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선에서 내가 있어야 할 곳
3장
<1>
어제 아침 무렵에 나는 이 여관에 도착했습니다. 지난주 그녀의 장례식이 끝마친 오후, 돌아오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왔습니다. 짐이라 해봤자 대단하다 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 갑작스럽게 준비된 것도 아니지요. 그 동안 난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요, 마음속에 존재하는 나의 발 뒤에는 항상 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 선을 그어둔 지는 오래되었지만 쉽사리 그것과는 멀어질 수 없었습니다. 나는 분명 발을 떼었다고 생각했지만 소름끼치게도 그것은 아직도 내 그림자를 자르고 있었으니까요. 아무리 내가 다른 곳을 향해 가더라도 말입니다. 결국 언제나 나를 앞에서 이끌어주던 그녀는 지금 내 옆에 서 있지도 못하고 내 뒤의 선 너머 어딘가로 묻혔습니다. 이젠 난 내가 뒤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이라면 내가 데려다 줄 수 있어요. 매주 오늘이면 물량을 넣어주러 가야 되거든요”
“스프링베일, 당신은 참 친절하군요.”
“그나저나 여행 중이라도 여자가 타지에서 혼자 다니다니. 이곳에 아는 지인이라도 있는 건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아까 지나친 수염이 길게 나신분이 자신 있게 추천하고 가시더군요.”
“앤빌마군요. 그는 그 여관의 실질적인 관리자라고 할 수 있죠.”
“음, 그도 역시 물건을 구하러 시장에 나온 것 같던데. 당신에게 늘 그렇게 직접 주문을 하고 가는 거군요.”
“낚싯대를 놓고 가는 거죠.”
“네?”
“아 미안해요. 이건 그저 나와 그사이에 쓰는 비유 같은 거에요.”
“어떤 의미로?”
“낚싯대 주인이 미끼까지 달아 직접 구했으나. 그것을 통째로 두고 간단 소리죠. 언뜻 들으면 이상한 말처럼 들릴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그와 당신과의 신뢰 관계로군요”
“그러고 보면 오늘은 당신도 그 중 하나인 셈이라 할 수 있죠.”
“재미있는 분이군요.”
말발굽 소리 사이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 마차 위에서 보는 전경은 먼 미래가 가깝게도 스쳐가는 듯 했다. 그는 날 문 앞에 세워주고 집 뒤편으로 돌아갔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저 너머에 누군가 멈춰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가 있다는 게 생각하기 싫었다. 다행스럽게도 창이 많지 않음에도 실내는 기분 좋게 환했다. 거실에는 상냥해 보이는 노부인이 불가에 앉아 봉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안쪽에는 남자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난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여쭈었다.
“안녕하세요.”
“오, 잠깐만 있어 봐요. 이것만 마저 정리하고 아까하지 못했던 얘기를 계속 하죠.”
“네?”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주방 같아 보이는 곳에는 익숙한 목소리 그대로 앤빌마가 보였다. 그 외에 한 명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계단 쪽 그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음, 어두운 방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건가. 사다리가 걸린 방만큼은 몇 번이나 덧칠 된 것처럼 보인다. 뒤 돌아보니 부인이 두리번거리고 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서야 초점이 잡힌 듯 하니 시력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하던 일은 끝나셨나요?”
“당신은 아까 말을 나누던 그 분이 아니군요.”
“아쉽게도요. 저는 마릴이라 하고, 이 마을에 들린 여행자입니다. 빈방이 하나 있는지 여쭙고 싶은데 혹시 이곳에 주인이신 바우를 아시나요?”
“호호호, 마릴. 이곳의 어떤 바우를 찾으시는 거죠?”
“여기 여관의 주인이 바우라고 듣고 왔는데요?”
“장난이에요. 어떤 바우를 찾는 건지는 알고 있답니다. 제 남편은 2층에 있어요. 하지만 그는 지금 책에 푹 빠져있으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바우라는 것은 이 집의 성을 말하는 건가?
“오 내 정신 좀 보게, 그전에 이 편지들을 챙겨야지.”
