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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스러운 곰 Jul 24. 2021

깨진 가면은 뜨지 않는다 2장

다시 한 번 교차.

<5>     


“그래도 이렇게 여유가 있는 것도 소소한 행복이오. 그렇지 않소?”


나무를 등에 받쳐 기대어 한 쪽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녀석 말대로 나쁘지 않은 여유다. 느긋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유도 보이는 만큼 즐길 수 있다. 피할 수도 없고 분명 땀범벅에 마음도 너덜너덜해져 주저앉아 있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야. 피할 수 없으니 시작 전에 이렇게 미리 어떻게 쉴 생각을 해두는 것도 행복이고 어찌 보면 일시적으로 힘의 원천을 창출하는 것 아닌가. 달리 말하면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지나치게 짜증나는 일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곳의 흙은 물이 쉽게 아래로 빠지지 않고 따라서 잘 마르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자주 불필요한 명목으로 큰 차량들이 수시로 외부에서 이곳으로 드나드는데 그 때마다 커다란 바퀴자국의 길이 그대로 남아 나중에 엉망으로 남곤 한다. 요즘엔 새로 다른 흙 등을 섞어 까는 방법도 있다고 하지만 여기서 그런 것까지 투자할리는 없다. 여하튼 흙이 마르고 나면 바닥에 패인 홈을 삽으로 다시 평평히 고르는 일 따윈 비가 자주 오는 기후인 이곳에서는 일상과 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일 월하고의 면담이 있군.”

“저번에 결정됐다고 했었는데 일이 벌써 그렇게 됐소? ...사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나는 그게 리벨이라고 믿지 않았소. 장님이라느니, 귀머거리라느니, 벙어리라니, 그게 사람한테 할 소리요? 대체 그러한 말을 만들어내 저 밖으로 신고해서 일을 여기까지 벌인 놈들이 누구란 말이오? 윗적들과 얘기는 해보셨소?”

“그들 또한 바라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애초에 여기 있는 그 누구도, 한 인간이 가지는 필요의 가치를 따지고 논하기 전에 어느 누군가가 떠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윗적들도 그냥 넘기지 못하는 거야. 자신들의 권한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내부에서 발생해 사회로부터 간섭이 시작되었으니.”

“쉿!.. 뒤에 그놈이오.”

건너 방을 쓴다 해서 서로 아는 체 하는 사이는 아니니 별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가장 앞잡이 노릇을 하는 놈이니 말을 섞기에 앞서 그저 친분을 만들고 싶은 자들도 없을 것이다. 그도 조용히 내 반대편에 기대어 앉았다.

“날씨가 차다. 또 비바람이 불 것 같군. 그만 돌아가자.”

“배고프오. 오늘 저녁은 뭐랍디까?”


우리가 트레이스를 스쳐지나가는 사이에도 놈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민하고 날카로우며 성실한 놈이다. 귀찮은 놈은 어떻게든 엮이게 된다는 것을 이때는 몰랐다.


“오랜만이야 얼굴은 전보다 좋아 보이는군. 리벨, 요즘도 화장실은 잘 가고 있나?”

“월, 나는 그 정도의 일상생활 때문에 당신 만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내가 가야 하는 곳은 이곳 출입 정문을 빠져나와 코앞에 있는 박스 같은 작은 집이다. 저 울타리 안은 원칙적으로 외부의 사회인은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에 결국 내가 간부의 감시 하에 밖에 나갈 수밖에 없다. 아주 조그만 거리의 차이지만 분명 내 눈에 비치는 세계는 바뀌어 있다.


“리벨, 나는 너의 편도 아니고 네가 있는 쪽에 그 놈들의 편도 아니야. 어디까지나 그저 사회의 일부분에 속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진행을 할 거야.”

“그래요. 뜸들이지 말고 얘기해요.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죠?”

“나만으로 모든 증명을 같이 해줄 순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종합된 결과 최종 승인만을 해줄 수 있을 뿐이지. 네 이상증후에 대해서 알아내려면 다시 네가 사회로 나갈 수밖에 없어.”

“근데 어째 당신의 표정이 좋진 않군요?”

“네가 맨 처음 사회에서 부적합 판결을 받고‘가치 확인의 발견’은 치르고 그곳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게 지금 현재 주어져 있는 리벨이란 인물의 가치와 필요는 어떤 의미인지는 굳이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거부하는 등의 회피로 네 근본적 인식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이야.”

“애초에 그 발견이란 것은, 사회에서 박탈당한 한 인간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가치를 대체하는 새로운 다른 가치로 부여하고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과정일 뿐이잖아요. 그리고 그 방법이란 새로 속할 집단에서 도저히 기존의 자신으로는 살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필요와 과업쯤은 받아들인 지 이미 오래란 말입니다.” 

