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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 신고 가까운 곳에서, 골목길이 트렌드입니다.

MZ세대에게는 새로운 경험, X세대에게는 과거의 향수

슬리퍼 신고 가까운 곳에서... ‘슬세권’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해외여행은 어려워졌고, 그렇다고 사람들이 많은 도심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집과 동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요. 이처럼 슬리퍼를 신고 가까운 곳에서 소비활동을 하는 이른바 '슬세권(슬리퍼+세권(勢圈))'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슬세권’으로 떠오른 대표적인 지역은 ‘마용성’으로 불리는 마포구, 용산구, 성동구입니다. 마포구에는 홍대와 연남동이 있고, 용산구에는 이태원과 한남동이, 성동구에는 서울숲과 성수동이 있습니다. ‘마용성’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준(準)강남권이면서 도심 직주근접성이 좋아서 인기가 높은 지역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마용성’은 강남3구 뒤를 이어 집값이 가장 많이 오른 지역이 되기도 했습니다.


골목길 트렌드는 코로나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홍대를 중심으로 삼청동, 신사동, 이태원으로 골목길 문화가 확산되었는데요. 이때만해도 트렌드라기보다는 일부 사람들이 향유하는 장소였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부활하기 시작한 골목길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등에 업고 하나의 트렌드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MZ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에게 골목길은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고, 부모세대에 해당하는 X세대에게 골목길은 과거로 돌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 빌딩과 아파트단지, 지하철속에서 바쁘게만 살아가는 순간에도 골목길은 존재해왔습니다. 골목길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있었고, 골목길에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개성있는 커피숍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아기자기한 소품을 판매하는 매장도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오래된 식당은 그 자체 맛집이 되기도 했습니다.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있었고, 도시에서 접하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것들 속에서의 오는 편안함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골목길이었던 것입니다.


골목길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활동들

골목길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정부와 지자체를 중심으로 도시재생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 부산 감천문화마을, 전주 한옥마을, 대구 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청주 수암골, 군산 근대화거리 등이 대표적입니다.


종로구 익선동은 종묘, 인사동, 종로, 창덕궁과 북촌에 둘러싸인 곳으로 최근까지도 근대식 한옥이 많이 남아 있던 지역입니다. 한때 재개발 사업으로 한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정부와 지자체 주도로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되면서 한옥 밀집지역으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한옥 밀집지역이라는 명확한 방향성이 제시되자 젊은 창업자들이 익선동에 들어와서 한옥을 개조하여 카페와 공방, 갤러리 등 개성있는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던 분위기의 매장들이 들어서자 유행에 민감한 젊은층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익선동은 그렇게 핫(Hot)하고 힙(Hip)한 곳이 되었습니다.


부산 감천동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던 허름한 달동네였습니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부산사람들도 외면했던 지역이었는데,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마을미술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지금의 감천문화마을로 거듭나게 됩니다. 감천문화마을은 CNN이 ‘아시아에서 가장 예술적인 마을’이라고 소개했을 정도로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물론 감천문화마을은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와 개발로 인한 장소성 훼손 우려도 끊임없이 제기된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에 사하구는 2017년 9월에 감천문화마을 일원 18만 8,177㎡에 대하여 '감천문화마을 보전형 지구 단위계획'을 수립하여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해결해가고 있습니다. 감천문화마을 일대에 프랜차이즈 가맹점 입점을 제한하고, 3층을 초과 건축물과 대규모 개발을 모두 엄격히 규제하여 마을의 특색 있는 경관조명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대구 '김광석 다시그리기길'은 대봉동 방천시장에 있습니다. 방천시장은 도시공동화와 대형마트, 백화점 등으로 상권이 쇠락하면서 규모가 작은 시장에 불과했고, 상권이 침체되면서 유동인구도 많지 않아 슬럼화된 지역중 하나였습니다. 변화의 계기는 2010년에 침체된 전통시장을 지역 문화공간이나 관광지로 활성화하기 위해 시행한 ‘문전성시 프로젝트’입니다. 가수 김광석이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초로 '김광석 다시그리기길'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인데요. 통영 동피랑마을을 포함하여 전국에 많은 벽화골목이 생겨나고 거리조성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콘텐츠가 점점 더 풍성히 채워지는 있는 사례는 '김광석 다시그리기길'이 유일합니다.


MZ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골목길

다시 홍대, 한남동, 이태원, 성수동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들 지역은 강남처럼 높은 빌딩들은 없지만, 거주하는 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여가와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홍대, 한남동, 이태원, 성수동은 고도제한 지역으로 묶여서 개발이 더디었던 지역입니다. 지형과 역사·문화적 가치가 담긴 건축물 등을 보존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고도제한 규제가 오늘의 홍대, 한남동, 이태원, 성수동을 있게 한 것입니다.


