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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스러운 곰 Jul 24. 2021

깨진 가면은 뜨지 않는다 4장

다시 교차.

<13>     


어쩌면 그와의 싸움은 그의 이중적 잣대를 무너뜨리는 게 목표였는지도 모른다. 주도권 경쟁은 애초에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누군가가 크게 실수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예상되었던 그의 반응은 언짢으면서도 묘한 쾌감이 들었다.


“그래, 일전에도 얘기했듯이 자네가 이곳에서 충분히 혼자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졌던 것이 검사를 올바르게 하는 데에 도왔을 거라 생각하네.”

“제 생각도 같습니다.”

“혹시 말이야. 이러한 검증을 받는 과정에 대해서 알려 줄 수 있겠나? 혹시 이러한 일이 다음에도 있을 법해서 말이네. 그러니까, 예를 들어 피검사자가 이러한 항목들에 대해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 지 말이야.”

“...제가 가져온 결과지가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잠재적 구원자의 표상은 이제 이대로 한 발자국 물러날 것이다. 심지어 그것조차 그가 계산해둔 예상경로 중 하나겠지. 그는 자신에게 있어 투자되는 가치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를 떠보고 간헐적으로 시험에 들게 했고, 모든 일이 끝나기 전에 날 자발적으로 굴복시키고자 했다. 그럼에도 단지 내가 유리한 패를 들고 왔다고 해서 그가 동요할 필요는 없다. 그저 원하지 않는 결과에 언짢을 뿐.


“여기 나와 있는 이 부분 말이야. 진짜로 확실한가? 전에 나와 상담할 때에는 이러한 얘기는 없었지 않나?”

“‘상기 대상자에게 나타나는 이상은 그가 지난 기간 동안 속해 있던 기관과 그 환경에서 악화된 것으로 보여 짐’ 이것 말씀입니까? 그들의 소견입니다. 제가 특별히 개입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요. 제 부모와 얘기를 나눠보셨다면 소장님도 일부 동의하시는 부분 아닙니까?”

“아니, 그래도 말이야... 어찌 그래도 책임의 방향을.. 으음”

‘마음에 들지 않아’라는 표정이다. 그럴 테지, 그가 가장 우려해왔던 부분일 테니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서 원치 않는 책임에 발목을 잡히는 것, 똑같이 당해보니 기분이 어떤가?

“알았네. 그만 나가보게”


돌아온 이곳의 분위기는 전과 비교할 때 사뭇 달라져 있다. 물론 내가 체감하는 것이 단순히 내 뿌리를 흔들면서 찾아온 기분전환 때문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계속 나의 변화를 주시하던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내가 없는 동안 새로운 정보를 접한 것이다. 일일이 확인해볼 필요도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의 의사와도 상관없이 형성된 가상의 리벨이라는 인물은 앞으로 스스로 자신의 공간을 넓혀갈 것이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새로운 리벨이라는 인간이 가진 표상은 시키지 않아도 각자가 만들어 내고 만다. ‘리벨은 사회로부터의 간섭과 보호가 드디어 이곳으로부터의 영향력으로부터 그를 완전히 해방시켰다 ’ ‘그는 몇 차례의 검증을 통해 신뢰성 있게 자신의 이곳에서의 가치가 없음을 증명했다.’ ‘곧 그는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가 부여받자마자 이곳을 떠날 것이다’ 날 저주하기 위해 그들이 몇 번씩이나 마음속에서 되새겼을 일그러짐은 어찌 보면 사실 그들이 가진 서러움을 덮기 위한 분노였음을 안다. 


“요새 이곳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소. 정확히는 나도 그 동안 한 번씩 얼핏 들은 게 있으니 꽤 전부터 있었던 얘기 같소. 물론 난 그저 우스갯소리 따위로 믿지만. 그런 말을 일일이 다 믿다간 여기가 어디 사람 사는 곳이라 믿을 수 있겠소?”

“어찌 보면 비일상적 소재가 때론 삶에 활기를 불러올 수도 있지, 특이 이곳처럼 새로운 무엇을 기대하기 힘든 데에선 말이야”

“뭐 그렇긴 하오. 요새 겨울 준비가 한 창이라 일이 많아지고 다들 예민해지니까 오히려 그런 말들이 더 많이 나오는 것 같소.”      

