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교차
<9>
아침부터 낮 시간까지는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전에도 선례로 이곳의 궤도에서 벗어난 이탈자들을 몇 번 목격해봤으니 내가 곧 어떤 취급들을 받게 될 지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본인이 직접 그 세계에서 실감하는 건 역시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지나가는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했다. 내 동선을 조정하는 것이지만 사실상 그 자체가 무서워 숨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 눈과 귀는 이때부터 멀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을 보면 훨씬 그 전부터 상황에 던져진 걸 수도 있다. 이날 오후가 좀 넘어서 소장이 다시 면남을 위해 불러냈다. 그는 내가 다음 증명 기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은 이곳의 정서와 맞지 않는 특별한 처사이며 힘쓴 배려를 통해 나온 결과라고 거듭 강조했다. 어찌 보면 네가 이곳에서 가질 수 있는 권리 중 하나이며 넌 지금 이곳에 있는 신분 상 당연히 그런 호의가 위배됨에도 지금 자신은 응당 베풀어 줄 수 있는 식으로 떠들어 댔다.
“넌 어떻게 되든 내 자식이나 동생 같은 존재이니까 말이야”
웃기게도 논리가 맞지 않음에도 그것을 보충하는 방식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의 무조건 수용이 강요 돼 있었다. 자신이 내린 명령과 권한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내 입장에서 서면서 이해해주겠다니. 따지면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렇기에 소장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지금 나의 마음이 이미 이곳과 돌아섰다고 확신하고 있다. 나의 편을 들어줘서 내가 만약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의 생각에 가만히 동조를 한다면, 그는 소위의 목적을 달성했다 여길 것이다.
“리벨, 네가 이번에 들고 온 이 종이에 적힌 바에 대해 말해보라면, 하겠나?”
그저 떠보는 말이다. 그가 정말로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이 내 증명과제에서 객관성의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말을 아낄까하다가 그러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시다시피, 저에게 아직 확인해야 할 절차가 남은 것으로 압니다. 아직 지금 선에서는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이 한마디로 그의 표정이 적대적으로 변했다. 굳이 의사를 드러내는 말에서 나의 주장을 밝힐 필요는 없다. 그에게 있어서 중립적인 모호한 답이란 이곳 모두의 뜻에 반하는 다른 가능성을 내포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팔짱을 끼고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그렇군, 혹시 나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생각나면 면담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러고 의자를 뒤로 밀며 허리를 세우다가 가볍게 던졌다.
“결정 난 바가 없으니 그때까지는 제 가족에게는 얘기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번에 보니 괜히 걱정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소장은 이미 흥미가 없는 마냥 돌아서서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러곤 종이에 적힌 내용과 면담했던 대화의 내용에 관해선 곧 간부회의에서 거론 될 것이라고 얘기하고 필요한 조치는 취해줄 것이니 그만 돌아 가보라고 했다. 계산이 많아 득실에 대해서 인지가 명확한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딱히 꼬투리 잡힐 만한 것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방으로 향하던 중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는 트레이스와 마주쳤다. 왼쪽 다리를 붕대로 감고 무릎에 패드로 고정하고 있었다. 처음 그의 눈빛을 봤을 때 그것이 이전과 같지 않음은 즉각 알아 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토스가 아침에 한 말이 무슨 의미이었는지, 그리고 녀석의 지금 처지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 돌아왔다고 들었어. 듣기론 네게 증명의 기회가 주어졌다지?”
“네 말에서 전에선 느껴지지 않던 여유가 느껴지는 군. 주변을 적으로 만들던 위선이었던 연기는 이제 끝난 건가?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괜히 찔러보는 것이라면 그만 둬. 날 너와 동급 취급한다면 곤란해. 난 그저 단순히 일시적 장애를 앓고 있을 뿐이야.”
“아, 그러셔? 나와 굳이 너의 차이를 만들기 위해 말장난이나 하는 게 더 쓸데없는 짓이지. 그리고 네 생각만큼 일이 그렇게 일시적으로 풀리지도 않을 거야”
“어찌 되든 내가 이곳에 있을 시간을 생각하면 짧은 시간이야. 트집은..”