홍대(연남동), 한남동, 이태원, 성수동에 산다는 것은 일종의 힙(hip)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파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파리지앵’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성수동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성수지앵’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성수지앵’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구길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구분이 됩니다. 구(舊)길이 어디인지. 그렇다면 신길도 있을까. 여기에 답할 수 있으면 성수지앵이 확실한 것입니다.


골목길이 뜨는 이유는 개성과 다양성, 삶의 질,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모여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된 것도 이유이기도 합니다. 답답한 대도시를 벗어나서 지역에서도 나의 삶을 만들어갈 수 있고, 원격으로 도시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꼭 도시에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옛것의 향수가 있는 골목길은 차로 이동하기 어렵기 때문에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골목길은 놀고, 먹고, 즐길 수 있는 트렌드가 된 것입니다.


해결해야 할 숙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학술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은 쇠퇴한 지역이 여러 가지 원인으로 부유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인구학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종로구 익선동의 사례처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자,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사람들이 유입되었고, 상권이 활성화되자 대형 프렌차이즈 매장이 들어서는 것과 같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나이를 먹어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이 상권도 유행을 타기 마련이며 자연스럽게 성장과 쇠퇴를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본래 거주하던 사람들이 외부인이 유입되면서 어쩔 수 없이 밀려나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면서 단순히 막아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물론 도시재생과정에서 누군가가 부당하게 이익을 취한다거나, 사회적 약자가 길거리로 내몰리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기존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열린마음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하고, 새롭게 유입된 사람들은 기존 거주민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서로간에 갈등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단순히 외부요인에 의하여 지나치게 속도를 높일 경우 사회적으로 큰 비용을 감수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젠트리피케이션 부작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지역 활성화를 이끌어낸 지역으로 '부산시 영도구 봉래동'을 들 수 있습니다. 


부산시 영도는 신선이 사는 고장으로 불렸을 정도로 우수한 자연환경과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곳입니다. 부산시 중구, 서구, 동구, 영도구로 이루어진 원도심은 과거 부산의 중심이었습니다. 영도구의 북부 대평동, 남항동과 청학동, 봉해동 해안은 부산의 대표적인 공업지대로 일자리가 많은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각종 개발이 해운대, 광안리 등의 서부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영도구는 점차 쇠락하는 지역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지역을 살리고자 다양한 시도들을 해왔었고, 그 일환 중 하나로 진행된 것이 '대통전수방 프로젝트' 입니다. 대통전수방 프로젝트는 '사람과 기술, 그리고 지역을 잇다'라는 취지를 갖고 있습니다. '대통'은 '운수대통'의 크게 통한다는 뜻으로 기술과 역사, 문화자산 등을 미래세대에게 전수하여 청년들이 영도구 지역에서 큰 통로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습니다. 이 사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곳은 영도구 봉래시장에 뿌리를 둔 삼진어묵과 봉래동에서 일해오던 장인들이었습니다.


삼진어묵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일환으로 '삼진이음'이라는 비영리 단체를 설립해 삼진어묵 기업역량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전수방 프로젝트'에서 삼진이음은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전문기술을 전수해주고 창업을 위한 컨설팅까지 도왔습니다. 청년들은 어묵 만드는 기술부터 창업과 매장운영에 이르기까지 약3개월 정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후, 1개월간 봉래동 소재 공실 점포에서 창업 인큐베이팅을 받게 됩니다.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으로된 매장을 열어 창업에 성공하였습니다.


삼진어묵뿐만 아니라 명성양복점, 성실식품(두부), 영신칼스토리(장미칼), 옛날국수 조내기 고구마 등 전통시장에서 오랫동안 함께했던 노포들도 '대통전수방 프로젝트'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칼국수 장인은 칼국수 만드는 기술을, 양복장인의 양복 가공기술 등을 청년들에게 전수하여 청년들의 창업을 도왔습니다.


정부와 지자체도 힘을 도왔습니다. 2017년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뉴딜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2020년까지 국비와 시비 등 182억원이 투입하였습니다. 인프라를 확중하고 하드웨어 시설을 개선하는 한편, 축제형태의 'M마켓'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M마켓은 영도구가 주최하고 대통전수방과 삼진이음에서 주관하는 프리마켓입니다. M마켓을 통해 지역상권의 회복력을 높이고 상인들의 체감도를 향상시켜오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먹거리를 판매하는 한편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해서 소비자들의 참여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대통전수방 프로젝트는 콘텐츠가 명확했고 콘텐츠를 끌고나갈 비즈니스 주체들도 명확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에 소상공인과 전통시장의 참여가 이이지면서 부산의 새로운 명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인기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봉래동에 점차 관광객이 찾아들기 시작했고 지역경제가 살아나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북미나 유럽에서는 슬럼의 인구구조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젠트리피케이션 용어를 사용하는 반면, 국내에서는 사회적약자의 비자발적인 이주문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합의와 대응이 어렵습니다. 새로운 골목길이 뜨게되면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기 마련입니다.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역주도의 적합한 대응수단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골목길이 트렌드입니다. MZ세대와 X세대의 경험적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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