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교차.
내 이름에는 바다란 의미가 있다. 한 없이 거대하며 또한 복잡한 그것의 이치를 헤아리기 힘든 것처럼 나 역시 스스로에 대해 의문, 공허함, 때로는 회의를 가졌다. 분명 그것은 나의 깊은 뿌리이자 용기이며, 자존이고 영감이나, 그럼에도 족쇄였다. 허나 ‘불리어질 이름’이라는 것을 가진 주체가 그 누구더라도, 그는 삶에서 무수히 되새김질 될 것이다. 최초로 나의 이름을 꺼낸 것은 내 조부나 부모였을지 모르나, 앞으로 다시는 누구도 진짜 나를 찾을 수 없을 거야.
무수히 스쳐간다. 지나 보내고 있다. 내가 앞으로 가고 있다고 하지만 모두가 가는 제 각자의 길에 방향을 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로지, 지금 차가 달리고 있는 도로에서 우측으로 떨어진 저 바다만이 그런 것에서 자유로운 듯 했다. 해안에 널브러진 과자조각을 줍는 저 흰 갈매기조차 무엇을 향하고 있는 듯 하니 말이다. 잠시 그 내음의 선을 따라 거닐며 생각에 잠겨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당분간은 나를 둘러쌓고 있는 보이지 않는 테두리에서 도망가지도, 그 실체조차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그렇겠지.
“어디 보고 있냐? 이제 이 길을 따라 계속가다 도착해서 보이는 데가, 앞으로 네가 있을 곳이다. 환영한다, 마플”
그가 이제 날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었다. 다만 문장의 어감이 거슬렸다. ‘앞으로 도착해 있을 그곳’은 내 미래이면서 또한 흘러갈 현재이다. 그 끝이라는 것은 종착지에 계속 나를 옭아매기 위한 의미로 사용한 것임은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의 현재는 그 미래에 아무 의미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기에 몹시 언짢았다. 나는 이내 그 ‘앞으로’라는 곳을 향해 숨을 크게 들이켰고, 끝내주게 나는 감칠맛은 오히려 날 괴롭게 했다. 그리고 곧, 밖에서 가져온 묵고 역겨운 냄새를 토했다.
<1>
“리벨, 지금 몇 시지? 이 작업을 오늘 안으로 끝낼 수나 있을까?”
“정신 차려. 막 점심을 먹고 오후 일을 시작했을 뿐이야”
그렇게는 말하면서 나는 삽을 조용히 올려놓고 발을 빼 빠져나왔다. 굳이 말과 행동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레 다른 이들처럼 멀뚱히 삽을 땅에 집고 옆에 서서 힘든 티를 내면 되니까. 웃기게도 스스로는 남이 나 자신에게 가질 이미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본인의 안정과 여유 앞에선 그것이 그저 허풍이라 생각하였다. 이런 것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어떤 것이든 한도 끝도 없이 파고들어 봤자 의미는 가벼워지고 가치는 찾을 수 없게 될 뿐이다. 그 즈음되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족쇄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이니 뭐든 적당이가 좋다.
“저기, 리벨? 아니, 마플? 거기 그 삽을 지금 안 쓸 거면 잠시 줄래?”