“바우 부인.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혼자로 충분하답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기 전 주방에 살짝 내밀었다. 아까 벽에 가려져 있던 사람이 보였다. 나와 비슷하게 서른 좀 넘어 보이는 연령대의 남자다. 이 층은 아쉽게도 조금 어두웠다. 밤과 더불어서 날씨가 어두운 낮에도 초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는걸. 내 방은 복도 오른쪽에서 끝이다. 복도 끝에도 방이 있는 듯한데 불투명한 너머로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이 문은 당신으로만 열리고 닫힐 겁니다.”
“단속을 잘하란 의미인거죠? 여행 중에는 항상 조심해야 하니까요. 아 그렇다고 이 동네나 이 여관의 치안이 안 좋다는 말이 아니에요.”
“안심하세요. 이 문고리를 다른 누가 돌린다 한들 그 너머의 방은 당신이 돌려서 나온 방이 아닙니다. 그들의 과거는 당신의 미래와 교차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미래또한 당신의 과거와 교차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녀는 한 번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복도 끝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난 복도에 남아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몇 번이고 문고리를 돌렸다 놨다를 반복했다.
<2>
짐을 간단하게 정리하고서 잠시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보았다. 며칠을 묵게 될지 모르나 우선 이 집 사람들과 친해지는 편이 좋겠다. 문을 열고 나와 그대로 오른쪽 방으로 들어갔다. 서재라고 해야 할까? 책이 바닥이나 책상에 높게 쌓여 있긴 하지만 무언가 연구를 위한 공간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래, 무언가 학자의 방이라면 이런 느낌일까 싶다. 바닥엔 무언가 써 놓은 종이들이 잔뜩 널부러져 있으며 그 뿐만이 아니라 벽에도 그림 같은 것들이 이리저리 붙어있다. 이 집의 조형도 같은 것일까. 밖에서 봤던 것이랑은 조금 다른데. 그리고 그 옆에는 좀 독특한 집 그림도 있다. 동쪽 어딘가에 있는 나라에서는 주로 나무나 흙을 이용해 집을 짓는다고 들어봤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옆엔....... 잘 모르겠다. 이것을 집이라고 보아야 할지조차도 모르겠다. 탑 같기도 하고 높다란 성벽 같기도 하고. 네모 상자 같은 감옥을 그려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선생님께선 뭘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뒤에는 뜻밖의 작은 친구가 서서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혀 그와 눈 사이를 좁혔다.
“안녕”
“전 플맆이라고 해요. 방금 저에게 높이를 맞춰 주시는 까닭이 뭐지요?”
“음, 이건 친근감과 열린 태도를 보여준다 생각해요. 상대에게도, 그리고 이 모습을 취하는 스스로에게도요.”
“동작과 공간이 의미를 띠는 거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렇다면 이전에 저와 떨어진 선생님께서는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저와의 의미가 적다는 건가요?”
“음, 글쎄요? 생각보다 꼬마 신사님과 저는 그렇게 까지 얘기할 정도로 멀진 않았다고 보는데? 사실 이건 내가 꼬마 친구와 눈높이를 공유하고 싶은 의미가 더 컸다고 하면 이해가 잘 될까요?”
“이해했습니다. 저와 같은 위치에서 세계를 이해하려 하신 거군요. 송구스럽네요. 그렇게 되시며 이전 눈높이의 시야를 잃게 될 지도 모르는 데도요.”
“너 참 어린데도 똑똑하구나. 부모님이 널 자랑스러워하시겠어. 그래도 한 가지는 틀렸어. 난 과거에 내 눈에 그려졌던 세상을 믿지 않아.”
“그게 지금 자신에 비춰지는 그림자라도요?”
“그래, 그림자도 지금의 내가 아닌 비춰진 후의 나일뿐이야. 그게 나일 순 없고 인정하지도 않을 거야”
“과거가 우릴 구속할 수 없다면 무엇이 우릴 묶어 둘 수 있을까요?”
