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관계의 밀도를 만드는 순간들
관계는 기억으로 남는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건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시간을 내 안에 남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이름을 듣지만 그중 오래 남는 이름은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기억하려 했던 사람이죠. 사회복지 현장은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이름으로 끝나는 공간이에요. 그래서 저는 상대를 기억하려 노력합니다. 그 기억이 관계의 밀도를 결정하니까요.
기억이 외우는 능력이 아니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제로 실행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태도는 꼼꼼할 수록 좋아요. 요즘은 <리멤버>처럼 모바일 명함앱도 많지만 저는 아직도 명함철을 쓰고 있어요.(물론 리멤버도 씁니다) 그리고 명함과 함께 그를 만나면서 인상 깊었던 한 문장을 몰래 함께 적어둡니다. “꼭 와보고 싶었던 기관”, “00년째 후원중.” 같은 정보들을요.
뿐만 아니라 저는 누구든 미팅을 마치면 CRM에 저는 꼭 두세 줄의 메모를 남겨둬요. “초등학생 자녀 둘을 둔 40대 여성, 책을 좋아한다고 함. 해외보다 국내사업에 관심을 보임.” 물론 더 많은 정보가 있으면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정도가 전부예요. 하지만 몇 달 뒤 다시 전화를 드릴 때, 이 메모 덕분에 대화의 시작과 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자녀분들이 새 학기를 시작했겠네요.”라는 한 문장만으로 상대는 ‘기억되고 있다’는 감정을 받아요.
그리고 이 경험들을 후배들에게 꼭 강조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런 기억의 구조는 개인을 넘어 조직의 문화가 됩니다. 한 사람이 남긴 기록을 다른 동료가 읽고 이어받을 때, 관계는 ‘개인의 친절’을 넘어 ‘조직의 언어’로 진화하죠. 후원 첫 상담의 말투, 환영 메시지의 어조, 행사 초대 메일의 문장 하나까지 세세하게 적용하고 그 내용을 팀원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어요. 후원자는 어제와 오늘 다른 직원이 응대하더라도 어제와 같은 단어와 분위기가 느껴질 때 안정감을 갖습니다.
예전에 한 후원자님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카카오톡으로 받은 첫 땡큐 메시지는 너무 형식적이었다. 그런데 한 달 뒤 후원금이 쓰인 이야기를 받았을 때 마음이 바뀌었다.” 그 편지에는 아이의 얼굴과 직접 쓴 서명이 있었고 “후원자님 덕분에 학교를 꾸준히 다시고 있어요.”라는 아이의 손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문장이 후원자님의 기억 속에 남았고 그 분은 꽤 여러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렇듯 기억에 남는 경험은 지속을 만듭니다.
이제까지가 단순히 이런 감정의 변화를 추구하는데서 그쳤다면 오늘날 많은 조직들은 이러한 후원자의 경험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SNS에서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해, 관심과 고민을 지나, 후원을 결심하고, 어느새 일상이 되고,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게 되는 흐름. 이 여정이 우연히 이루어진 게 아니라 철저하게 설계된 단계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