당연히 아는 목소리였다. 다만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 ‘그’였기 때문에 고개만 말없이 흘깃 돌리고 손에 쥔 것을 건넸다. 그 역시 별말 없이 과묵했고, 나를 부른 게 ‘진짜’ 내 이름이든 아니든 그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항상 한 해의 이맘 때 즈음에는 태풍이 수차례 찾아오는 것이니 그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이번 경우에는 좀 재수가 없었다. 다음 달에 신입을 받을 ‘가치 확인의 발견’을 위해 여름까지 방치하였던 무너진 벽과 울타리 보수 공사를 계획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기 위해 운동장 귀퉁이에 쌓아둔 자제와 흙들이 간밤의 큰 비와 만나면서 시작됐다. 밤새 쓸려간 흙이 배수로를 몽땅 막아 이곳, 저곳에서 물이 넘치기 시작하고 설상가상으로 강풍으로 큰 나무까지 여럿 꺾여 오전 새벽부터 대 작업이었다. 모두 웃통을 벗어 던지고 한 손에 삽을 들며 흙을 퍼내겠다고 기어들어갔지만 방대한 양과, 부족한 인원, 젖은 흙의 무게로 작업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작정 퍼낸 흙을 다시 어쩔 지도 문제였다. 결국 오후 무렵에 외부 인력의 중장비까지 도입 돼 다시 시작되었지만 냄새와 무더위로 작업능률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러한 차, 누가 뭐라도 하지 않는데 자기 발로 다시 들어간 저 녀석은 이곳의 생활에 꽤 성실히 적응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 어디까지나 그와 나눴던 대화를 배제한다는 전제에서 말이야. 그와 나는 아직까지도 동행선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달 중순 즈음이었다. 딱히 특별하다 할 이유도 없이 어느 때처럼 하루 작업을 마무리하고 화장실에서 손과 목, 얼굴을 씻으며 작업화를 간단히 닦아내고 있었다. 화장실에선 내 뒤로 거울에 비친 어느 누군가가 지나간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아는 체나 인사를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소에는 소리 지르고 이래저래 귀찮게 구는 그들이지만 여기 이 공간에서 만큼은 딱히 건들지 않으니까. 그들이 가진 공간의 영향력이 작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간이 가진 자유가 어느 정도 존중받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 얼굴에 묻은 검댕 자국을 지우는 거에만 집중하고 있을 터였다. ‘그’가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는.
“나 너 알아. 아니 널 알 것 같아. 음 맨 날 서쪽 현관으로 다니지?”
“......”
가만 보자, 누구였더라.
“그리고 음...”
“그건 작업을 위해 집합하는 곳이 의례적으로 그곳이기 때문이고, 누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 쪽으로 다녀. 그리고 그 정도라면 나도 너에 대해서 몇 가지 안다고 말 할 수 있어”
“아무렴? 나는 네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었다고.”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어색함인가 아니면 괴리감인가. 그와 나 사이에 처음으로 주고받은 대화에서는 무언가 우리 사이에 막이 쳐진 인상을 받았다.
“네가 지내는 방이 이 건물을 기준으로 할 때 내가 있는 방과 정반대 쪽인 서쪽에 있다는 것, 분명 그 쪽에도 화장실이 있을 텐데 네가 굳이 이곳에 왔다는 것까지”
“뭐 틀리진 않네. 다만 하나 지적을 하자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이쪽으로 온 게 아니야. 네가 있는 동쪽은 산 방향으로 뚫려 있어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거든, 이 건물을 설계한 멍청한 놈들은 왜 전체적으로 산을 등지게 짓지 않았나 모르겠어. 덕분에 저 쪽은 다들 몸을 씻어내느라 언제나 만원이거든. 냄새나는 놈들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딱 질색이야. 하여튼 반가워. 저기, 음. 그래, 마플?”
이때부터 그가 나를 뭐라고 부르든 귀찮아서 대꾸하지 않게 됐다. 혹시 그가 진신을 알아, 내게 생길 번거로움도 생각해 봤지만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적어도 이때에는
“저기 ‘서쪽’씨? 여기 오기 전에는 뭘 했어?”
“나는 대학생이었어. 경영을 전공으로 하고 있었지. 그러는 ‘동쪽’씨는?”
“내 질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야. 이런 질문을 여기서 한 번도 안 받아 봤어? 그러니까, 어쩌다가 여기에 들어 왔냐는 거야. 네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
“마치 그 이유란 것이 나의 죄목인 듯 말하는군. 너도 다른 이들처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응당히 이곳에 가둬졌다고 생각해? 날 그렇게 착각하지는 말아.”
이해의 혼선이나 오류는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또한 누구에게나 상대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이란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인간은 대게 주위에 민폐를 끼치고 말 부류이다.
“뭐, 그래서 일단 들어봅시다.”
“아주 멋진 물건을 손에 넣게 됐는데, 그것을 내 다음 주자에게 넘겨야만 했었지. 하지만 온전히 내가 가진 것을 그냥 그대로 줄 수 없었기에 바꿔치기 한 다음 넘겼어. 흐흐흐. 그것은 대단히 배반적인 일이었지.”