“그래? 그럼 어디 네가 그 시간들을 견뎌봐. 한 번도 그런 입장에서 서보지는 않았을 테니 기분이 그리 유쾌하진 않겠군. 아니지, 오히려 그동안 그런 자들을 경멸해 왔으니 오히려 더 잘 이해할라나.”
“야! 너 이것만 알아둬. 난 너랑 달라. 생각이 가지고 있는 본질부터가 다르다고! 알아?!”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아니 잠시 그렇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스스로 안으로 도망치면 나를 둘러싼 세계의 위협으로부터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피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말이야”
그러곤 대답도 듣지 않고 방으로 들어와 드러누웠다. 그리고 저녁은 돼서야 토스가 저녁을 먹기 위해 흔들어 깨우기에 일어났다.
“하루 종일 뭐하고 보냈소? 낮에 일하는 동안 간부들이랑 친한 놈들 몇을 찔러봤는데, 대충 듣기로도 리벨은 차별적 제외를 피할 수 없을 듯하오. 누군 부럽다는 소리도 하던데, 참고 버텨야 하는 본인이 제일 잘 알지. 그렇지 않소?”
“너 말이야, 전에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었던 적이 있지? 네가 답해봐. 어째서 내가 앞으로 문제를 겪을 것 같지?”
“날 시험해 보는군. 뭐 어떤 식의 대답을 원하오?”
“내가 지금 겪는 혼란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어.”
“흠, 말은 안했지만 그 동안 생각하며 느끼는 것이 많았나 보오. 쉽게 말할 단어가 생각이 나질 않는데 정리해보면 근본적으로 리벨과 시회 사이의 가치에서 마찰이 온 거지 않겠소?”
“계속해봐”
“근본적으로 접점이 맞지 않소. 리벨의 상태는 이 통제사회와 저기 사회라는 두 세계 사이의 괴리와도 같소. 며칠 전 리벨이 나갔다 들어오면서 가지고 들어온 것은, 피치 못하게 이곳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저기 사회의 기준이오. 보통 같으면 그것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오. 왜냐?, 이곳에 소속이 됐다는 의미는 그 전에 저 사회가 우리가 이곳에서의 가치를 확인했기 때문이오. 따라서..”
“따라서 이곳에서 등을 돌리는 것은 똑같이 저 사회에 대단 배반과도 같다. 그 말을 하려는 거지?. 여기까지는 당연한 거야. 그렇다면 그 괴리가 어째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
“그건 지금 리벨이 갖고 있는 문제 때문이오. 시작점이 어디였는지는 이제 더 이상 상관없이 덕분에 리벨은 현재 고립되어 있소.”
“잠깐, 계속 말 잘라서 미안한데 그 시작점을 알아내면 어떻게든 원점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간부들도 내 문제에 초기에 미심쩍어 했던 것은 사실이고”
“지금 농담이 나올 때요?!”
“그리 소리 지를 것 까지는 아니잖아!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리벨은 현재 어떠한 입장도 취하기 어렵기 때문에 몸만 여기에 있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계속 겉돌기만 하고 있소. 개인의 문제는 스스로의 토대를 통해 정리 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이 스스로가 속한 세계와 같이 걸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지금 이곳은 리벨과 트레이스 이외에 또 다른 이탈자가 나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럴 때에 혹시 리벨이 스스로 문제없음을 시인하고 발을 빼려 하다간 그것은 윗적들이 정말로 바라는 바일 거요. 저들은 지금 이 순간도 리벨이 견디지 못해 굴복할 것을 기다리고 있소. 리벨이 밖에서 찍혀 온 낙인 그대로 그것은 정말로 ‘가치파괴’요. 폭탄 같은 거란 말입니다. 리벨에게 저 사회의 인장이 찍혀 있는 이상 여기의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오. 허나 그것이 지워지고 다시 돌아오는 순간 어떤 의미에서든 반역의 표상은 피할 수 없을 거요. 집단이 가치가 형성된 토대를 무너뜨리려 한 것만큼 무거운 죄도 없으니, 단순한 징계로 끝나지 않을 거요. 저 밖은 고수하고 이 안에서도 어디도 영원히 소속되지 못한 채 영원히 떠돌게 될 수도 있소.