“굳이 묶이지 않아도 돼. 미래란 과거와 아주 조금씩이라 하더라도 떨어진 우주니까”
“재밌는 시각이네요. 앞으로 계실동안 잘 지내요 우리. 종종 재미있는 얘기 부탁드릴게요.”
“나도 멋진 친구를 사귀게 돼서 반가웠어, 난 마릴이야.”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어떻게?”
“어렴풋이요.”
“혹시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니?”
“제가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도무지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해드릴 수 있어요. 지금 저와 선생님께서는 그전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어요. 비록 제가 아무리 걸어가도 닿을 수 없을 만큼 지금 아직도 멀리 있지만요.”
이 아이의 눈동자에 담긴 우주는 아득히도 크다. 너무나도 큰, 반대로 우린 너무나도 작은. 정말로 티끌이나 먼지처럼.
<3>
아까보단 조금 환해진 복도를 통해 계단으로 내려왔다. 아래에는 젊은 아가씨와 노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 그럼 이 여관은 할아버지의 첫 가계였던 거군요.”
“그래도 지금은, 개조를 많이 해서 그때의 흔적들이 잘 없다네.”
“저도 그럴 수 있을까요?”
“어린 아가씨께서는 스스로 길을 떠나신 듯한데. 무엇이 걱정이신가?”
“길을 가다 어디서 멈춰야 할지요. 그리고 스스로 어디 있는지 몰라서 길을 잃을까 봐도 두려워요.”
“그렇다면 자네의 기준과 선택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와 함께하는 건 어떤가?”
“그럼 할아버지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다음에 제게 좋은 말을 고르는 법을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야. 다음에 아가씨께 집 뒤편의 헛간에서 괜찮은 말을 소개시켜주겠네”
그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는데 동시에 재채기가 나왔다. 순간 젊은 저 어린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겸연쩍게 미소를 띠었으나 그쪽은 환하게 웃어주었다. 아까 보았던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좋은 냄새, 비프스튜로군. 다른 곳에서 끓고 있는 주전자에서 차를 한 잔 따라 갖고 나왔다. 거실에는 아까 그 인상 좋은 아가씨만 테이블에 앉아 뭔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도로 들어가 한 잔을 더 따라 가지고 나왔다 맞은편에 자리를 봤다. 누가 무언가를 쏟은 듯한데 잠시 머뭇거리다 쿠션을 깔고 앉았다.
“마시겠어요?”
“오, 고마워 바우”
내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지만 냄새는 맡을 수 있는 모양이다.
“여기 지도에 표시된 이곳 말이야. 어째서 굳이 운하를 통해 곧바로 가지 않고 중간에 여기 표시된 작은 마을을 하나 거쳐 가려는 거지?”
“요새 운하로 물건을 옮기는 것은 다들 추천하지 않아요. 최근에 전쟁을 준비한다니 뭐니 해서 그쪽 치안이 많이 소홀해져 있거든요. 게다가 거긴 단순한 작은 마을이 아닌 예부터 유명한 금 거래소에요. 이곳에서 한 몫 번 돈을 전부 바꿀 셈인가 본데요?”
“오호, 안전한 자산으로 바꾸어 둘 계획까지....... 거기까지 내다보다니 대단한 걸?”
“이젠 고개를 들어서 나를 좀 봐줄래요?”
그녀는 천천히 목을 편 뒤로도 한참을 갸우뚱했다.
“내가 방금 전까지 듣고 있던 게 당신의 목소리 인가요?”
“당신이 아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거라곤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음 글쎄요....... 전 단지, 제 앞의 있는 게 누군가 란걸 알아채진 못했어요. 그저 잔은 건네기에 제 친구인가 했죠. 그리고 어째서 일까요. 전 지금도 당신이 한없이 희미하게 느껴지네요. 당신은 누구죠?”
“전 메리에요. 책을 씁니다.”
왜 난데없이 어릴 적 이름 같은 게 튀어나온 걸까.
“작가요? 의외네요.”
“나도 알아요. 그렇게 안 보인다는 거.”
“아니요. 그래서가 아니라 아까 해준 얘기를 생각해보면 의외라는 거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런 쪽은 어릴 때부터 저희 아버지로부터 들고 자란 말이 꽤 많아서요.”