“덕분에 너의 말대로 응당히 이곳에 가둬진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다른 주위의 모든 것들로부터 통제 받고 있지. 그래도 아쉽게 됐어. 그리 대단한 물건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사실 네게 거짓말을 했어”
“뭐?”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이 화장실로 온 것이 맞아. 네가 이곳에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거든”
들어오는 것을 봤다는 말인가. 누구에게 나를 물어봤다는 뜻인가. 어느 쪽이든 얘기를 들어봐야 알겠군. 귀찮은 놈한테 걸렸어.
“네게서 처음부터 좀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어. 다만 목적이라고 할 정도인지는 들어봐야 알겠군. 그래서 내게 무슨 볼일이지?”
“너와 단 둘이 얘기를 하고 싶어. 가능하면 간섭을 받지 않고”
“네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곳에서 아무 다른 누군가로부터 은밀히 떨어져 뭘 할 수는 없어. 너도 알 텐데?”
“정확히는 독립적인 공간과 시간의 영역이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지. 완전히 제로는 아냐. 무언가 틈이란 것은 항상 조금이나마 벌어져 있는 법이니까. 실제로 네가 어떤 상황에 있었던 간에 때가 맞춰지면 네게 접근 했을 거야.”
“말은 그럴 듯하지만 결국은 현실적인 감각이 떨어진다는 말이지. 특히 아까부터 네가 하는 이해할 듯 말 듯 한 아리송한 말투부터 말이야. 그래서 네 말대로 은밀히, 그것도 처음에 거짓말하며 감추면서까지 하려는 얘기가 뭐지?”
“그 대단한 물건, 지금 내게 있어. 그리고 네게는 부탁이 있고 말이야”
방금 내가 들은 말이 정확히 무엇이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든, 그래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놈은 지극히 위험한 부류의 인간이다. 이곳에서는 가까이하면 안 되고 엮여서도 안 되는 놈이야. 언젠가 스스로의 영역을 확장하고 결국 이쪽 세계와의 균형을 무너뜨리려는 거지.
“그리 시작부터 정색하면서 받아들이면 말도 잇기 전에 내가 무안해지잖아. 어이! 이봐?”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면서 흥분한 내 얼굴을 보고 그는 실눈을 뜨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뒤돌아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무엇을 덮어 지우려 하거든 명심해둬. 새로 싹 칠하고 자신을 다시 만들었다고 해도 그 토대에는 나를 뺄 수가 없어. 애초에 네가 나와 대면했다는 시점에서 무의미한 것일 테지만.”
“뭔 헛소리야!”
아까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난 이 놈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다. 분명 접점이 있다. 그런데 녀석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뭐든 떠올려 보려하면 뭔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새하얘지는 것 같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봤을 땐 녀석은 이미 여기에 없었다. 화장실 밖으로 재빠르게 쫓아 나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날 저녁,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2>
이곳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무언가를 피워내고 공간을 형성해도 제제를 받지 않는 곳, 하지만 동시에 어느 위치에서든 눈에 잘 들어오고 해가 진 뒤에도 불이 들어와 그 아래로 훤했다.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셋이서 모여 조용히 가슴에서 빛을 밝히고 연기로 자신을 감쌌다. 허나 스스로를 숨기기 위해서기보다는 그 반대에 가깝다. 욕을 한껏 지껄이다 맨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가장 막내 토스였다.
“뭔 일을 이리도 매일 부린 답니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것 아니오?”
“어쩔 수 있냐. 여기는 그런 곳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상식을 버려. 그리고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 그게 빨리 적응하는 방법이야”
“그게 말처럼 쉽답니까? 이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오. 저들이 지껄이는 말들과 선전이 사실상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억지가 아닙니까? 그들이 말하는 가치는 저 밖에서 만들었다지만, 실제로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저 밖에서 말하는 세계랑 다르단 말이오. 정말로 우스운 것은 저들이 힘의 불균형은 어떻게든 우리도 납득하리라 믿으면서도, 가치가 모두에게 납득되지 않고 통용되지 않으리란 것은 정작 방관하고 있다는 것이오. 내 말이 틀리지 않잖소?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래봤자 네가 선택할 수 건...”
그때 저만치 떨어져서 오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지금 무엇이 잘 못됐다거나 혹시 우리 얘기가 어떻게 세나갔는지 생각했다. 그만큼 당당히 혼자서 다니는 인물이 다가오는 것은 이곳에선 자연스레 경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몇 보 사이에 나는 그것이 ‘그’임을 알았다.
