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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글놀 Dec 20. 2024

첫 발령지의 신고식

사색을 할 수가 없는 신고식, 첫 행사 그리고 첫 민원

강좌가 시작됐다.

근무하고 처음 진행해 보는 평생교육강좌였다.

프로그램을 직접 계획하고 운영해 보는 경험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아침,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침대에 누워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이불을 걷어내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여유로운 시간, 먹지도 않던 아침밥을 챙겨 먹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한 타임 빠른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자료실 문을 열었다.

첫 문을 여니 차가운 공기와 오래된 종이의 은은한 향이 섞여 내 코끝을 스쳤다. 

마치 추운 겨울에 따뜻한 난로를 피운 듯, 

찬기운과 온기온이 어우러져 따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날이 밝아지면 아침에 일어나듯이, 책들도 자료실 불이 켜지면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자리에 앉기 전에 서가를 한 바퀴 둘러보면서 인사를 했다. 

밤새 무슨 꿈을 꿨는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책들이 보였다. 

악몽이라도 꿨을까 봐 쓰다듬어 주고는, 똑바로 세워줬다.


인사를 마친 후,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수강생들에게 개강 문자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하령도서관, 평생교육강좌 개강안내>


안녕하세요 하령도서관입니다.

오늘은 "붓 끝에서 피어나는 이야기"

평생교육강좌 개강날입니다.

10시에 2층 1 강좌실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D


문의: 123-4568




10시.

수강생들이 모두 강좌실에 모였다.

강사님 소개를 짧게 했고, 곧바로 수업이 시작됐다.

자료실로 내려와서 자리에 앉았다.


"휴~"


짧은 한숨과 함께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각종 통계를 제출하라는 공문에 마음이 급했다.

평생교육 통계, 도서관 통계, 지역 도서관 통계,

정보 관련 서류...

내용은 비슷해 보이는 통계들이

오징어처럼 잘개잘개 쪼개져 끝도 없이 늘어났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수강생 한 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큰소리를 치며 자료실에 들어왔다. 


수강생: "위에 사물함 좀 씁시다!"

나: "무슨 일이시죠?"

수강생: "사물함이 저렇게 많은데 좀 쓰자고요. 앉아서 쳐다보지만 말고 따라올라 와봐요"

나: 아! 알겠습니다.


벌떡 일어나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이용자분 뒤를 따라 올라갔다.

쉬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강의실 안에 있는 사물함 근처에 모여 있었다.


수강생: "여기, 여기, 여기(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사물함 좀 쓰게 안에 내용을 좀 비웁시다!"

나: "아, 선생님. 이 사물함은 서예반만 쓰는 게 아니라, 다른 강좌에 오시는 분들도 사용 - "

수강생: "뭔 말이 많아! 이번에 새로 들어왔죠? 잘 모르나 본데, 나 여기 몇 년을 이용한 사람이에요. 하라 하면 그냥 해요!"


당황스러웠고, 혼란스러운 감정에 입술을 한번 꾹 다물었다. 

그리고 최대한 정중하게 다시 말씀드렸다.


나: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분께도 여쭤봐야 하는 문제라 확인해 보고 -"

수강생: "공무원이 말이야! 내 세금으로 월급 받는 주제에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나도 너 같은 딸이 있어!"

 

갑작스러운 딸 멘트는 아르바이트할 때 자주 들었던 일이라 익숙했다.

그런데 공무원 세금이야기는 TV에서만 봤던 멘트였는데, 내가 직접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첫 발령지에서 이렇게 빨리 말이다.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나: "선생님, 저도 그 세금 같이 내고 있습니다. 확률도 계산을 해볼까요? 그리고 따님이 있으시다면 이런 태도는 삼가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수강생: "뭐라고? 이게 어디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없을 같아서 강의실을 나왔다. 

계단을 미처 다 내려오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계단 난간을 잡았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으려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새어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일반자료실 선생님이 밖으로 나오셨다.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이유를 물으셨고,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셨다.


"국민신문고에 올릴 거야!! 내가 못할 것 같아? 내가 누군지 알고!!"


수강생 분은 소리를 지르면서 강의실을 나왔고, 나를 보더니 삿대질을 하며 거친 말을 쏟아냈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고, 그는 그대로 도서관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곧바로 관장실로 가서 상황 설명을 드렸고, 죄송하다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씀드렸다.


"많이 놀랐죠? 내가 봤을 때는, 김나윤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일단 자료실고 돌아가서 진정하고 있어 봐요. 수강생 분이 오시면 내가 말해볼게요."


자료실로 돌아가서는 계속 자책했다.


'내가 조금만 참았으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오자마자 신문고라니... 민원이라니....'


그때 자료실 문이 열렸다. 


"내가 아주 가만있지 않을 거야!"


아까 그 수강생분이었다. 

그는 술냄새를 남긴 채 곧바로 관장실로 갔다.


--- 다음 화에 이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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