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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스러운 곰 Jul 24. 2021

우주 먼지 여관 5장

시간의 선에서 내가 있어야 할 곳


                                                                    5     


   

<1>     


이미 새벽부터 하늘과 땅이 흰 빛깔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어제 밤늦게 여닫힌 문은 아침 늦도록 열리지 않았다. 지난날의 일이 고된 것인지 안주인의 방문도 열리지 않았다.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든 두 남녀의 방이 순서대로 열렸고 그들은 주방장이 일찍이 만들어 놓은 식사를 해결하며 아침을 보냈다. 좀 시간이 지났을 무렵 마릴의 방문이 열렸고 방에 돌아가지 못하고 서재에서 잠을 청했던 바우가 깨어났다. 마릴은 기지개를 피면서 계단을 내려가던 중 옆 벽에 있던 그림을 흘깃 보았다. 바우는 지난밤에 보다 만 그림 몇 점을 더 넘겨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러곤 화로 앞에 앉아있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뒤에 저들을 봐요”

“배경도, 걸어갈 길도 다른 두 사람인데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어린 아가씨는 몸을 식탁에 기댄 체 왼 손을 턱에 괴이고 말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젊은 청년을 보고 있으며, 그는 왼 손에 든 잔은 미쳐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즐겁게 모험담을 늘어놓고 있다.


“.......저들은 우리가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우리였던, 우리가 없는 우리의 말이 피어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알아내야 해요. 어째서 우리의 모습이었을 지도 모르는 모습이 우리와 같은 시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를요.”

“글쎄 당신은 과거의 흔적을 쫓는 게 의미가 없다 했지 않았나요? 그러려면 먼저 부인을 찾아봬야 맞는 건데. 혹시 간밤에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착각하지 마요. 말했듯이 난 저들을 온전한 나의 과거라고 인정하고 있지 않아요. 저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현재겠죠. 오히려 나는 저들을 통해 나에게 없었던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는 이유를 찾으려는 거에요. 그 힌트는 저들이 보여주는 그때 그 시간 그 공간인 거고요.”

“나도 밤에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우리의 문제가 우리가 속한 시간의 기준에서 생각해야 할지를요. 결론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당연히 과거 현재 미래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머물러 있는 지금 현재가 당연하잖아요?”

“마릴, 하지만 생각해 봐요. 당신도 아마, 아니 우리는 모두 인정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온전히 우리가 스쳐온 경로가 될 수 없음을. 더욱이 우리 각자를 대신할 분신이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걸요. 그리고.......”

“그 뒤의 말은 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꺼내려 하는 말이 무척이나 두렵습니다. 앞으로 그 말을 아주 조금이라도 가슴 속에 담게 되면 찾아올 괴기스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요? 오, 바우. 난 그러지 못해요.”

“마릴....... 우리가 있는 현재를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여기 머물러 있는 우리 둘 뿐입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요.”

“저쪽이 내 과거의 파편이라면 희망이 분명 있을 테요. 포기 하지 않을 가능성도 언젠가는 발견하게 될 겁니다. 난 저기 있는 친구와 저번에 심오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소. 두고 보세요. 반드시 저 어린 친구와 무언가 닿고 볼 테니.”


바우는 자리에 일어서서 그의 뒤로 다가갔다. 어깨위에 손을 올리고 말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몇 마디를 던졌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포기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그의 손을 잡았다. 롬에게 잠시 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고 옆의 다른 어린친구에게도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바우가 화색이 돌아 먼저 일어났을 땐 롬은 그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바우가 얼빠진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던 순간에 롬은 옆의 친구에게 점심을 사주겠다며 밖으로 데리고 나가버렸다. 고개를 떨구던 바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았으나 마릴을 제대로 처다 보지도 못했다. 마릴은 다가가 말없이 그의 어깨에 왼 손을 올리며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숨을 내쉬웠다.   


  

<2>     


“바우, 물리적 너머란 게 그렇게 중요한 걸까요?”

바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물론이고 당신이 한 수차례의 시도에도 우리의 인지는 저 밖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볼 수 없는 것. 하지만 버릴 수 없는 삶의 단편.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의미 있는 건가요?”

바우는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물론이오. 저 곳에는 우리가 들어온 길이 있소. 우리가 여기로 들어오기 전 발자취가 남아있을 것이오. 우리의 흔적이 말이오!”