“왜 말을 하다 끊으시오? 잘 얘기하다 한 눈이나 팔고 말이야. 대체 누가 있는데 그러시오?”
“있어라. 잠시 다녀오마. 늦어지면 먼저 방에 들어가고”
저 녀석은 언짢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연덕스럽게 손을 올리고, 씩 웃어보였다. 그러곤 낮에 사라졌던 것과 똑같이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웃기게도 멀어질까봐 쫓아가서 앞에서 막아서기까지 한 것은 나였다.
“이봐. 멈춰 봐. 나한테 용건이 있어서 왔던 거 아니야?”
“좀 걸을까? 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할 때 혼자서 빙빙 도는 버릇이 있거든. 자!, 막지 말고 앞으로 가.”
“뭐?”
그는 나를 앞으로 밀었다. 나는 한 번씩 그를 뒤돌아보며 걷기 시작했고, 그는 결코 내 옆에 서있지 않고 언제나 동행선 상에 서서 나를 뒤쫓아 왔다.
“낮에 한 건 무슨 말이야?”
“들은 그대로야. 네게 부탁이 있다는 말이지”
“그것 말고도 네가 훔친 그것이 아직도 갖고 있다고 했잖아!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건지 몰라도 혹시 그게 위험한 일이라면 나는...”
“낮에 내가 대학생이었던 거 얘기했던가? 그럼 혹시 왜 내가 전공으로 경영을 선택했는지도 알아?”
“네 개인적인 부분까지 전부 다 내가 알 필요는 없잖아”
“난 어릴 때부터 가치를 매기는 것을 좋아했어. 무엇을 함부로 평가하여 대가로서 결정짓는 것. 어쩌면 최소한의 정당한 양심이었을지도 모르고, 한낱 오만한 저울질이었을 수도 있지.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에 대해 현실감각이 자랄수록, 그 생각은 더 다듬어지고 정교해졌어. 오히려 자신감과 자기애만 늘었지”
“그래서. 그게 이제 네가 할 말이랑 무슨 연관이 있지?”
“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가치란 것에 대해 알고 싶었지. 결국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다가가며, 또 만들어지는지를 알게 되었어. 하지만..”
“하지만?”
“누군가는 남이 원하는 필요를 찾아 만족시키려 하고, 또 다른 이는 자신이 팔고 싶은 가치를 만들어 그것이 남의 가치가 되게 만들어. 둘 중 어느 쪽이든 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야.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 한 거야. 자신의 것, 자신의 생각이 다 옳다고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힘의 원천이자 자신감의 토대이기 때문이지.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의문이랑 회의감이 찾아왔어.”
얘기가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곳에서 둘이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태로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는 오해라도 받았다간 피곤한 일이 꼬이고 만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이유가 있다. 의미가 있다. 가치가 있다고 떠드는 자들은 많아도 정말로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일부로라도 겉으로 드러내려는 사람은 좀 체 없어. 분석과 전략을 위해 문제점을 찾기는 하지. 하지만 그것은 가치의 발견이 아니야. 비가치가 가치로 입증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더 나아가 아무리 오지랖이 뛰어나도 그런 일에 일부로라도 확인을 하고 투자를 하는 이들은 더 드물어.”
“네 말대로, 모든 인간의 내면세계에는 가치와 비가치가 공존해. 모든 이들이 그 경계를 명확히 알지는 못할지라도 두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항상 자각하고 있지. 비가치의 입증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대부분의 인간이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 이유는, 우선 그것이 스스로의 가치에 반하고 자신을 토대로 하고 있는 정체성과 자존에 반하는 일을 동반하기 때문일 테고 말이야.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의 중점이 뭐지?”
“그래서 내가 이곳에 온 뒤로 고민을 좀 했어. 그 입증, 내가 해보려고”
“...내가 널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이것은 완전히 역설이 아냐. 네 말을 빌리자면 이 입증 자체에 내가 주목 할 만 한 가치가 있는 거지. 더군다나..”
“아니, 너는 착각을 하고 있어. 이곳에 네가 와서 느끼는 가치의 경중이 네게 혼란을 주고 있는 것뿐이야. 정말 본질적인 부분이란 그런 것이 아니야.”
