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에게서 소년에게

by 서효봉

Lazenca.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처음으로 샀던 노래 앨범 이름이다. 맨날 게임만 할 줄 알았던 내가 카세트테이프(이게 무슨 시조새 파킹하는 용어인가?)를 샀던 이유는 순전히 친구들 때문이다. 중학생이 되면서 둘레 친구들은 음악이라는 고급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다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흥얼거리기 바빴다. 난 예외였지만.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은 컴퓨터 게임을 복사해주는 대신 내가 갖고 있는 노래 테이프를 빌려달라고 했다. 노래는 라디오에서 듣는 거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노래 테이프라는 아이템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없는 티를 낼 순 없어 일단 알았다고 했다. 처음엔 그 당시 노점상에서 2500원 정도에 팔던 최신가요 모음 테이프를 사서 빌려줬는데 좀 지나니 다들 그런 짝퉁 테이프는 거절하기 시작했다. 정품 앨범이 필요했다. 비싼 녀석들. 쩝. 어쩔 수 없이 시내 레코드점에 들려 정품 앨범을 물색했다. 주인아저씨는 ‘남자라면 이거지!’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며 내게 2개의 앨범을 추천했다. 하나는 김민종 앨범이었고, 다른 하나는 넥스트 앨범이었다. 나야 뭐 뭘 사든 정품이면 관계없었지만 은근히 넥스트 앨범을 들이대며 열변을 토하는 아저씨 때문에 그 앨범을 샀다. 빨간 표지에 게임 속 인물 같은 남자 넷이 서 있는 그 앨범을 손에 들고 집에 왔다. 어차피 빌려줄 용도지만 그래도 첫 개시는 내가 해야 할 것 같아 테이프를 꺼내 노래를 들어봤다.


“라젠카~ 세이브 어스~ 라젠카 세이브 어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이런 노래는 처음 들어본다. 잠시 들어보려고 켰다가 그 자리에서 테이프가 다 돌 때까지 들었다. 그로부터 거의 한달 넘게 신해철의 마성에 빠져 지냈다. 특히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노래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어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노래로 인해 사춘기의 감수성이 깨어난 것 같다. 그 이후로 나는 ‘왜 사는 건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같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의 철학적 고민은 꽤 깊었지만 이해받지 못했다. 친구한테 왜 사냐고 했다가 시비 거냐고 핀잔 듣기도 했고, 선생님께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하냐고 했다가 맞기 싫으면 공부하라고 협박당하기도 했다. 엄마한테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가 썩을 놈이 되었다. 도서관에서 철학책을 빌려 봐도 뭔 소린지 모를 용어에 철학자들 소개만 잔뜩 되어 있었다.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고 그렇게 이상한 시기는 지나갔다.


고등학생이 되고 수능 전쟁터를 지나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은 자유로웠다. 수업만 듣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동기들과 몰려다니며 농구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노래를 불러댔다. 너무 자유로워 그런지 꽤 열심히 놀았지만 허전함이 남았다.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여행이라고 어디 멀리 해외에 간 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즉흥적으로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 요금표를 보고 내가 가진 돈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표를 샀다. 목적지는 통영. 날씨는 흐렸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도로를 달리니 차창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들이 뒤로 미끄러졌다. 버스에선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운명처럼 김민종 노래가 나오고 뒤이어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가 나온다. 넥스트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귓가에 맴돈다. 난 그 날 다시 이상한 시기를 겪었다. 한산도를 거닐면서 내 자신에게 왜 사는지 물어봤고, 해양대학교를 서성거리며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지 따져보았다. 통영대교에서 똥폼을 잡으며 나는 누구인지 고민했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다. 뭐 대충 엉망으로 대답하려면 할 수도 있다. 왜 사냐고? 태어났으니까 살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냐고? 행복하려고 이러고 있지. 나는 누구냐고? 난 나지. 이런 대답을 할 줄 몰라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듣고 있는 건 아니다. 이 질문은 답이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질문 자체가 내 존재를 증명한다.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그 과정이 삶이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겪은 이상한 시기는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테고, 그 생각의 진통을 겪으며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생각이 중요하다고, 그 생각 자체가 우리의 의미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한 때 지나는 소나기처럼 우리의 마음자락을 적시는 고민이라 여긴다.


삶에 대한 고민, 나에 대한 고민이 실종된 상태로 살아가는 건 막막한 일이다.

돈 벌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며 인생을 살아내는 끝 장면에서 우린 정말 후회가 없을까? 왜 살고 무엇을 위해 살고 내가 누군지 고민하지 않을 때 우린 살아지는 대로 살게 되고 평생 불안을 짊어지고 산다. 내 삶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무너지거나 떠나갈 때, 누군지도 모르는 내가 병들어 쓰러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 삶이라 여겼던 것, 삶의 이유였던 것, 나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눈물 흘리게 한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그저 삶이란 원래 이런 거라고 체념할 뿐이다. 그러면서 고통이 삶의 내용이 된다.



얼마 전 소설가 김연수의 강연을 들었다. 강연 내용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가 생각하는 ‘삶의 목적’이었다. 그는 우리가 흔히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하는 ‘행복’은 다른 사람이 존재할 때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행복은 다른 사람들을 전제로 할 때 성립하는 목적이다. 그럼 그가 생각하는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건 ‘평화’다. 내적인 평화는 다른 사람을 전제하지 않아도 혼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목적이라고 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그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다.


삶의 목적을 넘어 내가 누구인지 질문하는 건 더 근본에 가깝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라는 노래 가사처럼 나라는 존재는 자기 분열하기도 한다. 때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내가 나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거울 속에 내가 나라고 선발되기도 한다. 그 누가 나인지 뭐가 나인지 고민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때때로 우린 그런 것들을 진짜 나로 규정하고 삶을 꾸려간다. 고민하지 않고 정한 ‘나’라는 존재는 불안감을 낳는다. 나에게 큰 충격을 준 책 에크하르트 톨레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내용물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의 내린다. 지각하고, 경험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이 내용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물이 관심을 완전히 차지해 버리며, 그들이 동일화되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삶'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인 삶' 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내용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 상태와 감정 상태는 물론 나이, 건강, 관계, 경제력, 일, 생활환경 등을. 사건들, 즉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당신 삶의 외부환경과 마음의 환경, 당신의 과거와 미래 모두가 이 내용물의 영역에 속한다. 그렇다면 내용물 외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 내용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 바로 의식이라는 내적 공간이 있다.


진짜로 삶의 목적이 ‘평화’인지, 나라는 존재는 ‘의식이라는 내적 공간’인지 확실히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김연수나 톨레가 내린 결론은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대답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결과물이다. 난 그 결과물이 마음에 든다. 무작정 그 결과물이 좋다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 공감이 가고 그 이유가 와 닿는다. 난 요즘 이상한 시기를 더 자주 겪고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렇게 되었다. 이젠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듣지 않아도 심각한 똥폼을 잡는다. 질문하고 상상하고 공부한다. 확실히 알 순 없지만 뭔가 조금씩 행복해지고, 어떤 면에서 조금씩 평화로워지고 있다. 물론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른 채 엉뚱한 나에게 매달리는 35년 묵은 소년이지만, 어른이 되는 길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다. 중학생 때 내 마음을 홀린 이 노래의 마지막 구절을 남기며 이만 총총.


“소년아 저 모든 별들은 너보다 먼저 떠난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란다.

세상을 알게 된 두려움에 흘린 저 눈물이 이다음에 올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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