“사실 저도 글을 좋아해요. 언니처럼 펜을 잡는 건 아니지만 어릴 땐 마을 도서관으로 가서 문을 닫을 때까지 구석에 기대 웅크려서 읽곤 했죠. 이젠 제가 그쪽을 선생님이라 불러드려야겠네요. 여기 사는 꼬맹이처럼. 하하”
“혹시 어디 출신이죠.”
“클로우 지방이요. 혹시 알아요?”
“어쩐지....... 당연하죠. 저도 한 땐 거기 살았는걸요. 그런데 거기 도서관이란 것이 있었던 가요?”
“오오, 여기서 고향 사람을 만나게 될 진 몰랐는데. 그럼요, 어머니께선 제가 태어나던 해에 새로운 주화가 발행되었다고 하셨죠. 그 기념으로 시청 맞은편에 도서관 착공을 시작했는데, 그곳을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제 8번 째 생일이 되어서야 가능했어요. 아직도 처음으로 내 자신이 그렇게 수많은 책으로 둘러싸여 있던 그 설렘을 잊을 수 없죠.”
신 주화가 발행되고 그로부터 8년....... 시기가 들어맞지 않는걸.
“혹시 선생님은 과거에 혹시 절 보셔서 지금 알아보고 물어 본 건가요?”
“안다고 해야 할지 익숙한 분위기라고 해야 할지. 왠지 많이 느껴봤던 인상을 받았네요.”
“그건 혹시 당신과 제가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닮았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이 낯설지가 않거든요.”
그렇구나.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나였을지도 모를 모습.
“그런가요? 선생님은 신비로운 사람이에요. 내 앞에 있는데도 아직도 당신은 멀리 있는 사람 같아요. 분명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사라지는 것 같고. 들리면서도 소리가 맴도는 느낌이에요.”
“우리가 아직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 사람이 가지는 우주는 그 자체로 방대해서 다른 누군가가 가늠하기 쉽진 않죠. 하지만 아직 우리가 서로를 잘 이해하진 못하다고 걱정하지 말아요. 비록 이렇게 만나면서 저 안의 당신이라는 새로운 우주가 생겼다고 하지만 그건 당신의 우주가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만의 것을 갖고 있죠.”
“당신은 영민한 사람이에요. 그런 견해는 제게 또 다른 영감을 주네요.”
“사실 이건 제가 생각해낸 게 아니에요. 어릴 때 본 책에 나와 있었죠. 오, 그나저나 선생님께 제 이름도 알려드리지 않았네요. 전 마릴이에요.”
<4>
나와 같은 이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 이상한 곳이다 여기는. 방금 전까지도 이야기를 나누던 어린 마릴은 잔을 다시 채우러 가겠다며 자리를 일어섰는데 주방으로 가는 듯싶더니 발을 돌려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가버렸다. 그저 아까까지 누구와 있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원래는 친해지면 여기 안의 소개 좀 부탁하려 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올 때 날씨가 좋던데 밖에서 건물 좀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방에서 겉옷을 챙겨 내려가 현관으로 갔다. 아까 보았던 그가 멍하니 서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던 거지?
“저기요?”
시선은 정확히 문을 향해있다. 다만 나가려는 의도인지는 읽을 수 없네.
“혹시 좀 비켜주실 수 있어요?”
정신을 어디 내려놓은 듯하다. 별 귀찮은 사람도 다 있군. 무시하고 문을 살짝 열었을 땐 바로 앞에 사람이 있어 놀라 넘어질 번했다.
“저기에 내가 있어”
“저기에 내가 있어”
문 경계를 두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 둘이잖아?
“나는 여기에 있어”
“나는 여기에 있어”
“그래요 쌍둥이 신사 분. 당신은 둘이에요. 합쳐서 둘이라고요. 그러니까 이젠 그만 놀라게 하고 좀 나와 봐요.”
그러곤 내가 안쪽의 남자를 가볍게 밀자 바깥의 남자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 보았다. 여전히 없다.
“당신도 봤죠? 거울에 비친 듯이 똑같이 생긴 사람.”