“...어째서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삶의 순간에서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긴 나와 마찬가지로 네가 있던 과거의 길이 있어.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있을 미래도 있지. 모든 것은 여기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어!”
“지배라는 말을 함부로 오용하지 마. 왜 그렇게 가치를 매기고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지금 네가 있는 통제사회와 저기 밖의 사회가 괴리감이 느껴질 거라는 것은 나도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그렇기에..”
“그렇기에! 더욱 더 그것은 착각이 아니야. 너와 내가 여기에 있으면서 느끼는 두려움, 고통을 유발하는 공포와 폭력은 실재하는 것이야. 네 모든 감각으로 느낄 수 있을 테지. 어째서 넌 그것을 외면하는 거지? 아니 외면할 수 있지?”
“외면이 아니야. 난 인정한 것이야.”
“인정이라고?”
“그래. 난 이곳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어. 너의 그 목적의식 아래 저항적 생각도 그것이 이곳에 적응하는 과정 중의 반작용 중 하나라는 것을 언젠가 깨닫게 될 거야. 비교를 통해 자신에게 찾아오는 박탈감은 늘 인간을 괴롭게 하지. 하지만 그런 식으론 언제라도 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어. 분명 네 말대로 비가치를 표면에 드러나게 입증하는 것은 비가치를 가치로 입증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야. 하지만 이곳에선 너도 네 자신만의 가치를 찾을 수 있어.”
“네가 어떤 식으로 설교를 해도 감각이란 쉬이 바뀌는 것이 아니야. 착각하지 마. ‘넓게, 일반적으로, 본질적으로 같다’는 모두 스스로의 날카로움을 잃게 만들 테지. 너는 낮에 내게 이곳에서 현실감각이 부족하다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 오히려 안일하게 충돌이 무서워 스스로의 현실감각과 세심함을 깎아 내린 것은 네 쪽 아닌가? 일시적으로 몰입해 만들어낸 자아만족으로 너를 조이는 족쇄가 진짜로 풀렸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한낱 공상주의자 일 뿐이야”
“...그것이 너와 나를 분리시키는 차이는 바로 그 부분이겠지. 어디, 어느 시간에 있든 편하게 통용되던 일상이 어느 순간에 내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어. 스스로를 가두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네게는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거야.”
“그래... 출발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분명 너는 나와 다른 사람이야”
“구체적으로 넌 무엇을 입증하고 싶지?”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니야? 만약 이곳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고 믿는 자가, 그것을 입증을 해내고 싶다면 다음으로 하려고 하는 일이 뭘까?”
“...넌 지금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아. 네가 하려는 것은 어쩌면 저 밖의 사회라는 공간의 삶도 파괴할 수도 있어.”
“충고 고마워. 정말로 나랑 다른 자아가 뚜렷해. 나 스스로가 무서워서 치가 떨릴 정도로. 허나 그렇기에 앞으로 그것을 명확히 자각하게 되겠지”
“다시 말하자면 네가 하는 말은 한 번씩 이해하기 힘들어. 그거 알아? 너랑 이러고 있지만 사실 머리가 계속 지끈거리고 뇌가 새하얘지는 느낌을 받아.”
“그런 소리라면 나도 할 수 있어. 요새 몸의 여러 군데군데가 얼얼하고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거든. 어이구. 여긴가?”
그는 그러면서 손바닥으로 자기 귀를 몇 번이고 후려갈기는가 하면, 주먹으로 자기 입을 피가 튀도록 세게 치고, 괴상하리라 만치 자기 무릎을 격하게 때려댔다.
“이봐! 그만해. 괜찮아? 뭐 그리 심하게 해?”
“휴, 이젠 나도 스스로를 모르게 돼버렸는데 어쩌겠나.”
“...이제 시간이 정말로 없거든. 아마 들어주지 않을 테지만 원래 내게 부탁하려던 용건. 그것만 빨리 말해.”
“내가 앞으로 입증하려 할 것이지만, 아쉽게도 그 확인은 나의 몫이 아닌 것 같아. 지금의 널 보면 말이야 . 그래서 그 역할을 네가 해줬으면 해”
“네가 벌일 일을 스스로 가늠할 수 없다? 끝가지 알 수 없는 놈이군.”