“그래, 그래서 요즘 떠돈다는 그 기이한 소문이라는 게 뭐냐? 윗적 중에 누가 전출이라도 보내 진다더냐?”

“흐흐 그런 얘깃거리가 나와도 나쁘지 않겠군.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얘기가 아니오. 그... 이상한 소리가 들린답니다.”

“이상한 소리?”

“화장실 잠긴 안쪽이나 잘 가지 않는 창고, 어두울 때 건물 외곽에서 누가 맞는 거나 때리는 소리가 난다는 거요. 그때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요즘은 워낙 잦아서 들은 놈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하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러한 티가 나는 일이 윗적한테 들어가면 어찌될 줄 알고. 하고 무시했는데..”

“..무시했는데?”

“요즘에는 보면 곳곳에 바닥이나 벽에 혈흔이 남고, 어쩔 때는 붉게 물든 연장들도 더러 보인다는 거요. 섬뜩하지 않소?

“확실히 그게 이곳이라는 전제를 생각하면 묘하게 겉으로 많이 드러나는군. 이미 윗적들도 이에 대해서 알고 있나?”

“아직 무슨 조치가 없는 것으로 봐서 상황을 알아보고 있는 중인 것 같긴 한데 어차피 조만간이지 않겠소?”

“너는?”

“나 말이오? 난 직접 본 바는 없소. 사실... 짐작 가는 놈은 있소”

주위를 빠르게 살피고 몸을 그 쪽으로 붙여 모은 뒤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며칠 리벨은 나가있어서 당연히 몰랐겠지만, 트레이스는 그 동안 쭉 이곳에 갇혀서 지냈소. 그게 한 동안은 계속 조용히 지내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좀 행동이 많아지던 거요. 이곳에서 무조건 열외를 받은 놈이 움직여봤자 거기서 거긴데 뭐랄까 태도가 변했다는 거지. 실성한 것처럼 혼자 실실거리기도 하고. 무슨 힘의 원천에서 동기를 얻은 마냥 말이오. 난 그 놈을 보고 대체 무슨 낙이 있다고 저럴까 그랬었는데... 쉿, 이건 엿들은 놈이 전해준 예기라 확실하진 않은 정보요. 새로운 증명의 안건으로 트레이스의 이름이 그저께 간부회의에 올라왔다 하오.”

“그가? 혹시나 하고 했었다만”

“하지만 가능성은 그다지 없다 하는 것 같소. 뭐라나, 그의 현재 상태가 심사 판정을 내리기에 저 밖에 규정된 예시에 없어서 이쪽의 재량이 필요하답니다. 원래라면 조건 미달인 셈인데 길을 찾으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 아니겠소.”

“그렇군...”

“어찌 보면 가엽소. 리벨은 이제 소장이 뭐랍니까? 선택권을 주겠답니까?”

“내게 애초에 선택이란 것이 있었더냐. 나는 요즘처럼 가치란 것이 스스로 거대하게 살아 숨 쉰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그저 자신의 안에서만 머물러있다 떠나가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내가 그것에 집어 삼켜지고 있다 생각하니 무서워.”     


<14>     


우리가 지내는 건물 뒤로 돌아가면 작업도구를 모아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창고가 있다. 그 옆으로는 지금은 쓰지 않는 오래된 간이 화장실이 두 개 붙어있다. 모두가 일과를 위해 낮에 건물을 비울 때, 나는 몰래 내려와 창고 안에 무엇이 담긴지도 모르는 박스 위에 앉아 한 대를 태웠다. 그리고 나오다 화장실 쪽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목발을 집고 걸음을 옮기는 그와 마주쳤다. 간부라도 맞닥뜨린 것 마냥 그는 태우던 것을 재빨리 밟아 껐다. 그러고는 이내 나인걸 알고는 한 쪽 입 꼬리를 올렸다. 듣던 대로 표정은 전보다 훨씬 좋군.  


“여, 부럽구만. 이번에 소장을 포함한 윗적들의 콧대를 확 꺾은 모양이던데?”

“친한 척하지마. 네 입으로 방금 내뱉은 말은 전에는 나올 수 없는 단어였어. 알아?”

