리 이야기. 주말마다 제빵을 하는 김부장의 빵 굽는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이런 얘기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한번 끊어줘야 했다. 아.. 화장실 한번 갔다 와야겠다. 화장실을 갔다 오자 얼굴이 한층 밝아진 부장님.    

 

"김과장이 잠깐 화장실 갔을 때 말이야. 내가 물어봤어."     


"어떤 거요?"     


"여기도 삼광 와사비를 쓰더라고. “     


삼광 와사비를 이야기할 때 부장님의 표정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의 표정과 흡사할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눈이 컸나 싶을 정도로 확대된 동공과 반짝거리는 눈망울,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 우리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로 시작한 최부장의 멘트는 어느덧 2014년도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빵모자를 쓰고 최우수 설계사들 앞에서 빵을 구워주고 직접 준비한 꽃과 손으로 편지를 작성한 이야기들. 마지막 멘트는 [우리는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 조금 힘들더라도 참고 같이 잘해보자]였다.     


아아! 누가 그런 분위기에서 부장한테 와사비, 육포, 그리고 감귤이 별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입에서 나오는 식빵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저 끄덕이며 들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모둠회에 같이 곁들여 나온 와사비가 미울 뿐이었다. 애꿎은 회만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 실패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 전대리에게 카톡을 보냈다.     


- 괜찮아요 ㅎㅎ. 그냥 와사비가 와사비한거죠. 사람이 어디 쉽게 바뀝니까.     


제주도 워크숍까지 2주. 워크숍 포함하면 3주 남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와사비같은 일이 얼마나 더 펼쳐질까. 문득 제주도가 두려워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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