“‘알 수 없다’라. 좋은 표현이군. 음, 네 말대로 저 쪽에서 여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네. 자칫 내가 뭘 하기도 전에 성하지도 못한 꼴이 되어서는 안 되지. 그럼 그만 돌아가자.”
“그래. 혹시 이 얘기를 다른 누군가에게도 한 적이 있나?”
“흥, 위험 부담을 늘릴 일은 안 해. 아, 혹시 내 보물에 대해 궁금하면 나를 찾아와도 돼”
“글쎄, 혹시 정말로 흥미가 있다면 찾게 되겠지.”
우리는 그렇게 중앙 현관을 통과해 그 기준으로 갈라졌다. 물론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아주 작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왜 하필 나였냐고 물어보지 않았군.”
<3>
유발할 동기가 없어든, 다른 집중할 게 있었든, 마치 보이지 않게 잘 숨겨둔 양 그와 관련된 것은 어떠한 것도 당분간 내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는 더위가 좀 꺾인 듯하네.”
“꺾이다 못해, 이제는 잘 때 좀 춥소. 차라리 예전이 낫지 않소?”
“예전? 예전...”
“흐흐, 배가 부른 거죠. 조금이라도 더 편해보려고나 생각하고, 어찌 보면 바깥에선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일 텐데 하고 말이오. 이게 참 적응이 될 것 같으면서도 어렵소. 그 새로운 상식이란 거, 쉬운 일이 아니오.”
“예전이 생각이 잘 안나. 아니 정확히는 그게 나였는지.. 너 뭐라고 했지?”
“요즘 어디 아프오? 흠, 저번에도 좀 이상하긴 하더니. 자꾸 바깥하고 비교하게 돼서 적응이 말처럼 쉽지 않다고 했소. 아니, 이 조차 적응의 과정일 수도.”
내가 생활하는 방에서 내 바로 옆자리를 쓰는 토스라는 이 녀석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쉴 새 없이 떠들어 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러 그와 하는 얘기를 즐긴다. 편하게 던지는 말을 통해 내가 보지 못했던 이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그의 말투는 묘하게 흥미를 불러온다.
“누구나 삶에서 더 높은 가치를 선호하며 전과 비교해서 그것을 상실했을 때에는 박탈감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폭력과의 충돌이며 어떻게 말하면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배반이라고 할 수도 있지. 결국 나라는 삶에서 쭉 이어져 온 길 위에서 발생한 사건은 피할 수 없으니까.”
“뭐 본질적으로 접근한다면 나도 별로 할 말은 없을 것 같소. 그렇게 이해한다면 내가 느끼는 피해와 비상식의 위화감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 위안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하지만 이것을 리벨이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군. 과연 사회 전반의 평과와 가치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겠소? 단지 우리를 둘러쌓고 있다는 사회가 아니오. 나란 일부분을 포함하는 세계란 의미에서 사회요.”
“못하겠지.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객관화 할 수 있다고 해도 스스로를 완전히 별개인양 때낼 수 없어. 이미 그 자체로 모순이고 배반이기 때문이지.”
“마치 배반이 어쩔 수 없는 숙명인 양 얘기 되었지만 사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 생각하오. 그렇게라도 안하면 난 도저히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테니. 리벨 말대로 본질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곳은 사회에서 보자면 ‘희귀’요. 그리고 확장시켜 본다면 그 희귀란 것은 사회어디에나 존재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고. 결국 확률적인 문제이지만 말이오.”
“가치가 어느 선까지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정말 미묘한 질문이지.”
“마치 여기 오기 전 들었던 그런 말처럼 그렇소.”
『듣거라. 망각이란 자신의 인생이 가진 동일선상의 뿌리에, 줄기에 위배된 새로운 가치를 만들려고 함이다. 그건 전반의 상식에 그릇되며 네가 사회에서도 똑같이 못된 여지를 조장할 수 있음을 인지하여, 너의 그릇된 일탈과 어긋남을 다시 과거에 반추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 따라서 부적합이 견지된 너는 새로운 증명 이전에 너의 과거로부터 박탈시키도록 정한다.』
“하던 얘기와는 상관없는 거지만 말이오. 그 저번에 비 오고 다음날 대 작업 끝내고 다 같이 모여서 피워댈 때 있잖소. 그 때 누굴 만나러 간 거요? 이곳에서 리벨이 딱히 친구를 만드는 것은 본적이 없는데. 뚫어져라 보고 있기에 놀랐소. 혹시 ‘윗적’한테 그때 찍히기라도 한 거요?”