“뭐 좋아. 딱히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그렇게 딱딱한 시선으로는 보지 마. 난 적어도 네가 속한 곳에서 너를 감시하는 그들과는 생각이랑 태도는 많이 다르니까”

“당신이 사회에 발을 담구고 있기 때문에 덕분으로 내가 이렇게 잠시나마 이렇게 바깥 구경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말이야.”

“아직은, 구경이지. 네가 이제 그곳으로 돌아가면 곧 네가 밖에 나와 있는 동안 해야 될 일을 듣게 다음 다시 나오게 될 거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뭐지? 그것 참 왔다갔다 번거롭군.”

“넌 아직 신분은 그쪽 소속이다. 따라서 정식으로 그쪽에서 떠나올 수 없다는 말이지. 그렇기에 지금 내 책임아래 일시적으로 널 다른 곳으로 보내기 전에 확인을 받게 된 거다. 돌아가면 잘 얘기해 줄 거야.”


책임이라니 우습군. 앞으로 그 가증스러운 말로 내가 이제 너의 소유인양 의기양양 자신감을 얻겠지. 내가 이제 이대로 사회의 불순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모르면서 말이야.


“난 당신의 그런 중립적인 모습이 참 좋아요. 월.”

“더 할 말은 없지? 그만 돌아가 봐. 널 감시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놈이 아까부터 눈이 빠지도록 지켜보고 있으니까.”

“한 가지, 당신의 소견은 어떻지? 당신이 앞으로 모든 것을 확인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의 ‘책임’이잖아요.”

“능글스럽긴... 난 네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만 절대로 네가 정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 네가 정상이었다면 이곳에 오면 안 돼. 네 자체에 문제가 있든, 너를 둘러싸고 인식과 가치에 전과 다른 변화가 생겼든, 넌 지금 문제를 안고 온 거야. 말 그대로 문제. 그럼 이제 꺼져”     


<6>     


점심부터 필요한 서류를 확인하고 몇 시간의 교육을 받았다. 내가 지금 신분으로서 지켜야 할 자세에 관한 것인데 사실 어길 시에 내게 닥칠 불이익을 거듭 강조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나에 대한 정보를 재차 확인했다. 혹시 내가 이대로 그들의 통제에 벗어난 행동을 할 것 대비해서 빠른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다. 다만 소장은 의외로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끝나고 방에 돌아갔을 때는 문 앞에 트레이스가 서 있고 안쪽에서는 토스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야 주인공이 오셨군. 어이 리벨, 처음 네게 그러한 얘기가 거론됐을 때 분명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나만큼은 알고 있었지. 겉으로 아닌 척해도, 다른 이들이 갸우뚱 할 때에도 난 널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래, 네 잘난 척은 잘 들었으니까 할 말 끝났으면 사라져주지 그래?”

“네가 무언가에 편승한다고 해서 네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냐. 뛰어서 갈 수 없는 길을 날아서 가려고 한다고 해서 네게 달린 사슬이 끊어질 것 같나? 천만해.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뿐이지. 비로소 스스로에 대해 더 크게 자각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내 말이 틀리나 리벨?”

“있잖아. 너같이 돌려 말하고 비유하길 좋아하는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재수 없고 역겨운지를 알 필요가 있어. 네가 정말로 뭘 안다고 지껄여?”

“난 너에 대해 단순히 악의를 가지고 이러는 것이 아냐. 말했잖아, 난 널 주시하고 있었다고. 난 네가 뭘 꾸미고 있는 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 

“그래? 그럼 어디 떠들어봐. 시답잖은 소리를 해댔다간 날려버릴 테니까”

“뭐? 끝까지 해보겠..”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토스가 달려와 녀석을 덮쳤다. 깔아뭉개고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며 결국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지당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둘은 소동으로 인해 바로 소장 앞에 소환 당했으나 하루 밤에 걸친 경징계와 근신처분을 받고 끝났다. 뒤에 토스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대로 언쟁이 심해지면 앞으로 심사를 앞둔 나로서는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막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안 그래도 언젠가 한 번 혼내주고 싶었는데 이번에 호되게 분풀이 했다고 낄낄 거리면 신나했다. 또한 그럼에도 나 역시 진술서에 빠짐없이 빼곡히 적어 제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때 나는 이곳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대치함으로서 내가 가진 분노와 안도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출발 전에 가족에게 연락을 했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의 가치에 대한 문제로 간부들이 소집된 회의를 가졌고, 이는 새로운 증명의 문제로 회부해야 하기에 잠시 밖에 나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냥 예산컨대 딱히 특별한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항상 스스로를 자신 있게 가늠하기 전에 그건 내 습관이었다. 문제가 없다. 신경 쓸 수준이 아니다. 그렇기에 내게 주어지는 관심과 우려는 이제 불필요하다. 뭐, 그러한 의미였다.   