“딱딱하게 구는군. 뭐, 인정하지. 인정한다고. 나도 이제 내 주제를 아는데 여기까지 와서 어설픈 짓거리는 더 안 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난 너랑 단 둘이만 있을 기회를 보고 있었어. 참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그 증명이란 것이..”


얘기를 듣다 말고 그의 뒤로 몸을 쓱 내비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아무 표정도 없이 그저 나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눈에 비친 그의 모습에 그 동안의 정리해온 생각과 복잡한 심정이 순식간에 교차했다. 


“야, 너.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해? 한 동안 계속 안 보여서 네게 뭔 문제가 생긴 줄 알았잖아.”

“뜬금없이 뭔 소리야. 무섭게 왜 다가와?”

“너 말고 뒤에. 비켜 인마”

그는 대꾸하지도 않고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어?, 어? 야! 잠깐만”


그때 2층 창문을 통해 호루라기가 불렸다. 간부 중 하나가 손짓을 하며 크게 소리며 트레이스를 불렀다. 


“젠장, 내가 하던 얘기 안 끝났어. 너 어디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어떻게든 빠르게 가려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뒷모습을 보고 나서 뒤 돌아섰다. 그는 이미 나와 내 뒤에 서 있었다. 

“벌써 너와 내가 만나고 나서 계절이 변했군. 더 이상 너희 쪽 화장실도 우글거리지 않을 테니 더욱 우리가 마주할 일이 없었던 거군. 아, 저번에 방을 옮겼다고 했었나?”

“안녕 마플? 

“그래,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 동안의 꿈으로 그에게 선뜩 무슨 말을 꺼내기는커녕 제대로 마주하면서도 몸이 떨리고 있었다.

“넌 이미 알고 있지 않아?”

“아... 한 동안 네가 보이지 않아서 은밀히 무언가라도 준비하는가 생각 했어”

“네 눈은 항상 나를 쫓고 있지. 하지만 머리로 한 번 그린 시점에서 그 자리엔 나는 사라지고 없어.”

“네 보물은 어때? 여전히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가지고 있어?”

“음 굳이 뭐 하러 물어보지? 정히 궁금하면 네 것이나 신경 쓰지 그래?”

“내... 것이라니?” 

“이봐, 리벨! 너도 호출이다. 얼른 올라 가봐.”


2층에서 트레이스가 소리 지르는 소리였다.


   “사실 최근에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생겼어. 저기 성가신 녀석은 트레이스란 놈인데, 상대하면 귀찮은 놈이니 혹시 말이라도 걸면 그냥 무시하고 있어도 돼. 얼른 돌아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줘”


계단을 뛰어올라가면서 가볍게 웃고 한숨을 쉬는 그와 눈빛만 교환했다. 그리 큰일은 아닌 모양이다. 간부는 할 얘기가 있으니 일단 자리에 앉으라 했다. 사실 다른 생각에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거듭해서 내게 혹시 최근에 떠도는 이상한 소문의 대한 출처와 그 진상에 관해 아는 바가 없냐고 캐물었다. 나는 시종일관, 그런 이야기를 믿지도 않으며 며칠 내가 이곳에 없었기 때문에 그에 관해 들어본 바도 없노라 라고 했다. 창문을 통해 아래에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내려갔을 땐 트레이스만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왔어? 끈질기게 캐봤자 답을 들을 수도 없는데 그 놈들도 고생을 하는군. 왜 그리 숨이 가빠? 뛰어올 것 까진 기대하지 않았는데 너도 역시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

“다른 한 녀석은 어디 있어?”


마치 시간이 느리게 가는 양, 내 머릿속에서 남아있는 그림의 잔상을 쫓는 양. 고개를 저었다. 그는 창고를 향해 느리고 가벼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 이상 더는 그를 잃어버리면 더는 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날 앞으로 가지 못하게 내 팔을 뒤에서 잡은 그를 향해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야! 어디가게? 내 얘기 아직 시작 안 했어”

“너랑 더 할 이야기는 없어”

“저 창고에는 왜? 혹시 거기 네 비밀이라도 있나?”

“뜬금없이 개소리하지 말고 이거 놔!”


