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선에서 내가 있어야 할 곳
언젠가 그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넌 곧 너의 일생에서 아주 선택받았다고 할 수 있는 특별한 때와 장소에 들어서게 될 것이란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네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답 해줄 수 있겠니 메리?” 할머니는 어렸을 적, 제게 이런 질문을 곧잘 하셨습니다. 쉽지 않은 문제였어요. 골머리를 썩고 있어 분해하고 있던 건 나였지만, 딱히 그분은 정작 나의 답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차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게 더 나를 분하게 만들었지요. 던져진 그물은 껌 마냥 움직이면 할수록, 벗어나면 할수록 더 나를 괴롭혔습니다. 결국 잠시 뒤 난 그녀에게 다가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글쎄요, 아직 선택받지 않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특별한 기회를 얻은 녀석은 어쩌면 할머니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법 그럴싸한 답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대단한 숙제를 해결한 마냥 한껏 으쓱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나의 예상과는 달랐어요. “나도 그리 믿었단다. 내 어느 미래 한 때의 수수께끼는 그 다음의 미래가 답을 알려줄 것이라고. 그랬더니 내 곁에 있는 다른 누군가는 그랬어. 이전의 나였던 과거가 그 길을 이어줄 것이라고. 하지만 끝내 난 그 모두가 잘 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단다. 메리, 넌 답을 찾을 수 있겠니?” 그때 나는 고민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때의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혼자 씩씩되는 아이 정도였으니까요.
1장
<1>
밤이 깊어지자 하늘이 울리는 소리가 납니다. 땅이 흠뻑 적셔지는 중, 말을 탄 채 머리까지 커다랗고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가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처마 밑에 말을 묶어 놓고 문 앞에 섰습니다. 어째서인지 그는 자신의 몸을 때리는 수 만 번의 두드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는 지금 자신과 그리고 그의 앞에 문에만 의미를 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잠시 동안 사내는 문 뒤의 정적조차 들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가 언젠가 저 수수께끼를 깨달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장의 바람대로 그는 어둡고 공허한 세계로 자신을 밀어 넣었습니다.
칠흑은 저 밖과 이 안이 비슷하나 이곳에 발을 들임으로써 나는 달리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내 흰 숨결이 앞에서 길을 만들어 주었다. 허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내 왼 쪽 어깨 뒤로 맨 작은 가방을 뒤적거렸고, 그것을 내 가슴 앞에서 밝혀 피워냈다. 한 손에는 받침 위로 초를 들었고 다른 손으론 앞을 내저었다. 우로 몇 보 돌아 다시 왼쪽으로 꺾었을 때, 내가 처음 이곳으로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온기를 볼 수 있었다. 불어서 초를 끄고 주위를 천천히 살폈다. 앞의 조그만 계단을 내려가면 좌측으론 벽난로와 그 앞은 널따란 탁자 주위로 등받이 의자가 있다. 그리고 더 안쪽으로 방이 하나가 있는데 잘 보이지는 않는다. 우측으론 무언가 어질러져 있는 높은 탁자와 주위로 소파가 있다. 그 뒤로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작은 계단을 내려가기 전 좌우로 난간을 만들어 놓은 게 인상적이다. 채 굳지 않은 초를 가방에 쑤셔 박는 건 오랜 습관이다. 난 조심히 발을 디뎌 내려와 불가에 다가갔다. 이 지역의 우기에는 더운 비가 내리기에 딱히 몸을 녹이기 위해서는 아니다. 다만 이곳이 낯선 나에게 있어, 첫 지표가 밝은 곳에 놓여 있다는 호의에 감사했다. 난 등받이 의자 위의 작은 쪽지를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 눈 보다 더 높은 곳으로 들어 보았다. 이곳 주인의 글인 듯한데, 그냥 아는 사람한테 이야기 하듯 한 문체로 썼다. 내용은 내 이름과 방, 식사에 관한 정도였다. 그리고 저 옆의 방이 주방인 모양이다. 가볍게 훑고 가방에서 완전히 굳지 않은 말랑한 녀석을 꺼냈다. 그리고 위층으로 가기위해 큰불에게서 작은 불을 훔치던 찰나였다.
“정작 길을 잃은 자들이란 방금 땐 자신의 발조차 잊어버린 자들이야.”
