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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스러운 곰 Jul 24. 2021

우주 먼지 여관 2장

시간의 선에서 내가 있어야 할 곳



                                                                     2     




<1>     


이곳에서 시작되는 두 번째 아침, 밖에는 비가 오지 않지만 소리를 듣고 있었다. 새벽에 마무리한 편지를 길게 두 번 접고, 봉투 안에 정갈스럽게 넣었다. 동봉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계단 입구를 지키던 수문장은 아침에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주방에는 큰 냄비로부터 김이 나고 있지만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눋지 않게 대신 저어야겠다고 시작한 스튜안의 국자가 서서히 속도를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앤빌마? 거기 있어요?”


정신 차리고 돌아보는 사이에 국자를 빠트려버렸다.


“거기 있는 거 앤빌마 맞아요?”

“아 저는..”

“어머? 누구세요?”

“전 바우라고 합니다.”

“전 집배원 네트에요. 바우,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가 손을 앞으로 건넸다. 순간 내 눈이 잘 못 됐던 것이었을까. 분명 마주 잡으려하는 내 손은 한없이 가까워지되 닿지 않았다.


“그 동안 쌓인 우편물을 돌리려고 들렸습니다. 요새 밖이 날씨가 심상찮아서 일을 할 수가 없었잖아요. 아시죠?”

“네..”

“음, 당신 바우라고 했죠? 아, 당신에게 온 것은 없군요.”

“당연해요.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아직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았거든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앤빌마는 어디 자리를 비웠나요?”

“글쎄요. 저도 그에게 볼 일이 있던 참이거든요”

“지하 창고에는 가보셨나요? 그는 더러 아래에 내려가 있거든요”

“혹시 그 작은 친구가 몰래 키가 커지는 연금술 계획을 실행 중인가요?”

“하하, 아니에요. 그는 주기적으로 필요한 자재나 식재를 창고로 내려서 받고 있거든요. 아마 지금 그 일을 하는 중일 거에요.”

“그렇군요. 혹시 제 우편을 맡아 주실 수 있나요.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내야 하는데 마침 당신이 있으니 부탁해도 될 것 같네요”

“아무래도 아직은 무리일 듯싶어요. 지금은 밀린 일이 많으니 어차피 지금 주셔도 당장은 보내지도 못할 겁니다. 혹시 모레쯤에나 제가 다시 들리면 그때 주시겠어요?”

“사정이 그렇다면 뭐 그러죠.”

“그럼 이만”

“저기 혹시 네트”

“네?”

“전에 혹시 내 이름으로 온 것이 여기로 오진 않았나요?”

“전이라 함은?”

“한 일주일 전쯤이요”

“글쎄요 없었던 것 같은데요? 혹시 확인해 드려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이것들은 부인에게 전해 주시겠어요. 그녀가 알아서 해줄 거에요”

“부인이요?”

“그녀는 마릴이라고 하는데 이곳 안주인의 이름이죠.”

“꼭 전해드리죠”

“그럼 맡기고 전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봐요. 바우”

그대로 앤빌마를 찾으러 가려다 뒤돌아 나가기 전의 그녀를 잡았다.

“잠깐만요. 저도 같이 나가요”

“확실히 간만에 밖에서 무엇을 하기엔 좋은 날씨죠.”

“우선 저는 당신을 따라 이곳을 나가고 봐야겠어요.”

“저를 따라서요? 그 편지들은 어쩌시려고요?”

“잔말 말고 어서 나가봐요”

“당신은 안 나가고요?”

“난 당신이 나가고 난 뒤에 다시 문을 열고 나갈 겁니다.”

“바우, 스스로도 정말 별나다는 거 알죠? 난 바쁘니까 먼저 가볼게요”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보였던 틀림없이 청명한 하늘, 높게 뜬 해. 다행이 이번에는 저번과 같은 매슥거림은 없다. 난 한 번으론 부족한 마른 침을 세 번째 삼키고 나서야 문을 당겼다. 다만 당기는 힘이 지나치게 강했던 탓인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상당히 바보 같다 생각하고 일순간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게 중요하진 않았다. 느껴진다. 아까와 같은 따스함. 그 밝음. 맑은 공기. 그러나 고개를 들고서 깨달았다. 그래 난 헛디디거나 미끄러진 게 아니었다.

