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혜경 Sep 28. 2022

문을 열고

당연한 일이 기쁨이 되는 순간




하얀 선 안으로 들어가야 네모를 닮을 수 있다. 제일 먼저 오른쪽과 왼쪽을 살핀다. 공간에 여유가 없다. 문득 선을 밟아서 죽었던 놀이가 떠올랐다. 핸들을 두 손으로 잡는다. 뒤로 진입하는 일은 언제나 어색하다. 끝까지 긴장해야 한다. '천천히' 외에는 실천할 게 없다. 무사히 선 안에 자리를 잡았다. 시동을 끈다. 구겨진 과자 봉지와 빈 종이컵을 챙긴다. 문을 잠근다. 단단히.


휴게소는 화장실이라는 글씨가 참 크구나, 급한 사람을 구제하려고 여기요 여기, 며 손짓한다. 도착한 사람들이 모조리 그쪽으로 걷는다. 병아리 마냥 졸졸 따라간다. 봉지와 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계단 두 개를 한 번에 오른다. 화장실 문을 밀고 나오는 여자, 손을 탈탈 털며 빨간 스커트에 닦는다. 젖은 손이 허벅지에 닿자 스커트 위에 딸기가 뭉개진 것처럼 빨갛게 물든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손자국, 빛이 곧 삼킬 흔적. 이때의 삼킴을 증발이라고 하나. 빨간 얼룩이 허벅지에서 살랑살랑 멀어진다.


유리문 앞으로 다가간다. 양보하며 천천히. 손잡이를 당길까 밀까 고민했지만 문을 밀고 나오는 아이 때문에 손잡이를 당기는 추임새를 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나의 선택이 타인의 선택에 의해 선택된다는 건 '부득이한' 일이다. 만약 아이가 손잡이를 당기고 나왔다면 바깥에 있던 나는 밀기와 당김 중에서 무조건 밀기를 선택해야 한다. 문을 사이에 둔 누군가와 마주한 상황에서의 선택은 어떤 한 사람에게는 선택의 나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결과를 만든다. 그것을 선택이라고 해야 할지, 선택 후 남은 것에 대한 수용이니 운명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머지 선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두 개의 선택이 같은 힘으로 작용해 마주한 채 벽을 만든다. 누구도 들어갈 수 없고, 누구도 나갈 수 없다. 어느 누구도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다. 문이 문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이 벽으로 둔갑하는 일에 공조하는 꼴이다. 선행된 선택이 뒤따라오는 선택의 피로를 줄여준다는 의미에서 앞선 선택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아이의 선택을 나는 고맙게 받아들인다. 사실 우리 모두는 숨을 쉬듯 이런 일에 익숙하다.






얼마 전 일이다. 진도에 내려온 지 8일째 되는 날 아침, 외출하려고 막 문을 닫았는데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산을 챙기려고 다시 열쇠를 꽂았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낯선 곳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문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바닷가 앞이라 바람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도 무시 못했다. 다음 날 시건장치를 부탁했고 문에 경첩을 달게 되었다. 왜 그렇게 달았는지 모르지만 아래 세로로 부착된 경첩은 바닥에 뚫은 구멍과 맞물리면서 안전을 약속했다. 물론 신경 써야 할 게 하나 있다. 사람이 안에 있을 때는 괜찮지만 외출 시에는 반드시 경첩이 아래로 내려오지 않도록 옆의 홈으로 돌려놔야 한다. 그런데 오늘 그 중요한 걸 깜빡했다. 바보 같이.



원래 이름은 도어 오도시



우산 때문에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안에서 경첩이 구멍과 맞물린 상태. 세상에, 땅끝마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외진 곳이라 사람을 부르기도 어려워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어르신께 부탁드렸더니 서둘러 장비를 챙겨 와 나사를 풀고 온 힘으로 문을 당겼다. 그래도 진전이 없었다. 당연했던 문이 꼼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제 문이 아니다. 단단한 벽이다. 아니 답_답_한.




문을, 아니 벽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스테인리스 재질로 매끄럽게 마감이 되었고 아직 비닐이 벗겨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두드려본다. 쿵쿵, 소리가 차가운 벽을 타고 빠르게 안으로 스며들었다. 손잡이를 돌린다. 벽에 손잡이라니, 이상하잖아. 이번엔 손바닥을 댔더니 금세 체온을 앗아갔다. 굳게 다문 입에 등을 기대어본다.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는 면은 어쩌면 문보다 벽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보세요, 당신!
모습을 잊었나요,
아님 잃었나요?

Photo by Wesley Tingey / Unsplash



문과 벽은 다르다. 문은 오가는 정서를 관할하고 벽은 제자리를 주관한다. 문이 방향성을 수용한다면 벽은 그것들을 제어한다. 얼핏 보면 비슷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른 세상이다. 동일한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다른 시간과 공간을 선호한다. 그동안 문과 벽을 혼동할 때가 많았다. 안에서 누군가 밀어주지 않으면 문 밖에서 당길 줄도 몰랐다. 어쩌다 틈이 보이면 반갑게 발 하나를 들이곤 했다. 닫힌 문을 그저 벽이라 의심했다. 그런가 하면 벽을 문으로 착각할 때도 있었다. 언젠간 열리겠지 상상하며 기다렸다. 그 시간을 가치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될까. 시간이 쌓였다고 납작한 벽이 날 가엽게 여기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조롱하듯 답답하게 굴었다. 착각은 자유, 고통은 의무! 이것이 둘을 혼동한 자에게 닥치는 불행의 엄벌이다. 멀쩡한 벽이 갑자기 문이 리가 없지 않나. 문이 벽이 되지 않는 것처럼. 문은 문이고, 벽은 벽이다. 우긴다고 둘의 자리가 바뀌진 않는다. 





팡,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쇠막대기를 넣고 지렛대를 움직이듯 벌렸더니 경첩이 뜯어졌다. 서둘러 빛이 안으로 들어갔다. 놀란 공기가 밖으로 달아났다. 이제 제자리를 찾았다. 문이 문으로 돌아왔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다리다. 침묵에서 대화로 이동하는 통로다. 그래서 안에서 문을 밀고 나오는 아이를 밀치지 않기 위해 나머지 선택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 누군가의 선택이 멋진 문을 남길 수 있도록 나머지 선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닫힐지도 모른다. 벽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Photo by Philipp Berndt / Unsplash

나는 다시 문을 닫는다. 아주 살며시.




매거진의 이전글 파티가 끝난 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