윗적이란 함은 이곳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지시하는 간부들을 싸잡아 이르는 말로, 필요성이라는 말을 숨기고 우리의 안위와 가치를 위한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다. 실제 이곳에서 늘 상 떠들어대는 우리의 가치관에 반하는 배반자들과 적들을 향한 분노를 명예라는 이름으로 교화하고, 우리의 반작용과 희생은 아름다움으로 덮여져 부조리, 비합리성, 불필요 등이 묵인되고 있다.
“설마 그때 우리를 있던 게.. 어이쿠!”
“별일 아니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까 호들갑 떨지 마. 네가 잘 적응하고 있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아. 윗적이라고 하니까 생각 난건데 저기 마주보고 있는 방 쓰는 트레이스란 놈 있잖소. 그 놈은 진짜 끄나풀 아니오? 뭐 만하면 저들이 하는 말에 동조하고, 어찌 보면 우린 모두 같은 편인데 말이오. 위에 관한 욕이라도 나오기만 하면 눈 시퍼렇게 뒤집어쓰고 씩씩대니 원.. 처음에 난 그 놈이 귀신인 줄 알았소.”
“그래 봤자. 인간이다. 너도 처음엔 저런 녀석을 보고 신기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엔 알게 될 거다. 여기에 알게 모르게 많다. 귀신에 씌인 놈”
“가끔 보면 옆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얘기도 하시오?”
“그러냐? 그것 참 편하구나. 오히려 네가 안 받아치니까 서로 번거로움도 덜하니 어찌 나쁜 것만은 아니군.”
“그래봤자 인간이란 말은 참 맞는 얘기 같소. 결국 제 길로 찾아간다는 것일 테니. 리벨은 앞으로 이곳에서 어떨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이냐?”
“뭐 특별히 크게 변하거나 달라진다는 말은 아닌데, 그래도 시간이 흐르잖소. 시간이 간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그것은 또 이전과는 다른 길을 본다는 말이오. 비록 그게 동행선 상의 길이라도 리벨의 모습은 이전과 같을 수 없소”
“재미있군. 분명 나는 앞으로 달라질 것이고, 보이는 세계 또한 변할 것이야”
“바로 그렇소.”
“그러나 네 말처럼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나처럼 변화를 싫어하는 인간이.”
평소에 잘 웃지도 않는 토스가 이때는 몸까지 못 가누며 바닥을 쳤다.
“리벨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진짜 웃긴 거 아시오?”
때로는 아니라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감정이 있다.
“허허, 화내지 마시오. 내가 확실히 말하건 데, 리벨은 내가 처음 봤을 때보다 꽤 변했소. 이건 순전히 나만 느끼는 게 아닐 테니 확실하오.”
“..뭐 그렇다고 하자. 나의 어디가 그렇게 변했다는 건데?”
“음, 이런 말하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나와 같은 느낌이었소. 이곳에 와서 알레르기를 겪는 인물 같았지. 그 뒤 시간이 흘러 금세 뿌리를 내리고 새로이 이곳에서 탈바꿈하였소. 헌데 지금은 또 달라졌소. 뭔가 사람은 분명히 여기 있는데 붕 떠다니는 느낌이오. 이곳에서 리벨의 공간이 줄어든 느낌이오. 아마 그 이유는 단순히 리벨이라는 개인이 가진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었다는 말인가. 허허”
“그래도 리벨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한 리벨일 뿐이오.”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까 하다가 그저 눈만 조용히 감았다.
<4>
거닐다. 거닐다. 거닐었다. 반대편 끝이 나올 때가지가 아니다. 단지 내 앞에 주어진 길을 가로질러 가듯이. 내 눈에 비치는 형상은, 내가 앞으로 옮길 길 위에 보이는 심상들은 전부다 미래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미래로 이어질 듯 아직 따라오고 있는 과거일 뿐. 그렇다. 지극히 복잡하고 커다란 물살의 아주 소극적인 수용자이자 반응자일 뿐인 나는 그 앞의 흐름은커녕, 지금 여기 서있는 스스로도 가늠하지 못한다. 사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선의 간격은 티끌같이 의미가 없는 것. 그럼 나는, 나라는 존재는 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과거, 아니 과거란 이름의 새로운 미래...