그는 더 강하게 움켜쥐며 정색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모른 척 하려고? 이곳에 떠도는 가치파괴의 소문 말이야. 너도 불려가서 얘기 들어서 알겠지만 지금 윗적들도 들썩이고 있다.”

“난 흥미 없다고 했잖아!”

“자꾸 이런 태도로 나온다면, 나도 할 수 없어!”

“귀찮게 하지 마. 너도 여기에서 그가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을 거 아냐?”

“봤지, 네가 그 동안 저런 은밀한 곳에 숨어서 무슨 짓을 벌여왔는지 말이야.”

“...무슨 말이야?”


그는 내 귓가에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난 정말로 네 증명의 비법에 흥미가 있어. 이건 네게 사실 부탁하고 있는 거야. 나도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는지 몰라. 그런데 이것 외에 내게 길이 없어. 스스로도 가치를 선택할 수 없는 길에 고립돼 있다면 모든 것을 떠안고 더러운 육신을 건지는 짓이라도 자행할 수밖에 없잖아! 제발 답해줘! 찢겨진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비결이 대체 뭐야? 내가 했던 생각이! 내가 벌인 일들이! 나를 쫓아와 가만 놔두지 않아... 어떻게 그러고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지?!” 

“거기 리벨 아니오? 무슨 일 있소?”

“칫”


한 번 째려는 보지만 생각보다 순순히 돌아선다. 


“흠, 저놈이 또 리벨을 귀찮게 한 거군. 하긴 저 놈도 이제 생각이 많을 거요. 이제 와서 뭔가 해보려고 리벨 주위라도 기웃거리려는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리벨을 잡고 매달려도 무슨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고, 음.. 실제로 와서 보니 느낌이 섬뜩하구만. 이런데 있지 말고 그만 갑시다.”

 “그래..”


한 번 곁눈질로 안쪽을 보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15>     


저녁에 일과가 다 마무리 된 후 모두가 다 복귀해서 돌아왔을 때 나는 본격적으로 그를 찾아 나섰다. 전에 그가 지내던 방으로 가봤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누구를 찾느냐고 했지만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지나갔다. 잠시 자리를 비운 건가 싶어 저번에 그가 기대어 서있던 창문으로 갔다. 눈이 오는 것 외에 보이는 그 길은 여전했지만 그는 없었다. 그와 맨 처음 만난 화장실부터 건물을 다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건물 뒤의 창고로도 가봤지만 역시 없었다. 한 대 피우면서 오늘 따라 더욱 선명한 연기를 따라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만약 이곳을 나가게 되더라도 그 후의 일도 생각해 두어야 했다. 이곳에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 그리고 내 앞으로 가지게 될 저 밖의 가치. 내 증명이 가지는 무게. 사실상 진실이 아닌 것들. 그리고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숙명., 바닥에 드문드문 있는 검은 자국을 보고 오싹한 느낌을 받으면서 그제 서야 그가 방을 옮겼다고 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를 다시 찾기엔 스스로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기에 할 수 없이 방으로 복귀해야 했다.


“휴, 오늘 대체 바위 몇 개를 들었다 나른 건지 모르겠소. 아까까진 허리가 너무 아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소. 아직 마무리까지 해야 될 게 많은데 눈도 오기 시작하고 큰일이오. 앞으로 몸이 성치 않은 자들이 많이 속출할 거요.”

“그래, 고생 많았다.”

“왜 이리 비효율적인지 모르겠소. 분명 사회에서는 더 낳은 방법을 가지고 단위시간대비 확실히 뛰어난 결과를 만들어 낼 거요. 하지만 여기선 그런 의지가 보이지 않소.” 

“이보다 더 효율적일 수도 없지. 노동력에 대한 대가의 지불이 거의 제로가 아니냐. 먹여주는 거랑 재워주는 것만 제외하곤 말이야.” 

“아니면.. 정말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닐 수 있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잡념이나 욕심과 이곳을 뿌리로 두는 않는 가치를 만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긴장시키고 우리끼리 자발적으로 경계하게 만드는.. 여기를 그런 곳이니까 말이오. 그런데 뭘 그리 보시오? 또 저번처럼 뭘 씁니까?