 

“오, 미안해요. 문 뒤에 누군가가 있으리라곤. 괜찮으신가요?”     


<2>     


낯선 노년 여성의 나지막한 말투와 그녀가 가진 분위기는 지금 저 날씨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처음 뵈는 분께 이런 실례를. 어서 내 손을 잡아요.”


애써 못 본 채 했다.


“전 괜찮습니다.”

“노인을 계속 쪼그리게 하고 있을 건가요? 그러지 말고 내 손을 잡아요.”

“정말 친절하시군요.”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사실 한 손으로 받치고 일어났다. 오히려 그녀는 계속 쪼그려 바닥에 내가 넘어지면서 떨어트린 우편물 더미를 하나 둘씩 줍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두 모아 안은 뒤 가볍게 말없이 인사를 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난 다시 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틀림없이 아까와 같은 그림이다. 시간도 바뀌지 않았고 날씨도 그대로다. 저 밖은 아직 무엇이 잘 못 되지 않은 게 분명하다. 당연한 기대, 의심할 여지없는 다음의 순간. 이 뒤에 일은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늘 상 그랬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발을 앞으로 디뎠다. 디뎠을 터다. 나의 상식은 나의 바람대로 현실화 되었고, 나의 한 쪽 발은 문을 넘어섰을 터다. 한데 왜, 난 저 너머에 있지 못하지? 무엇이 잘 못 된 것이냐. 무엇이 부족한 것이냐. 내가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 것조차 믿어지지 않는다. 잠시 꿈을 꾸고 온 마냥 나의 육신은 그대로였고 정신마저도 얼마안가 이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를 붙잡았다. 몇 번이고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무언가 덫에 걸린 거야. 그것도 볼 수 없는 무언가에......”


힘없이 발을 돌렸다. 그 노파는 책상 앞 앉아서 우편을 정리하고 있었다. 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날 고정시켜야 했고 거실 한 가운데 멈춰 섰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점검해야 한다. 새벽에 편지를 마무리했고, 내려와서 네트와의 대화. 그리고... 잘 못 됐다. 네트가 열었을 때의 풍경은 낮이었으면 안 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을 리가 없다. 네트와의 대화가 생각보다 길었던 걸까. 아니면 무엇을 빠트린 걸까. 생각이 막힐 때 즘 옆에 누가 다가왔다. 앤빌마다.

 

“바우, 여기 있었군. 아까 혹시 집배 일을 하는 친구가 오지 않았나? 마릴 부인이 그러길 문 안에 우편들이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고 하던데.”


그럼 저 쪽에 있는 건 마릴 부인이 아니었나?


“아침에 만났어요. 마침 엔빌마가 없어서 그것들을 내가 받았구요.”

“그럼 그것들을 저렇게 해 놓은 게 자네란 말인가?”

“틀린 말은 아니네요. 사건을 어떤 위치에서 보냐에 따라 다르니까요”

“자네 괜찮나? 상태가 좀 나빠 보이는군. 자네가 원한다면 이 마을 의사를 소개해주겠네.”

“전 멀쩡해요. 다만 조금, 아주 조금 생각이 많을 뿐이에요. 그보다 한 가지 물을 게 있어요.”

“무엇이든지.”

“제가 여기 온 이래로 저 문을 열고 나간 적이 있나요?”

“자네 말인가? 본적이 없는 것 같구만”

“그럼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뭐지?”

“다음에 당신이 저 문을 열고 나갈 때 날 데리고 가줘요. 아무 때라도 좋으니 혹시 나갈 일이 있으면 그때 나를 불러줘요”

“뭐, 어려운 일은 아니네만. 왜 그러는지 물어도 되겠나?”

“이유를 묻지 말고 그렇게 해줘요.”

“알겠네.”  

“고마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돌아설 때 즘 뒤쪽에 앉아있던 노파가 지나쳐가 불가에 앉았다. 소개를 기대했지만 그는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 여성 또한 저 밖의 세계처럼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일까. 볼 수 없는 것에 언제까지고 매달릴 수 없었다. 무엇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스스로의 높이를 정해야 했다. 의자를 끌어다 그녀 옆에 두었다.