뒤돌아보니 어떤 한 남자가 손에 잔을 들고서 반쯤 풀린 눈으로 내가 있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기 있는 분,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에게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다가갔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를 그렇게 지나쳤다. 내일 아침에 다시 인사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계단을 오르던 중, 우측 벽면에 작은 그림이 눈에 띄었다. 어두운 방에서 빛이 들어오는 천장, 그것을 향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손을 뻗고 있다.
“어딘가에 고립된 모양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속의 이는 곧 구원받는다는 표정이 아니야. 오히려, 미심쩍은 얼굴을 짓고 있지. 그 나가는 길이 그가 바라는 답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돌아보니 한 팔을 바닥에 늘어트린 채 소파에 누워있었다. 책상 위에 쌓여있는 잔들을 보니 늦게까지 마시다 방에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뭐라고 대꾸할까 하다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쪽지에 적혀 있던 대로 복도 왼쪽 끝 방을 열고 들어갔다. 방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에 책상과 걸상, 침대 등이 있고 다행이도 옷을 걸어 둘 걸이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열쇠가 노여 있다. 딱히 방에 대해 이렇다 말할 건 없지만,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것은 창이 남으로 나있다는 것이었다. 커튼을 완전히 걷었다. 당분간 저 날씨가 계속 될 것이다. 가져온 초가 많지 않으니 내일 주인에게 여분이 있다면 몇 개 얻어야겠다.
<2>
일어나니 커튼이 반 정도만 열려있었다. 간밤에 비 소리가 시끄러워 스스로도 모르게 일어나 조금 닫았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빛이 적어 실내는 어두웠다. 내려오는 계단 중에도 화로의 불똥이 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제 누군가가 누워있던 자리엔 말쑥한 사내가 손으로 머리까지 올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거리고 있다.
“썩 괜찮은 아침이죠?”
처음엔 그냥 못 들은 줄 알았는데 곧이어 고개를 들어 몇 번 눈을 꿈뻑이더니 다시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난 그를 한참 내려다 보다 돌아섰다. 무언가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니라 생각하곤 화로를 돌아 주방으로 아침을 가지러 들어갔다. 키가 몹시 작고 노란 수염을 길에 늘어뜨린 뚱뚱한 사내가 소시지를 손질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역시 이런 눅눅한 날에는 역시 따뜻한 부어스트가 제격이죠.”
“당신은 그래도 제 인사를 받아주시는군요.”
“글쎄요, 그나저나 당신은 키가 몹시 크군요!”
그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놓고 컵과 함께 김이 나는 레몬티를 따라 주었다. 그러곤 목이 불편했는지 고기를 써는 판 위에 앉아 높이를 맞췄다.
“아까한 말은 농담이오. 반갑습니다, 난 앤빌마라고 하죠. 이곳 주방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못 보던 얼굴이군요.”
“나도 반갑습니다. 바우입니다. 지난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는데 문이 잠겨있지 않고 이곳 주인이 쪽지를 남겨 놓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음, 그가 당신 얘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군요. 반겨주는 이도 없었을 텐데 그냥 들어오다니, 당신은 운이 좋은 편이오.”
난 고개를 살짝 거실 쪽으로 돌렸다.
“아, 저 친구가 밤에 그러고 있는 건 늘 상 있는 일이죠. 아까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건 그인 모양이군요.”
“게다가 왠지 다가가기 힘든 느낌이라서 말입니다.”
앤빌마는 접시에 호밀빵 몇 조각에 길에 썬 부어스트를 얹어 주며 말했다.
“으음. 내가 느낌인데 당신은 저 친구와 궁합이 잘 맞을 겁니다. 물론 주인과는 어떨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 혹시 말을 가지고 왔습니까?”
“예. 어제 밤에 문 앞에 메어두고 왔습니다. 천둥 때문에 이리저리 날 뛸 텐데 밥을 먹고 가보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랬군. 그게 당신 말이었군. 관두십시오. 밖에는 지금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몰아치고 있으니까요. 원래는 말을 넣어 두는 곳이 헛간이 집 뒤편에 따로 있죠. 제가 아침 일찍 이곳으로 오면서 문 옆에 보이기에 그곳으로 옮겨 뒀습니다.”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일단 안심이로군요. 혹여나 말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그 밤에 뭐가 보였을 리가 없죠. 나는 이제 이곳을 정리해야 하니 거실의 아무 편한 곳에서 먹고 접시는 거기 놓아두시오.”