  

<7>     


“선생, 그러니까 지금 하는 말이..”

“관련 규정에 따르면 지금 계시는 곳에서의 가지는 당신의 가치가 부적합하다는 겁니다.”

“장난치지 마세요. 난 그냥 절차대로 이곳에 이끌려 나온 것이지 얼토당토 안한 소리 지껄이는 걸 듣는 건 예정에 없었어요.”

“진정하세요. 나라고 당신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가져온 서류와 여기 월이라는 당신 담당자의 소견에 따르면 당신의 가치를 재 증명해야 한다는 조항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이봐요. 나는 아무 문제없어요. 지극히 정상으로 지내왔다고요. 그런데 이깟 종이 몇 장으로 나를 평가한다고? 적어도 당신은 그런 것을 결정하고 판단할 권한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걸 함부로 얘기할 수 없다는 겁니다.”

“후.. 잘 들어요. 리벨씨. 뭐, 방금 말하신 대로 난 그런 것을 처리하고 승인하는 그런 자격까진 없어요. 어디까지나 나의 역할은 당신이 가져온 기본 정보와 앞으로 몇 가지 심사를 통해 결과를 종합하여 객관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결론은 제시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분명 앞으로 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난 무수한 사례들을 보아왔단 말입니다. 이건 분명 객관적인 말도 아니지만 절대로 헛소리도 아니에요. 리벨 당신, 완전히 정상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워요.”


이 무슨 병리학자의 내뱉은 말 그 자체가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아니, 이제 그 말 자체도 문제가 될 것이고 그게 앞으로 불러올 풍파가 더 큰 문제였다. 나라는 인간에 새로 기입된 정보, 부여받은 다른 낙인을 통해 내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은 아직까지 내게 없는 상식이었다.


“나는 네 결과가 이렇게 나왔지만 그래도 장래에 네 문제를 생각해서라도 되도록 극복해주었으면 한다. 사랑한다, 아들”


반사회에서 우리를 옭아매는 쇠사슬 중 하나는 어쩌면 우리가 사회에서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안식의 상실이라는 위험이다. 웃기게도 내가 잡힌 약점은 정당성, 명예, 신의란 이름으로 지켜진다면서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의 이들은 그 사슬이 요동치길 바라지 않는다. 소리 나길 바라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이미 귀속에 익숙해져 잡혀 있는 쪽도 마찬가지일 터다. 간만에 속이 매스꺼워 졌다. 그래 박탈감이 다시 한 번 나를 찾아오고 만 거야...


“아아. 난 내게 잠시 찾아온 고요를 영원한 멈춤이라 착각했는가. 그렇다면 나는 또 계속해서 무수히 다른 인간으로 바꿔서 안식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허나 이때에는 이미 그것이 이미 충분할 정도로 부식되고 녹슬어 가고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8>


밖에 잠시 떠나 있는 것만으로 나는 매순간의 이동, 행동의사까지 보고해야만 했다. 하지만 복귀하러 돌아가는 길 중 잠시 바다에 들린 것만은 비밀로 했다. 나는 그 동안 신발 속에 꽁꽁 감쳐두어 빛을 받지 못해 하얘진 발을 담갔다. 내 모든 감각을 열어 이곳을 받아들였다. 천천히 발을 빼내 물 밖으로 들어보았다. 전보다 더욱 선명히 보이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전혀 이곳의 흐름에 스며들지 못하고 그저 떠다니고 있었다.


“거봐, 괜찮다고 하지?”

“얘기 들어보니까 뭐래? 

“편한 시간 보내셨네, 이제 네 자리는 메워 줘야지?”


난 그들과 딱히 그들과 돌아서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오히려 적으로 대치하고 싶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 말이냐.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야?