“안녕하세요. 전 바우라고 합니다.”

 

  애써 웃어 보이며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아주 시간이 정지한 듯, 난 그녀의 아주 느린 움직임에도 눈을 놓치지 않았다. 다행이도 난 시간과 시간의 아주 작은 틈 사이에서 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오, 아까 그분이로군요. 벌써 밖에 볼일은 다 보셨는지요?”

“그 편지들을 떨어트려 놓은 게 접니다.”

“오, 안 그래도 난 네트가 그렀으리란 걸 믿지 않았습니다.”

“아시면서, 알면서도 왜 저를 의심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사고의 흐름에 저를 굳이 때어내서 생각하신 겁니까.”

“음, 우선 제 소개부터 할까요.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마릴입니다. 제 남편과 함께 이 여관을 운영하고 있지요.”

“전 바우입니다. 이 여관 2층에 묵게 된 여행자입니다.”

“오, 그게 정말 사실이었군요.”

“뭐가 말씀이죠?”

“호호, 난 지난 주 그이가 2층에 다른 바우가 새로 올 것이라고 했을 때 저번에 이은 장난인 줄 알았습니다. 결국 저번도 장난이 아니었지만요.”

“그 말은... 바우가 저 말고도 더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한 번씩 밤에 곤드레만드레 뻗어 있는 젊은 친구가 있죠. 하지만 그는 자신을 별명으로 불러주길 더 좋아하더군요. 뭐라더라 롬이라 했나?”     


<3>     


“스튜 간 좀 보겠나?”

“그러죠.”

“부인께서 다른 바우들에 대해 알려주더군요.”

“그걸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난 벌써 일찍이 서로 얘기를 나눈 줄 알았네만”

“그러게요. 어째서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알게 됐을까요. 음, 조금 싱거운데요?”

“마릴 부인이 건강이 별로 좋지 못하셔서 그 정도가 딱 좋네.”

“저로서도 상관은 없지만요”

“나도 자네에게 궁금한 것이 있네.”

“아까 그것 말인가요?”

“아니 다른 거야. 굳이 원하지 않는 질문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것보다 자네는 이곳을 어찌 알고 왔나?”

“한 친구의 소개로 왔습니다. 음 어디서부터 꺼내야 될지. 전 꽤 어릴 적부터 행상 일을 배웠습니다. 제법 요령을 깨우쳤다고 생각했을 무렵, 한 친구와 함께 이 나라 저 나라 건너다니며 장사를 시작했죠.”

“그래서 저렇게 늙은 말을 데리고 다니는 거구만”

“지금은 제 고향에서 그렇게 원하던 나 소유의 가게에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눈이나 비 때문에 일을 망치거나 고립되지 않아도 됐죠. 산에서 도적을 만나거나 물건을 도둑을 맞을 염려도 줄었고요.”

“한데? 정착한 삶이 적성에 맞지 않던가?”


“천만에요. 늘 꿈꿔왔던 삶이었으니까요. 오히려 그 친구가 생각이 달랐습니다. 오히려 저를 보고 비웃었죠. ‘정착이란 네가 멈춘 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너의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할 때 비로소 정착할 수 있다.’ 란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말이죠.”


아주 잠깐, 어떤 여자가 문 옆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저께 봤던 그 젊은 친구인가?


“재밌는 말이군.”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올해 여름휴가를 생각하고 있을 무렵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그 친구가 끝내 정착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소와 어떤 여관의 이름이 있었고 정해진 날짜 없이 맑은 날에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저는 그것을 읽고서 망설임 없이 헛간에서 오랫동안 쉬고 있던 말에 다시 고삐를 채웠습니다.”

“그 친구란 작자가 말하던 정착이란 것을 확인하고 싶었나?”

“흥, 그럴 리가요. 저는 그런 말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과거에 내렸던 결론이 잘못 됐을 리 없고요. 과거란 내가 지나쳐왔던 길입니다. 바뀌지도 않을 것이고 더럽혀 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내가 있습니다. 이것 그저 그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서, 스스로를 위해 휴가란 이름의 시간을 내어 준거죠.”