그는 내려와 엉덩이를 털고 린넨을 두른 채로 일에 몰두했다. 잠시 멍하니 그를 보고 있긴 했지만 누구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집중하는 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나왔다. 그냥 멀찌감치 화로 곁에 앉으려했다. 하지만 이내 그저 저 사람이 누구이든, 지난밤에 말의 의미가 무엇이든 알고 싶어졌다.
“같이 앉아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그는 고개를 몇 초 동안 들더니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저 상관없는 소릴 들은 마냥 시선도 맞추지 않는다. 나 역시 따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생각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부어스트 맛이 썩 괜찮았다. 젊은 시절 인도를 갔을 때 먹어봤던 향신료 맛이 났다. 슬쩍 앞을 봤다. 펼쳐진 이 근방의 지도, 물품들 목록을 적은 종이 등이 있다. 이 근방 사람이 아니다.
“아아, 어떤 분이 제 앞에 계셨군요. 아까 누군가 지나가는 것 같긴 했는데 몰랐습니다.”
마시고 있는 잔에서 입술을 때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요즘 할 일이 잔뜩이라 정신이 없어서 말이죠.”
“어제 과음을 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하하 밤의 저를 보셨나 보군요. 하지만 아침의 저는 또 다르니까요. 롬이라고 불러주세요. 이미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행상인입니다.”
“바우에요. 제 고향에서 가게를 하고 있죠. 지금은 휴가차 예전에 일하던 곳을 다시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곳 기후를 몰랐던 건 아닙니다만 정말 재수 옴 붙었죠. 참, 당신에게 할 소리는 아니군요.”
“오히려 이곳 지형이 만들어낸 기후가 재미는 주는 점도 있죠.”
“그건 무슨 뜻이죠?”
“이곳에선 겨울에 가죽을 구하기 힘들어 가격을 높게 부르는 편이죠. 하지만 아래쪽에 로란산맥 이남으론 질 좋은 가죽을 좋은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두 지방은 높고 긴 산맥으로 떨어져 왕래가 없다시피 하지만,(노인의 말은 다르다) 다시 말하면 그 사이로 물건을 옮길 수 만 있다면 이만큼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일도 없다는 말이죠.”
“문제는 그 길이겠군요.”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태초에 누군가는 다녀간 길인데 설마 방법이 없겠습니까. 사실, 저만 아는 산맥을 통과하는 비밀 길이 있습니다.”
“글쎄요. 그렇다면 가능하다 할 수는 있지만 아직 그럴 만한 계절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 건을 크게 터트릴 생각이라면 벌써부터 준비하기 보다는 그동안 다른 거래를 하면서 자금을 모아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전혀 빠르지 않습니다. 아저씨도 장사를 한다면 아시지 않나요. 자고로 장사꾼은 때를 잘 맞춰야 하죠.”
감아버린 태엽 같다. 그렇게 이 녀석은 자신이 어떻게 장사를 배워 시작했는지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독립하게 되었는지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이 친구의 것과 같이 내 잔을 채우려 일어났다. 딱 그 순간이었다. 내가 자리에 서자. 그에게서 흘러나오던 말은 고장난 태엽처럼 멈췄다. 한 동한 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오늘 아침 그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잠시 후 그는 펜을 잡고 다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 테이블에는 자신 이외의 인간은 없었다는 듯이. 빵 두 조각을 남았으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화로로 와 앉았다. 그제야 오늘 주인에게 초를 빌리기로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스스로도 이해 못한 허전함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계단 아래로 누구랑 그렇게 즐겁게 꽃을 피워내실까?”
뒤로 계단을 내려오는 젊은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3>
“일어났어? 그게, 누가 지나가는 줄 알고 잠깐 내 소개를 했는데 결국 아무도 아니었어. 너 지금 내가 바보 같다 생각하지?”
“글쎄, 넌 원래 살짝 멍청이였으니까 딱히 이상해 보이진 않는데?”
그녀는 계단 마지막에서 발을 헛디뎌 무릎을 찍었다.
“아쉽네. 머리를 박았으면 했는데.”
