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천은 역시 예상대로 초절정 고수였다. 털보를 향해 손을 한 번 휘저었더니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칼은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뒤늦게 몰려오던 산적들 또한 손짓 한 번에 어딘가로 튕겨 나가 보이지 않았다. 민정은 백운천을 향해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건, 또 뭔가? 자넨 진짜 희한한 걸 많이 아는군.”
“스승님, 이건 최고라는 뜻입니다. 저기 저 불쌍한 아저씨, 아니, 저의 제자를 거두어 주시길 부탁드려요.”
“그래, 그래. 일단 돌아가서 자네가 왔다던 그 세계 이야기 좀 더 해주게. 그 어떤 비급에서도 본 적 없던 이야기던데.”
인재와 민정 그리고 백운천은 화산파의 본거지로 돌아왔다. 인재는 민정으로부터 그동안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민정은 비 오는 날 화산파 매화나무 앞에 쓰러져 있었다. 화산파 장문인은 문파에 중요한 역할을 할 아이가 내려왔다며 민정을 잘 보살펴 주었다. 특히 일대제자 백운천에게 그 역할을 맡겼고, 백운천도 민정이 마음에 들어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 이쯤 되니 인재와 민정은 다른 소설가들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다 함께 이 세계로 넘어왔으니 그들도 이 세계의 어디쯤 있지 않을까? 백운천에게 그들의 행방을 알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다. 천하의 모든 정보는 개방파가 쥐고 있으니 그들을 찾아가 보라 했다.
“개방파면 거지들 말인가?”
“아마, 그럴걸요.”
“거지를 어디서 찾지? 마을에 가면 있으려나?”
“뭐라도 얻어먹으려면 마을 장터 비슷한 데 있지 않을까요?”
인재와 민정은 백운천에게 외출 허락을 받은 후 마을 장터로 내려가 거지를 찾아다녔다. 무협 소설의 세계는 보통 중국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 마을에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사람들 사이에 떠밀려 다니다가 얼떨결에 거지 패거리가 벌이는 길거리 공연을 보게 되었다.
“이거 우리나라 각설이 공연 같은 건가?”
“어? 저기 저 사람?”
“누구? 어?”
공연은 주로 차력 시범이었다. 기왓장을 깨고 철 막대기 같은 걸 구부러뜨리는 공연인데 기왓장과 철 막대기를 옮기는 거지들이 눈에 익은 사람들이다. 예상대로 동혁과 준수였다. 하필 거지라니. 인재는 산적에게 쫓겨 다니긴 했지만, 저들에 비하면 양반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인재와 민정은 동혁과 준수에게 말을 걸었다. 동혁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표정이 환해지더니 말했다.
“우왓! 인재 씨! 민정아! 반갑다. 반가워. 살아 있었구나!”
“그러게요.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에요.”
“우리 좀 구해주라. 저 사람들한테 이야기해서….”
그 말을 듣고 민정이 거지 패거리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에게 다가가 뭔가를 내밀었다. 그랬더니 민정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뭐든지 다 하라는 듯 관대한 웃음으로 배웅까지 해주는 게 아닌가? 돌아온 민정에게 동혁이 물었다.
“이야, 너 가서 뭐라고 했길래 저 사람들이 저렇게 싱글벙글이야?”
“그냥 화산파 표식 보여주고 돈 몇 푼 주면서 백운천 제자라고 했을 뿐인데요?”
“아, 그래? 거참. 무협 세계도 똑같네. 화산파라는 말 한마디에 저렇게 바뀌다니.”
무사히 동혁과 준수를 구출한 인재와 민정은 화산파로 돌아왔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화산파 사람들이 전부 끔찍하게 살해되어 있었다. 장로들과 장문인까지 모두. 유일하게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은 백운천뿐이었다. 그는 심한 내상을 입은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민정에게 혈교가 쳐들어와 화산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이 사실을 소림사, 무당파를 비롯한 무림 연맹에 알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피를 토했고, 남은 내공을 모두 민정에게 전한 뒤 숨을 거두었다. 인재와 민정, 동혁, 준수는 할 수 없이 무림 연맹의 본거지인 소림사를 찾아 나섰다. 일주일 넘게 헤매다 말로만 듣던 소림사에 겨우 도착한 일행은 드디어 방장 스님 정각을 만나게 되었다.
눈썹이 새하얀 정각은 이미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었다. 무림 연맹 회의도 미리 소집해 두었다. 엄숙한 회의 장소에는 무당파를 비롯한 나머지 구파일방의 문파 대표들이 모여 있었다. 한데 무당파 대표의 뒤로 어떤 여인이 서서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희경이었다. 그리고 또 놀라운 건 정각 스님의 뒤에는 루키가 서서 이쪽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인재는 생각했다. 이거 뭐, 굳이 다른 소설가들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이야기상 그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소설을 쓰더라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말이다.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되니까.
아무튼, 그렇게 무림 연맹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혈교라는 단체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가더니, 특별히 고수들을 뽑아 선봉대로 보내기로 결의했다. 연맹의 세력을 모아 대항하려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보내는 선봉대다. 정각이 말했다.
“그럼, 문파별로 혈교에 선봉으로 보낼 고수를 추천해 보시오. 우리 소림에선 소승 뒤에 서 있는 이분을 보내고자 하오.”
사실 모든 문파의 속내는 비슷했다. 그런 위험한 곳에 자기 문파의 고수를 내어줄 리가 없었다. 그저 생색낼 만한 희생양을 보내는 것이다. 무당파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저희 무당파에선 이분을 보내려 합니다.”
뒤에 서 있던 희경이 대표들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장 스님! 큰일입니다. 절 내에 불이 나더니 혈교 강시들이…. 으악!”
상황을 전하러 온 스님은 비명과 함께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갑자기 덮쳐온 강시들은 끝없이 몰려왔다. 회의장에 모인 그들 모두 초절정 고수지만 아무리 고수라 해도 인간이다. 강시들을 파괴하고 또 파괴해도 끝없이 계속 밀려드는데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힘이 빠진 무림 고수들이 하나, 둘씩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강시에 둘러싸인 여섯 명의 소설가는 민정이의 무공 덕분에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핏빛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강시들의 활동이 멈췄다. 강시들을 산처럼 쌓아 만든 탑 위에 검은 얼굴이 하나 나타나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 얼굴은 바로, 영래였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생각 밖이군. 겁 없이 설친 대가가 뭔지 보여주겠어.”
다시 바퀴벌레처럼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던 강시들은 소설가들 가운데 희경을 붙잡아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끌려가는 희경을 보며 루키가 절규했다.
“안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