“그래서 그 친구란 사람은 만났나?”

“아니오, 하지만 곧 볼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가 정말로 이 마을에 있다면요.”

“그렇군. 얘기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웠네. 잠시 쉬고 있게. 내가 내일 아침거리만 미리 준비하고 나서 같이 나가세나.”


거실엔 아까의 부인은 어디가고 어르신과 어제의 말괄량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의외였다. 저 늙은이는 자신보다 어린 이들과 저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눌 것으로 여겨지진 않았는데. 전날에 느꼈던 묘한 기류 탓에선지 섣불리 끼어들거나 말을 건네기 어려웠다.

 

“자네, 뭘 멍하니 서있는 건가? 어서 가세나”

“아, 일찍 끝났군요. 먼저 앞 장 서세요.”

“그러지, 저 문 밖이 자네가 정말로 아는 그 길이라면 자네가 문 밖으로 발을 못 디딜 이유는 없네.”

“당연한 얘깁니다. 분명 그럴 거고요. 먼저 나가고 나면 제가 문을 잘 통과하는지, 그렇지 못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도 지켜봐주세요.”


문 밖의 시간은 아까와 같은 황혼이었다. 앤빌마는 나를 살짝 곁눈질 하고 그대로 나가서 문 앞에 섰다. 그런데 나를 좀 더 지켜보는 보는 듯싶더니 그대로 길을 따라 가버리기 시작했다. 난 그를 쫓을세라 망설임 없이 뛰쳐나갔다. 분명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아주 작은 순간 뒤의 이미지는 그러했다. 하지만 난 지금 문을 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문을 등지고 서있으며 앤빌마는 어느새 내 우측 어깨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거봐, 멀쩡히 잘 돌아오기까지 하지 않았나.”

“어딜.. 갔었는데요?”

그는 자기 우측 손에 든 채소와 과일들을 들어 보여주었다.

“시장에 갔었군요. 그럼 나..는요?”

“자네는 나를 따라왔지. 분명 시장 앞까지는 동행했지 않았나?”     


<4>     


“농담하지 마세요. 전 여기 있었는데 누가 거기로 갔단 말입니까?”

“그럼 저 밖에서 존재했던 건 자네가 아닌 귀신이란 말인가?”

“아니오. 이곳에 들어오기 전의 저는 틀림없이 저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와 같이 나온 사내는 과거의 망령이지, 자네가 아니란 말이군. 그럼 지금 내 앞에서 있는 자네는 누구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대로 방에 들어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고 누웠다. 수많이 쏟아지는 위화감과 의심들. 무언가가 있다고 느껴지지만 도저히 머리로는 쫓아갈 수 없다. 혹시 자고 나면 다 정상대로 돌아가 있지 않을까라고 기도했던 지난밤은 이미 지났다. 문, 통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계속 머릿속에 그 이미지들을 되돌렸다. 하지만 이미 덧칠이 너무 많이 이루어졌다.  



혹시 그 작은 친구가 몰래 키가 커지는 연금술을 실행 중인가요?’

하하아니에요그는 주기적으로 필요한 자재나 식재를 창고로 내려서 받고 있거든요아마 그 일을 하는 중일 거 에요.’     



다른 문이 있다. 밖으로 통하는 문이 더 있어. 그대로 초를 들고 계단을 뛰어내려오다시피 했다. 그리고 옆 벽에 걸린 그림에서 멈췄다. 불로 비추고 얼굴을 박듯이 뚫어져라 보았다. 몇 번이고 넘어질 뻔 달려가 주방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그렇게 내 시야는 어둡고도 좁게 변해갔다. 커다란 와인통들과 층으로 쌓인 곡식류, 고리에 걸려서 숙성 되가는 고기와 함께 갖가지 식재료가 즐비했다. 또 다른 계단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바깥쪽으로 당겨 올려 여는 형태다. 한참을 낑낑거려보며 등으로도 밀어보았으나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다. 불로 비춰보니 작은 틈이 있었다. 문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심지어 사과도 던져보았다. 그리고 결국 계단에 주저앉았다.


“거기 누구 있어요?”