“미안하지만 날 절대로 얼간이 듀오엔 끼우지 말아줘. 저기 롬?”
“왜? 부축이라도 해줘?”
손가락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일어났다.
“아니, 너한테 그런 걸 기대할 순 없지. 혹시 아침에 얘기를 나눴다는 사람이 혹시 저 분 아니야?”
“뭐? 어디?”
“저기 화로 앞에”
“거기 지금 누가 있어?”
“내가 잘 못 봤나봐. 아무것도 아냐.”
지금 그녀의 눈에는 내가 비치지 않는 모양이다. 접시에 남겨둔 빵조각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대로 턱은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생각이 떠오를 찰나 문이 나를 불렀다.
“안녕, 들어와도 좋아요.”
“좋은 아침이에요. 선생님”
그의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놔주었고 난 침대에 걸터앉았다.
“친구는 어디에서 오신 누구죠?”
“전 플립이에요. 오른쪽 복도 끝에 방에서 왔어요. 할아버지를 대신해 전해드릴 말이 있거든요.”
“너의 할아버지가 누구시지?”
“이곳 우주먼지 여관의 주인이세요. 원래는 할아버지가 직접 손님 대접을 해드리는 편이에요. 하지만 오늘과 같이 새벽 일찍 볼일로 할머니와 같이 자리를 비우시면 그럴 수가 없죠. 그래서 제가 대신 무언가 필요하신 게 있는지 여쭈러 왔어요.”
전혀 낯선 이름인데. 이런 여관이 전에도 있었나.
“아마 다른 볼일들로 이곳을 한 번씩 비우시는 모양이구나. 그럼 그분께선 평소엔 어디 계시니?”
“앤빌마 아저씨가 이곳에서 많은 일을 도맡아 하시기 때문에 사실 할아버지가 특별히 하는 것은 많지 않아요. 그래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보통 서재에 계세요. 혹시 벌써 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복도 끝을 지나면 있는 방이 서재에요. 할아버지가 특별히 아끼시는 공간이죠. 뭐 필요한 건 없으세요?”
“그럼, 며칠간 방을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아 낮에도 쓸 초가 필요한데 좀 가져다 줄 수 있겠니?”
작은 아이는 영문을 알 수 없게 키득거렸다.
“아, 죄송해요. 그 밖에 다른 하실 말은 없으시고요?”
“이젠 됐어. 아, 맞다 플립.”
“왜 그러시죠. 선생님?”
“이곳에 머무르는 젊은 친구들에게 좀 이상한 부분은 없니?”
“정확히 어떤 부분이 말씀이죠?”
“뭐랄까, 연결점이 있다고 하지만 아직 불완전하달까. 그들과 나 사이에는 아직 충족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듯 말이지.”
“먼지 거인이네요.”
“먼지 거인?”
“자신을 지나치게 큰 존재라 믿기에 무엇이든 보고 들을 수 있다 생각하지만, 그래봤자 넓은 우주에선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할아버지가 종종 하시는 말이에요. 말이 통하지 않아 꽝 막힌 내게 쓰는 말이죠. 하하”
<4>
대충 집으로 부칠 편지를 다 쓰고 보니 구름 사이가 제법 벌어지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다시 내려 온 일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까 점심때는 일부러 이것을 남겨두었다. 오른 손에 들고 있는 빵을 봤지만 사실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제 밤부터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니 이 정도로 양으론 그 커다란 녀석을 잠시 달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문손잡이를 당겼다. 순간 시야가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 벽을 짚었다.
“이봐요.”
그 잠깐 동안, 문이 커다란 유리처럼 보였으며 거기에 내가 비치는 듯 싶더니 이내 다른 모습들로 바뀌어 갔다.
“이봐요.”
저건 내가 아니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곧 문을 열지도 모른다.
“이봐요 괜찮아요?”
앤빌마가 내 팔을 움켜잡으며 흔들었다. 이상하다 주위가 어둡다.
“걱정말아요. 별거 아니에요.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밖에서 무슨 고생이라도 하고 온 겁니까?”
“밖이요? 아직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막 말을 보러 나가려던 참이거든요. 먹이를 주지 않으면 그 녀석이 어떻게 난폭하게 변할지 모르니까요.”