“그 흔적이란 것. 지금도 또렷이 들을 수 있으신가요. 전처럼 볼 수 있겠어요? 제대로 마주할 순 있겠습니까?”

“물어 볼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과거에요. 과거가 어디 도망간답니까?”

“그 과거.......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마릴의 왼 손이 세차게 흔들렸다.


“우리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어요. 스스로는 다 보고 있다고, 다 듣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소통의 문제는 온전히 그것을 전달받지 못하는 저쪽의 문제라고요. 우리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 이상 나를 비참하게 하지 마세요. 마릴. 아니 내가 얘기하겠소. 나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소. 내게도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저들은 내게 훨씬 많은 메시지를 보냈을 지도 모른다. 다만 그게 내가 알아 듣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해을 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저들과 다름없는 게 아닌가하고 두려웠소.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지금도 꽤 꼴사나운 모습인걸 알고 있소. 하지만 마일 그렇게 된다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벽 앞에 어떤 표정으로 서야 한답니까?”

“이곳에서 플립이란 아이를 만나 보았나요?”

“재밌는 아이였소. 일전에 이곳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나를 먼지 거인이라고 부르더군요.”

“무슨 의미죠?”

“아주 큰 시야를 가진 줄 아는 한없이 아주 작은 존재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우주가 얼마나 큰 세계인 줄 가늠하지 못하죠.”

“지금 나의 한 쪽 어깨엔 당신 손이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까진 여기에 그 누구도 나와 그러진 못했습니다. 난 그들이 어디에 있는 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던 건지도 몰라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들이 당연히 내 앞에 있는 것 마냥 대했습니다.”

“이전까지 우리가 있던 세계는 닫혀버렸고 새로운 눈을 떠버렸죠. 우린 지금 우리가 속한 이 공간과 시간을 다시 천천히 볼 필요가 있어요.”

“그래요. 다시 원점이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네요.”

“바우, 기운 내요. 우리가 그저 틀렸던 건만은 아닐 거에요.”    

 

<3>     


집 앞을 쓸고 있던 앤빌마가 멀리서 보이는 익숙한 말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마릴 부인도 창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노인은 가벼운 미소만을 지었다. 어제 일찍이 길을 떠났던 바깥주인은 길을 가던 중 , 한 마을에서 왕궁에서 파견된 급사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깃발을 흔드는 것을 보고 급히 말을 돌렸다고 했다. 그리고 여관안의 식구와 객들에게도 늦지 않게 짐을 정리해서 안전한 인근 중립국으로 떠나는 게 좋다고 얘기했다. 마릴 부인은 사색 한 번 없이 오래 살아온 집을 비우는 것에 담담해 했다. 거실에서 흥분한 사람들의 소리에도 화로 앞의 마릴은 가져온 술을 마시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노인은 손을 깍지 낀 채로 옆 자리를 청했다. 마릴 부인은 둘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며 짐을 싸겠다며 방으로 향했다.

 

“자네와 얘기를 해보는 건 여기 와서 두 번째로군.”

“두 번째라는 것을 기억하시는 것만으로 기쁘네요.”

“자네가 지금 앉아있던 그 자리.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편지를 놓아두었다네. 기억나나?”

“그러고 보니 그랬군요. 작은 선물은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자네가 그것을 어찌 찾을 줄 알고 내가 여기 두었겠나?”

“한결같은 화로가 지표가 됐던 거겠죠.”

“지금도 그렇게 믿나?”

“아니요 지금은 필요 없어요. 이 집에 처음 와 잘 몰랐을 때나 그러했고 이제는 무엇에 변화가 생기고 달라지면 그것을 느낄 수 있겠죠.”

“그렇다면 자네는 왜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는 건가?”

“길을 잃었습니다. 왔던 길도. 나갈 길도.”

“왔던 길이 나갈 길이 될 순 없던가?”

“그리 믿었던 스스로와 충돌 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 현재와 미래의 연결이라 단정할 수 없는데도 애써 믿으려 했어요. 하지만 과거는 내 미래 뒤에 서있지도 않았고 그 앞에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이층에서는 부인과 어린 친구가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사색을 하면서 방으로 뛰어 들어가려했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서재로 걸음을 옮기던 다른 마릴을 보며 숨을 죽였다. 두 어 번 껌벅이던 눈은 이윽고 그녀의 발을 두 어 번 움직이게 했다. 그렇게 뒤의 있는 자는 앞에 있는 자를 쫓았다.