불을 들고 내려 온 자는 딱히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 밤에 창고에서 혼자 축제 분위기이신 분 얼굴 좀 봅시다.”

“나에요 롬.”

“당신은....... 우리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사이 맞죠?”

“뭐, 그쪽은 곧 나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렸지만 말이에요.”


그는 와인통 하나엔 초를 두고 다른 하나에 걸쳐 다리를 꼬며 앉았다. 나 역시 그처럼 다른 빈 통을 찾아 앉았다.   


“어쩐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죠. 당신도 나처럼 야밤에 목을 축이러 왔나 봐요? 그런 것치고 소란스럽긴 했지만.”

“보여요? 내 뒤의 문”

“네, 그게 어쨌단 거죠?”

“문 뒤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그야, 닫히기 전의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겠죠.”

“새로운 밖이라고 하지 않는군요.”

“저 문은 그저 통과의 경계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혹시, 문을 열 열쇠가 필요했던 거였어요?”

“날 내보내 줄 수만 있다면 열쇠든 해머든 상관없어요.”

“수단이 중요하진 않으신 분이군”

“내가 지금 도달하고 싶은 곳에는 새로운 과정이란 게 무엇이든 간에 의미가 없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그런 과정들로 덮어써지면 안 돼.”

“혼자만 시간을 거꾸로 흐르시나봅니다. 중간 과정이 없는 미래란 없는데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그 미래란 것에는 흥미가 없어서 말이죠.”

“당신, 과거를 쫓고 있는 거군요. 아마도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의 자신을”

“이곳으로 들어온 뒤로는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버렸어요. 내 바로 뒤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시간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돌아볼 수 없는 자는 앞은 물론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죠.”

“그 말은 저번에 들었던 것 같군요. 역시 바우야. 말이 제법 통하는군.”

“내 본명도 알아요? 말했듯이 난 당신이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이것도 인연인데 하다못해 아저씨 이름이라도 알려줄래요?”

“굳이요. 말을 해도 돌아서면 잊을 것을.”

“뭐 어때요. 어차피 돌아볼 수도 없게 됐다면서요.”

“......바우야. 너와 같은. 그리고 이곳의 주인장과 마찬가지로”

“바우가 하나 둘 더 늘어나도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아저씨가 찾는 열쇠는 지금 내가 엉덩이 밑에 있는 통 안에 있어요. 저번에 앤빌마가 이곳에 두고 가는 걸 봤거든요. 당신이 여길 떠나는 건 자유지만 문단속을 잘 하도록 해요. 나도 도둑을 많이 당해봐서 내 일이 아니라도 뭔가가 없어진다는 거에는 진절머리가 나니까. 하실 말이 없다면 전 이만 자러 가봅니다”

“들어가. 아니, 잠깐만 저기 롬”

서로 일어선 채로 난 그의 뒷모습을 봐야했고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뭐죠? 바우 아저씨.”

“바우가 하나 둘 더 늘어나도 라는 말은 무슨 의미지?”


그는 발을 끌어 땅을 직선으로 그었다. 그러다가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주위로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았다.


“.......그저 지금 내 뒤에 누가 있는지를 잊지 마세요. 그리고 당신 앞에 누가 있는지도 놓치지 마세요.”

그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는 중에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어린 친구의 말대로 열어본 통 안에서 열쇠가 하나 나왔다. 망설임 없이 홈에 끼워 넣었다. 분명히 돌아간다. 돌아가긴 가는데, 완전히 돌아가지 않는다. 내 손의 열쇠는 추가 운동을 하듯 반복을 하지만 그 이상의 궤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 열쇠가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끝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난 열쇠를 사용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 걸까. 이번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깊은 절망이 내려앉은 계단 뒤로 온기가 느껴졌다. 문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게는 저녁부터 불과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말이지. 곧 앤빌마가 출근할 시간이다. 아직 포기할 순 없다. 망각이 완전히 나를 침식하기 전까지는 분명 시간이 남아 있다. 분명히....... 분명히 그럴 터인데 지금 난로 앞에 앉아 있는 나와 비슷하게 나이를 먹어 보이는 저 여자는 당체 누구냔 말인가.

 

“좋은 아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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