“내가 지하 창고를 정리하고 올라 올 때 당신의 뒷모습을 봤습니다만, 그런 농담을 진지하게 하는 거 보니 멀쩡하지 않은 듯 하군요. 방에 돌아가 쉬세요. 난 이제 퇴근해야 합니다. 오늘은 일이 많아 좀 늦었군요. 말이라면 걱정 마세요. 아침에도 챙겨줬고 내가 갈 때도 한 번 보고 갈 테니까요.”
“그럼 가는 길에 나랑 같이 가면 되겠네요.”
“아까 내려오면서 말을 보러갔던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라니까요”
“허 참, 하여튼 보려면 내일 아침에나 봐요. 오늘은 이미 늦은 듯 하니!”
“늦었다니요?”
“벌써 깜깜하단 말입니다. 해가 졌어요. 이미!”
그러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받아들일 수 없는 심상에 사고는 잠시 정지를 받았다. 몸도 멈춰 버렸다. 그의 말대로 밖은 어둠이 맞았다. 그렇게 나는 오늘 이 집에서 나가지 못하고 문에서 돌아섰다. 벌써 오늘에 몇 번이고 올라가는 계단에서 나는 왜 아까 전 그 문을 열어 다시 진실을 확인하지 않았나 하고 몇 번이고 되뇄다.
“우리는 그저 볼 수 있는 것을 보되, 맞지 않는 눈높이는 도리어 상대방을 희롱하게 될 뿐이지.”
뒤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술에 쩔은 녀석 하나. 내 지난날이 녀석과 같았음을 생각해보면 지금 내 모습이 어찌나 다행인가 생각해본다. 나 역시 무작정 앞으로 가던 시절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내 최종 목표는 정착이었다. 아니, 모든 행상들의 꿈이 그러할 것이다. 잡생각이 나는 거보니 나도 아직 마음으론 완전히 멈춰 서지는 못한 모양이다. 어둠이 자리 잡은 복도에선 오직 복도 끝의 방 만이 그 빛을 빼앗기진 않은 듯 했다. 필시 그일 것이다. 서재는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문은 이곳에 있는 보통 나무문이 아니라 불투명한 유리로 돼 있다. 열기 전 너머는 보려 해도 볼 수 없을 듯 했다.
“아직 이곳이 낯선 손님이로군.”
발이 경계를 넘자 그의 등이 내게 말을 걸었다. 천천히 걸음을 앞으로 옮기며 주위를 살폈다.
“어찌 낯선 사람이란 걸 안 거죠?”
“자네의 걸음걸이와 숨소리를 들었지. 마치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까지 이공간과 시간에 아무런 기대가 없었던 사람처럼 느껴졌네.”
“당연히 그렇겠죠. 저는 여기가 처음이니까요.”
“자네에게 당연한 것은 과거뿐일 텐데 어찌 이곳에서의 미래조자 당연한가?”
바우는 노인의 말에 당황했다. 그리고 곧이어 얼어붙은 입을 깨트리듯 토해냈다.
“마치 저를 아시는 것처럼 말하시는 군요. 어르신, 저는 현재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 눈에 보이는 것은 과거의 증거들뿐이고요. 제가 말한 당연함은 앞으로 닥칠 일이 아닌 과거로 비추어낸 지금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건 언뜻 보면 말장난 같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지. 우선 자네는 미래란 것을 애써 인정하려 하지 않아.”
“그게 뭐 어때서 말입니까.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것들을 뭐 하러 생각해 본단 말입니까. 그런 것들은 제게 어떠한 기준도 되지 못할 겁니다.”
“그만, 밤이 늦었네. 이만 자게.”
불투명한 유리문이 다시 열리고 닫혔다. 와 닿는다고 할 수 없다. 애초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하지만 없다 할 수 없다. 무언가가 나를 향해 부딪히고 조금씩이나마 호소하고 있다. 다만 나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지금은 알아 챌 수 없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땐 책상에 쪽지와 초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이 부탁하신 초를 찾아 다시 들렸는데 계시지 않아 그냥 이렇게 두고 가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실례가 될까봐 아깐 여쭈지 않았는데 요즘 같이 볕이 잘 들어오는 날씨에, 하물며 낮 동안에 굳이 커튼을 치고 초를 키시려는 이유를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