“나를 잠시 따라오겠나.”


두 명의 바우는 지하실로 내려왔다. 노인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통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지켜보는 이는 그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검게 거친 손에 있던 무언가가 한 없이 떨군 자의 손으로 옮겨졌다.


“전 이미......”

“자네가 말하고 싶은 ‘이미’란 것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네. 자네는 깨우치고 있어. 가슴속으론 알고 있지. 단지 엉켜있는 그것들 사이에서 다음으로 갈 계기가 필요했던 것뿐이야. 지금 자네의 손에는 무엇이 있지?”

“......과거입니다. 하지만 이전에 제가 알던 과거가 압니다. 이젠 현재에서 바라보고 있는 과거는 또한 미래란 말로 바꿔 쓸 수 있다는 걸 알아요.”

“그렇네. 자네는 처음에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택했지. 이젠 다시 위로 오를 차례야. 자네는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네.”


그가 사다리를 타고 열쇠를 넣고 돌리기까지 그 전까지 그를 감싸 돌던 의심과 위화감은 희미해져 갔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빛이 내려올 때 그는 당연한 듯이 위쪽에 서있었다. 아래에서 앳된 친구의 흔드는 손에도 그는 가볍게 주름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4>        


마릴은 책상에 엎드려있었고 앞의 여성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지 않으세요?”

“......”

“깨어있다는 거 알아요. 지금 잘 때가 아니에요”

“......”

“허참, 이럴 때가 아니라도 그러네.”

그녀는 바닥에 쌓아둔 책으로 탑을 쌓아 앉았다.

“저기요 선생님, 우리 가야한다니까요”

“어디를요?”

“여기 있지 말고 떠나야 한데요. 안전한 곳으로 멀리요.”

“가지 못해요. 오히려 멀어지고 있어요.”

“멀어지다니요?”

“제가 들어왔던 저 문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 좁혀지지 않고 제가 이곳에 들어왔을 그 때부터 희미해져 가요.”

“아니요. 오히려 반대인 것 같은데요?”


숨을 크게 내쉬며 가느다란 눈으로 마주했다.


“당신은 과거란 변해간다, 달라진다. 그렇게 말하며 미래에서 거짓된 흔적들을 지우려 하죠. 하지만 내가 볼 땐 당신은 과거를 지우지 못해요. 오히려 스스로 붙잡고 놓아주려하지 않죠.”

“......당신 말대로. 난 그것들을 완전히 잊혀 보내고 있지 못해요. 그게 뭐 어때서요. 모두들 과거의 이정표는 아니라도 생채기쯤은 갖고 가잖아요.”

“당신의 말이 맞아요. 그래서 당신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기대조차 사라진 나를 보며 뭘 기다린다고 하다니. 함부로 아는 것처럼 떠들지 마요. 나에 대해서 알긴 해요?”

“이 어지러운 세상은 변해요. 오랫동안 시끌벅적 했지만 아직도 잠잠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죠. 당신이란 세상도 변해요. 천천히 움직이고 돌아다녀요. 그리고 지금 당신은 거기에 있어요.

 

마릴은 두 손으로 눈을 지그시 감쌌다.


“사실 맞아요. 돌아가고 싶어요. 기다린다는 말도 맞아요. 난 언제가 내가 변해 예전의 나와 교차해 마주할 순간이 오길 바라요. 떠나면서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두고 온 사람들도 아직 그리워요.


빛을 잃은 마릴을 뒤로하고 그녀는 커다란 커튼을 거뒀다. 어둑한 방에 밖으로 난 틀 사이로 통해 많은 것들이 흘러 들어왔다.


“그렇게 당신 앞의 길에서 새롭게 조우하면 돼요. 더 이상 기다리지 마요. 이젠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지 말고 새로운 다리로 내려가세요.”


눈을 뜬 마릴이 한 걸음씩 다가와 창 앞에 섰다. 집 뒤편으로 이어지는 사다리가 바닥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릴은 창을 열었다. 한 발, 한 손씩 그녀는 자신을 옮겼다. 마지막에 헛디뎌 떨어질 뻔 했으나 아래에 있던 바우가 받아주었다. 그녀는 올려다보며 자신의 입가를 만졌다. 볼은 작고 보드라웠다.


 뒤쪽의 커다란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짐승의 눈망울에 무엇이 비추는 지를 깨달은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며 고삐를 쥐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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