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의 초대

by 서효봉

어릴 적 난 게임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함께 했던 보드게임, 오락실 게임, 컴퓨터 게임은 나에겐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다. 물론 집안 형편상 마음 놓고 게임을 즐기긴 어려웠다. 친구네 집에 가서 눈치 좀 보며 게임을 하거나 오락실에서 구경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오락실에서 등골이 서늘하다 싶으면 늘 엄마가 뒤에서 쏘아보고 있었는데, 등짝 스매싱을 당하고 집으로 잡혀가도 난 게임을 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중학생 때 나에게도 컴퓨터가 생겼다. 컴퓨터를 하면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말로 엄마를 설득해 486 컴퓨터를 샀다. 그 때의 기쁨이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친구네 집과 오락실을 전전하던 나에게 본격적인 컴퓨터 게임의 시대가 열렸다.


난 RPG게임을 좋아했는데 주로 영웅이 등장해 세상을 구하는 스토리였다. 영웅은 늘 기억상실이거나 얄궂은 운명을 품고 있었다. 적들을 물리치고 온갖 고난을 헤쳐 나가다 보면 도움을 주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대부분 주인공은 남자였고 작고 예쁜 요정이 주인공을 도와줬다. 요정은 주인공이 위험할 때 구해주거나 막막할 때 결정적인 힌트를 줬다. 처음엔 고마웠지만 이런 스토리가 반복되니 차츰 의구심이 들었다. 이럴 거면 요정이 세상을 구하면 될 텐데 왜 굳이 주인공을 돕기만 하는 걸까? 운명이라고 했다. 게임 같은 판타지 세계에서 운명이라고 하면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다. 그렇게 운명은 늘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글쓰기를 하다보면 첫 문장 쓰는 게 어렵다는 걸 느낀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어도 막상 시작하려면 쉽지 않다. 시작부터 ‘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버리면 더 이상 쓸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딘가에 빗대어 표현하거나 적절한 사례를 들면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겠는데 그게 참 어렵다. 프로 작가들처럼 무언가에 빗대어 표현하는 게 익숙하다면? 사례를 데이터베이스화 해서 정리해 둘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어렵지 않게 첫 문장을 시작하고 망설임 없이 글을 쓸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멋진 비유에 익숙하지도 사례를 수집하지도 않는다. 여유가 없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힘들여 글을 쓰겠다고 생각지도 않기 때문이다. 프로 작가가 될 만큼 준비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큼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은 갖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 애매한 상황일 때 글쓰기는 굉장히 어려운 벽처럼 느껴진다. 이 상황을 극복하려면 요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영웅이 위험할 때 구해주거나 힌트를 주는 요정.



그럼 요정의 도움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게임에선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거나 막막할 때 등장하지만 현실에선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요정은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표현을 써야겠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야겠다.’고 확신을 갖게 해주는 글쓰기의 영감(靈感)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글을 쓰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이 왜 막히는지 생각해본다. 집중력이 부족해서 막힌다면 조용한 곳으로 가든지 커피를 마시든지 잠시 쉬든지 한다. 그런데 만약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고 내 능력 밖이라는 생각이 들면 쓰기를 멈추고 요정을 기다린다. 뭐 물론 요정을 기다릴 필요 없이 대충 쓸 수도 있지만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이런 방법들을 권해본다. 일단, 산책을 하거나 책을 보라. 글의 논리에서 벗어나 여유를 가지면 생각보다 일찍 요정이 찾아오기도 한다. 요정은 ‘이거다!’ 싶은 아이디어를 들려주고 그게 확실하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만약 그럴만한 여유가 없을 땐 그 주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냥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보면 일상생활 속에 숨어 있는 요정을 만날 때가 있다. 그 요정을 초대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주제와 연결시키면 갑자기 신이 나면서 글이 마구 써진다. 쓰면서 쾌감도 느껴진다. 이렇게 딱 맞는 재료를 어디서 구했나 싶다. 운명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이렇게 되려고 기다렸나보다. 운명적 만남을 축하하며 글을 완성하고 나면 다른 글보다 더 애착이 간다.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선배가 밥이나 먹자고 한다. 누군가와 밥을 같이 먹는 일은 글 쓰는 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망설이다가 나간다.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쪽 뇌에서는 원고를 계속 생각한다. ‘밥만’ 먹고 재빨리 귀가하여 쓴다. 그러고 나면 책상에서 낑낑댈 때는 안 풀리던 문장이 잘 풀리기도 한다. 밥이라는 별의 반짝임, 선배가 던진 말의 빛같이 불현 듯 나타난 유혹에 금을 긋고 다른 생각과 정보를 이어 글을 한 편 완성한 것이다.


글쓰기를 하는데 요정을 꼭 초대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다. 다만 글쓰기를 힘들고 어려운 ‘작업’ 또는 ‘노동’이라 여기는 건 슬픈 일이라 생각한다. 글을 쓰는 과정이 게임처럼 즐겁고 흥분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글쓰기를 게임처럼 즐기는 구체적 방법을 찾아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여유는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단번에 글을 끝내버리거나 망설임에 포기하는 길보단 느긋하게 여유를 갖고 요정을 기다려보자.


빛나는 요정의 목소리가 들린다. 황홀한 글쓰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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