“왔어?”
어느덧 눈에 들어온 것은 2층 복도 끝 창문 밖의 풍경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였다.
“뭘 보고 있냐?”
“이곳으로 오기 위해 놓여진 길. 그리고 어쩌면 또 앞으로 펼쳐질 길”
“어두워진 밤에 주황색 가로등이 비춘 길은 감사에 빠질 만큼 낭만적인가?”
“난 늘 저 길을 보고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낮이든 밤이든. 이 주위는 산이 많고 특히나 아름다워. 하지만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러냐.”
그리 말하면 창문틀에 걸터앉았다. 이 일대만 비추기 위해선지 불이 몇 개 들어오지 않아 멀리까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네 말대로. 저 길은 이곳으로 우리가 들어왔던 그 길이지”
“이곳으로 오는 중에 누가 그랬어.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지금 있는 이곳이 이제 내 미래라고. 내가 도달하기 위해 가는 지금의 길은 이제 내 과거로 남을 것이라고 했지. 그런데.. 지금 보고 있는 저 길은 이미 그 때의 길이 아닌 걸”
“이곳에 오게 되면 누구나 듣는 얘기야”
“그래, 어쩌면 과거가 맞는 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더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저것에만 옭매여 속박당하고 있는 걸까?”
“난 네게 저번에 미쳐 못 들은 얘기를 마저 들을까 해서 왔어.”
“그래서 나는 보물을 넘기지 못하고 내가 갖기로 결정했는지도 몰라. 어긋난 길 위에서 그 해답을 찾아 안식을 얻으려고,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그건 지금 어디에 있지? 방에 있는 네 배게 안에 숨겨두었나? 아니면 설마 바보같이 중요한 물건을 사람들이 열어 볼 수 있는 서랍 같은 데 넣어 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지금 네가..”
그는 몸을 돌려 가만히 서서 내 눈을 그대로 응시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내 보물에 집착하지? 저번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결국 그것이 너를 끌어당기던가?
“...난 그저 네가 저번에 내게 한 부탁에 대해 들으러 왔을 뿐이야.”
“더워서 창문 좀 먼저 열게. 해가졌는데도 푹푹 찌는군. 그래, 네게 입증의 확인을 해 달라 했었지. 관찰자이자 그리고 결정자로서 말이야”
“그렇게 구체적으론 얘기하지 않았어. 알기 쉽게 얘기해. 헛소리는 이 이상 집어 치우고. 이미 알겠지만 나는 너에 대해서 그리 호의적이지 않아.”
“난 지금 이미 행동으로 옮기고 있어. 그것은 언젠가 종결을 맞게 되겠지. 내가 비로소 멈추게 되는 그 순간,
그게 정말 내가 바라는 그대로의 나였는지, 그때는 내 앞에서 걷지만 말고 제대로 나를 돌아 봐줄 수 있겠어?”
이해되지 않지만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강한 호소, 그리고 그것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칠흑같이 짙은 어둠, 숨이 막힐 듯 아주 깊은 나락, 그리고 번개같이 스쳐가는 장면들 속의 찰나와 같은 조우.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냥 지켜보라는 건가. 이봐, 난 항상 너를 신경 쓰고 있을 정도로 그리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냐. 나는 나의 일이 있어. 시간이 뒤로 흐르지 않는다면, 네가 어떤 무슨 짓을 저질러서 결국 어떻게 되는가는 언젠가 내가 알게 되겠지. 흥, 재미없어. 난 간다.”
“고마워 들어줘서”
“승낙한다는 말이 아냐. 그냥 신경 쓸 게 없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됐다는 의미인거지.”
“이미 내가 말을 하고 네가 들은 시점에서 사건은 발생 한 거야.”
이때부터일까 더 이상 그에 대해서 불안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를 완전히 이해한 것도 아니면서 무언가 마음이 놓였다. 그와 나의 차이를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를 통해서 나의 다른 무엇을 엿본 것 일까. 그와 그렇게 헤어졌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