“뭐, 좋지 않다는 군”

비합리적이고 부적절한 조치는 왜 일어나야하고 무엇으로 그것을 변명할 셈인가. 이유에 대한 답은 꽤 간단명료했다,

“불충분하다. 규정에 만족되지 않는다. 절차가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소장은 당분간 내게 검사확인 기간이라는 명목으로 근신을 명했다. 그는 가식적 옹호론자이다. 이곳에서 가장 큰 책임을 맡고 있기에서일까 트레이스나 보통의 윗적과는 다른 표상을 쓴다. 겉으로는 나의 편에서 적절한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설명하다가, 실제론 나와 끊임없이 확률게임을 하는 중이다. 사실상 그가 이제 나를 검증할 수 없으니 내가 가져온 자료와 내가 보여 지는 모습을 대조해 그 객관성을 조사하면서 내가 도중에 자발적으로 포기할 가능성, 내 허점을 파악할 수 있는 순간들을 계산하고 있다. 그는 나의 위치에서 똑같은 눈으로 내가 피할 수 없는 감정과 생각들에 대해서 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이 손해 볼 수 있는 패를 내놓으려 할 리는 없다.


“그 동안 별일 없었지?”

“이 곳의 일이야 뭐 별반 변화가 있겠소. 오히려 리벨이 없다는 걸 눈치 채지도 못 할 만큼 자연스러웠소. 소름끼치는 대로 재밌지 않소?”

“그것이 왜?”

“그들은 리벨을 어떻게든 가지 못하게 잡아두려는 놈들이오. 그런데 리벨이 상황적 특성 때문에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거요. 아니 오히려 리벨을 시발점으로 이곳이 흔들릴 것을 우려해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게 맞을 거요.”

“내가 그들에게, 아니 이곳에 안 좋은 바람을 넣을 가봐 그런 것이겠지.”

“허허허, 쇠사슬을 길게 끌고 다녀오셨으니 어디 티끌하나 묻어 왔어도 이상할리는 없지 않겠소?”

벌러덩 누웠다가 간만에 공책을 꺼내 들었다. 왠지 지금 느끼는 심정을 정리해보고도 싶었고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어쩌지도 못하고 휘말릴 것만 같았다.

“저기, 리벨”

“왜 그러냐.”

“나는 사실 리벨이 지금 고립되고 있는 것 같아 사실 옆에서 지켜보면서 걱정이 되오. 리벨은 듣기 싫겠지만 수동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현실 아니겠소.”

끄적이고 있던 것을 덮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 굉장히 무서울 것 같소. 스스로를 잃어간다는 것. 처음엔 보기 싫어서 보지 않으려 하다가도 곧 정말로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귀 기울이려 해도 아무 것도 없을 것이오, 입을 때려 해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 버렸을 수도 있소. 그 외로움이 어떨지 상상이 되어 나는 너무 무섭소.”

“듣기 싫다.”

“... 내가 주제를 넘었소. 잠시 누구랑 할 말이 있어서 갔다 올 테니 편히 쉬고 계시오.”


간만에 꿈을 꾸었다. 평소에도 징후 없이 아주 깊이 잠드는 체질이라 밤에 내가 무언가에 시달린다거나 꿈을 꾸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애초에 무언 가를 마음에 오래 담아두거나 묵혀둔 지는 굉장히 오래 되었다. 아주 옛날의 기억이었다. 나는 어릴 적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낮에 일을 하러 나가시면 주로 그녀와 같이 있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침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내가 열쇠가 없음을 알았고, 할머니도 어디 놀러 나가시고 없는지 한 참 두드려도 답이 없었다. 사실 그녀가 어디로 갔던가는 안중에도 없고 난 어떻게든 집에 몹시 들어가고 싶었다. 집을 한 바퀴 빙 돌면서 어떻게든 틈을 찾았다. 결국 2층 화장실 창문이 잠기지 않았음을 알아냈고, 나는 떨리는 발로 기어 올라가 몸을 밀어 넣기 위해 창을 뜯어내야 하는 것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눈과 머리는 온통 그래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허리가 완전히 빠지기 전, 정면의 거울에 비친 나와 마주치고 그대로 잠에서 깼다.


“에휴, 누가 밤새 창문을 열어 둔건지.. 방에 냉기가 가득하군. 리벨은 오늘부터 일은 안 나가는 거 맞소?”

“그래, 눈치가 보여도 별 수 있나”

“원래 리벨 같은 경우에는 따로 옮겨주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같은 장소에는 두면서 눈에 띠게 격리시키는 것은 고문이 아니오? 하여튼 이곳과 윗적들이란 도무지 정을 붙일 수 없소. 이미 불러내서 한 얘기씩 다 늘어놨을 텐데 말이오. 그럼, 몸조리 잘 하시오. 다녀오겠소.”

“그래도 얘기를 들을 놈이 하나 더 남아 있긴 하지?”

“누구 말이오?”  

“있잖아.”

씩 웃으며 자세를 취하고 주먹을 뺨 쪽으로 붙이며 몇 번을 내질렀다. 

“아하. 괜찮을 거요. 설마 같은 처지에 욕을 할라고. 여하튼 나는 가오. 이따 저녁에나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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