어느새 뒤돌아 서 있다. 뭐야 이사람.
“무슨 문제가 있나요?”
“어? 바우 부인.”
“전 이제 잠시 마을로 나가려던 참이랍니다. 혹시 길이 같다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오, 물론이죠. 그런데 여기 이 분이 아까부터 어딘가 이상해요. 불러도 대답이 없고 잠깐 뒤돌아섰을 뿐. 전혀 미동을 하지 않아요.”
“그거 큰일이군요. 그럼 그 친구는 지금 병원에 있나요?”
“보이지 않으세요? 지금 우리 앞에 있잖아요!”
“호호, 글쎄요....... 제 앞에는 지금 당신만이 서 있는걸요. 혹시 그 신사분이란 것이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하고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냥 가만히 있어요. 마치 영혼을 어딘가에 빼앗긴 사람처럼, 그의 눈은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을 보는 것처럼. 그런데 정말로 보이지 않으세요?”
“사람은 볼 수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신사분의 인지가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제가 그분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다행이도 그분의 시간은 아직 당신과 함께 머물러 있는 모양입니다. 혹시 그분이 의식이 돌아오거나 상태가 안 좋아 보일 땐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정신이 멍해져 얼마나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밖에 나가는 것도 포기하고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주저앉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상황정리가 필요했다. 분명 발끝까지 그대로 베낀 인간이 둘이나 있었고 알 수 없는 듯 한 행동. 심지어 부인은 그를 없는 사람처럼 여기며 지나갔다. 어색함인가. 아니 이건 위화감이다. 단지 내가 이해 못하는 무엇이 있는 거야. 아니, 이건 무언가 장난을 치는 걸 거야. 그렇지 그럴 거야. 잠시 뒤 들어온 엔빌마와 눈인사를 나눴다. 그는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다행이군. 드디어 저 스튜를 맛 볼 수 있겠어. 나도 잠시 뒤에 내려와야겠다고 방에 들어가서 잠시 눈을 붙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스로도 우습다고 생각하며 허기에 잠을 깼다. 밖을 보니 한 밤중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내려온 일 층에는 불만 피어오를 뿐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뒤적거린 주방에는 빵 몇 쪼가리와 식었지만 아쉬운 대로의 스튜가 남아 있다. 옆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올라오는 소리에 놀라 불을 초로 비췄다. 희미하듯 팔랑거리는 모습은 마치 귀신같군. 이 집에 온 뒤로 처음 보는 사람이다. 나이는 아까 그 아가씨랑 비슷할 것이다.
“처음 뵙습니다. 놀란 표정을 보아하니 이곳에서 사람이 나올 줄 몰랐나 보네요? 하긴 누구라도 놀라겠죠. 하하”
“저도 처음 뵙습니다. 사실 이곳이 처음이라 그 쪽에 지하가 있는지도 처음 알았어요. 그 말대로 어떤 상황이라도 적잖게 당황했을 겁니다.”
“그런가요. 뭐, 혹시 이 밤에 출출해서 내려오신 건가요.”
“네, 다행이도 요기는 될 수 있게 조금은 남겨져 있네요.”
“그거 잘 됐네요. 그럼 저는 시간이 늦어서 이만.”
그가 떠나고 계단 밑을 보았다. 지하라고 생각했던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캄캄한 벽만 자리 잡고 있었다. 음식들을 가져와서 불가에 앉았다. 잘린 빵을 스튜에 찍어 먹어도 썩 잘 어울린다. 좀 싱거운 느낌은 있지만 나쁘지 않아. 불이란 오묘하다. 조금씩 스스로 형태를 바꾸어 가는데도 그리 거북하지 않다. 익숙한 모습과 낯선 모습을 번갈아 나타내며 그렇게 시간 속에 남아있다. 이상하군. 아까 계단 밑을 봤을 땐 아무것도 없는 듯했는데 저 남자는 주방 어디에서 나온 걸까. 그래도 저 바위 같은 남자가 드디어 스스로 몸을 굴린 모양이군.
“좋은 아침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