“이번에는 공책에 옮겨 둔 말을 보고 있다. 옛날에 내가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음.. 어디보자. 그 그림은 뭐요? 길쭉한 타원형이 금이 간 것 같기도 하고 구멍도 있고.. 깨진 달걀 아니면 거울 같소.”

“글쎄, 나도 어찌된 건지 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계속 생각 중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리벨 말이오. 뭘 잃어버리기라도 한 거요? 아주 건물을 쥐 잡듯 뒤지고 다니던데?”

“‘잃어버렸다’라..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지. 누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를 찾고 있었다.”

“호오, 난 리벨에게 날 제외하고 또 친구가 있는지 몰랐소. 혹시 나도 안면이 있는 자요?”

“눈에 띄는 놈은 아니니 잘 모를 수도 있다. 여름 즈음에 서편의 방에 있다가 얼마 전엔가 방을 옮겼다고 하더군.”

“오호? 방을 옮겼다는 점은 리벨이랑 똑같군. 그 친구가 얼마 전에야 옮겼다는 게 다르지만. 근데 이제 와서 뭐 하러 방을 이동 한 거요? 최근에 누가 옮겼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하여튼 뭐 다른 특징 같은 건 없소?”

“나도 딱히 친한 건 아니라 잘 모르는데, 여름 즈음에 괜히 서편 화장실을 두고 우리 쪽에 와서 쓴다던가, 아니면 창틀에 기대서 자주 바깥을 보고 있는 다던가, 아니면 혼자 생각에 잠겨 빙빙 걷는다던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토스가 크게 웃음이 터졌다. 벽을 쿵쿵치는 것까지 저번에 웃던 모습이랑 비슷하다. 

“너도 참 별난 놈이야. 웃을 부분이 어디에 있다고.”

“리벨! 잠시 나를 따라오게. 해야 할 얘기가 있으니”


평소엔 건물을 잘 돌지도 않고 자기 사무실에만 박혀 나오지 않는 덩치 큰 사내가 굳이 찾으러오다니. 덕분에 침묵과 함께 주위의 시선이 고정됐다. 옆에서 아까까지 웃어대던 놈도 진정하고 앉아 시선을 번갈아가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일 아침이다. 마지막으로 월을 만나게 될 거고.”


내게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투는, 오히려 내가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그의 늘어난 침묵은 바로 나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이었으니.


“솔직히 지금 자네의 심정을 묻고 싶네. 이제는 그 오래 닫힌 입을 열 때도 되지 않았나? 구태여 지난 자네의 과정들에 대해 물을 생각은 없네. 그저 감상이 듣고 싶을 뿐이야. 감각을 잃는 다는 것은 스스로 그 공간에 있는 자신을 숨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네. 자네는 어떻지?”


나는 무엇이 일어나도 그 공간에 없는 존재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스스로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전의 내가 믿는 나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했고 또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아야 했다.


“숨기지 못합니다. 나에 대해 어디 있냐고 스스로 자문 한다면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여기에 있다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미쳐 다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결국 어딘가로 도착해 있었습니다. 스스로 사고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보이는 세계가 달라져 있고요.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떠올리려는 사이, 시간의 지나 비슷하지만 역시 다른 새로운 과거가 덮어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전과 다른 가치를 지닌 자신은 과거의 자신에 대한 배반이군.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야. 인간은 미래를 볼 수 없다. 일부 과거의 순간들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급급하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지. 스스로를 돌아볼 땐 그 역시 그 과거의 시점에선 새로운 미래의 세계가 돼버리고 마니까. 자네에게서 가치 증명의 역설에 대해서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고 마지막 상담에 응해줘서 고맙네. 안녕히 가게”    


초등학교 때였다. 어느 수업시간 때 나는 앞에 있는 호소와 전달에 흥이 멀어지고 흔들리는 커튼과 바깥에서 들어오는 꽃향기에 취해 그저 . 그러다 그녀가 그런 나를 발견하고 다른 아이들을 환기했던 모양이다. ‘얘들아, 여기에 바다로 혼자 여행을 떠나 망망대해에 길을 잃은 미아가 있구나. 모두가 말을 듣고 그녀의 시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잠시 후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장이시여, 지금 어디를 항해하십니까?’


고개를 돌려 가볍게 웃으며 손들고 대답했다.


‘선생님, 여기에요. 저는 여기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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