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오래될수록 희미해지지만, 어떤 기억은 오래될수록 선명해지기도 한다. 은지의 기억도 그렇다. 모든 일이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날의 그 기억은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매일 같은 꿈을 꾸고, 아침이면 벙어리가 된다. 그날,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사라진 그날 은지는 계속 울었고, 울다 지쳐 잠들었다 일어나 다시 울었다.
갈색 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은지의 강아지 주니가 들어왔다. 은지는 주니를 끌어안았고, 갑자기 어떤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와 그 둘을 떼어 놓았다. 사람들은 은지를 긴 이름의 이상한 학교로 보냈다. 한 달에 한 번만 주니를 만날 수 있게 해줬다.
그녀는 학교에서 괴롭고도 힘든 어떤 훈련을 받았다. 친구 한 명 없이 지내며 늘 말이 없던 은지는 주니와 만났을 때만 한 달 동안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해루는 은지와 함께 우주선으로 돌아왔다. 은지는 슬리피가 카르텔에 몰래 들어와 코타나 거래를 시도했다고 이야기했다. 시리우스의 정보망을 통해 그를 추적해온 은지는 오리진에서 누군가의 공격을 받았고, 그녀와 함께 온 모든 이들이 죽었다고 했다. 그녀가 키우던 강아지까지.
그녀가 알려준 슬리피의 다음 목적지는 제우스 행성이었다. 제우스 행성은 카르텔에 이어 두 번째로 코타나 거래가 활발한 곳이다. 은지의 이야기를 들은 미스터 코너 씨도 슬리피가 제우스 행성으로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은하계 여행자들은 언제나 카르텔 다음은 제우스라고 일종의 공식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루, 미카, 제리, 은지, 미스터 코너, 아몬드 봉봉 이렇게 여섯 생명체는 카르텔로부터 수십 광년 떨어진 제우스 행성을 향해 출발했다. 코너가 개발한 코타나 시공간 이동 기술이 적용된 우주선이었기에 슬리피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가는 동안 해루는 은지, 제리와 함께 우주선 내부를 헤엄쳐 다니며 놀았고, 미카는 미스터 코너 씨와 함께 제우스 행성에서의 일정을 논의했다. 아몬드 봉봉은 카르텔에서 쇼핑한 물건들을 정리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일정 논의를 끝낸 미카가 코너 씨에게 말했다.
“어휴, 에크하르튼지 뭔지 하는 그 사람들을 찾으면 지구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점점 더 멀어지네요.”
“걱정하지 마, 슬리피만 잡으면 지구로 가는 건 걱정 안 해도 돼.”
“정말요?”
“코타나 사냥꾼 슬리피의 우주선에는 코타나 연구소에서 개발한 시공간 이동 기술이 적용되어 있지. 집으로 돌아가는 건 순식간일걸?”
“근데 그건 이 우주선에도 적용된 기술 아닌가요?”
“이건 흉내만 낸 거야. 제대로 성능을 내려면 정제 코타나를 쓸 수 있어야 해.”
“그럼 그것만 있으면 한방에 지구로?”
“당연하지!”
“와! 여기 와서 들어본 이야기 중 제일 기분 좋은 이야기네요!”
“뭐, 슬리피 녀석에게 걸린 현상금을 받으면 지구 같은데는 가고 싶지도 않겠지만 말이야.”
“현상금 따위 안 받아도 되니까 제발 집에 갔으면 좋겠어요.”
제우스 행성에 거의 도착할 무렵 우주선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모든 동력이 차단되었다. 빛을 잃은 채 둥둥 떠 있는 그 우주선 위로 20배는 더 큰 또 다른 거대한 우주선이 나타나 강제 도킹을 시도했다.
그때, 은지의 눈빛이 회색빛으로 물들었고 갑자기 제리를 낚아채 비상탈출구로 내달렸다. 깜짝 놀란 해루는 은지를 쫓아가려고 했지만, 몸이 굳어버려 움직이지 않았다. 은지는 순식간에 다른 우주선으로 넘어가 버렸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거대 우주선은 사라졌다.
카르텔에서 출발할 때 은지는 해루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기억이, 그녀를 낳았다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