“내가 들어온 길을 볼 때 난 저 길이 날 다시 밖으로 이끌어 줄 거라 믿었어. 하지만 정작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던 건 나였군. 새로운 길은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젠 어쩌실 거요?”
“어쩌다니?”
“이젠 리벨이 선택할 문제 아니오? 조만간 결정해야 할 거요. 통제사회에 속한 스스로의 비가치를 입증해 여기를 떠날지, 아니면 이곳에서 새로운 가치를 증명해 그대로 남을 것인지. 물론 모두 쉬운 일은 아니오.”
왜 이제야 깨닫게 된 걸까. 언젠가 자신이 멈추게 되면 뒤돌아봐달라는 말. 그것은 건네받고, 건네주고, 계속해서 이어져 온 삶의 굴레. 난 왜 진작 눈치 채지 못하였는지.. 내게 결정이 있다는 것은 그것은 얼마나 가벼우면서도 무서운가. 이미 무엇인지도 모르고 넘겨받고 채 깨닫기 전에 이미 내 손을 떠나 있으니...
“글쎄, 사실 솔직한 심정으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레테 강이라도 있다면 뛰어 들어가 버릴 텐데.”
“레테 강? 레테라니 그게 뭐요? 처음 들어보는 지리인데”
“레테(Leth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의 딸이다. 노고, 굶주림, 살해, 다툼, 고통이라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망각을 의인화한 여신이지. 신화에 따르면 저승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강이 흐르는데, 모든 죽어서 가는 망자는 그 물을 마시고 생전의 기억을 다 잊게 된다는군.”
“별난 강도 다 있군요. 리벨의 심정은 이해하오. 하지만 리벨은 잘 해내리라 믿소. 근데 아직도 자세히는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뭐가 그렇게 문제라서 부적합 조항인가 뭔가에 걸린답디까?”
“상실되었다는군. 그것이 내 감각의 원천이든, 아니면 그 흔적이든..”
<10>
이곳에서 오래전 내게 흔치 않은 말을 건넨 자가 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증명과제를 완성하는 확인을 스스로를 대신해 부탁했다. 그 역할이 방관인지, 아니면 적극적 결정권자인지는 사실 그 당시에는 흥미도 없었다. 이곳에서 증명이라 함은 비공식적으로 금기어였다. 자신의 적대적 의지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면 결코 꺼내서도 안 되는 말.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조금씩 귀신에 씌었기에 조심하는 게 좋다. 평상시엔 멀쩡히 걸어 다니는 인간이지만 그들 마음속에 있는 울분, 서러움, 억울함, 분노가 언제가 그들을 집어 삼킬지 모른다. 다행히 일정 시간이 지나면 차갑게 뒤집힌 그들의 눈도 원래 상태로 돌아오기는 한다. 허나 속박된 영혼은 달랠 수는 있어도 영원히 치유할 수는 없겠지.
“뭘 그리 끄적이시오? 간만에 그나마 쉴 수 있는 주말인데 바빠 보이오.”
“다음 검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전까지 스스로 안으로 해결하지 못한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지 않겠냐. 어째서 나는 가치를 상실했을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파괴한 것일까?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 잃어버린 걸까?”
“그것 참 귀찮은 문제군. 어느 쪽이든 큰 차이가 없다 생각하지만 말이오.”
“내가 이제 이곳에서 가지는 가치는 이제 저들이 원하는 가치가 아니야. 반대로, 내가 원하는 가치도 이제 저들에게서 구할 수 없게 돼 버렸어. 그렇다면 필요의 차원에서 다시 접근하면 어떨까?”
“애초 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전의 리벨이오. 뭐 필요하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권리인 줄 아는 자들이었지만... 그게 최초로 리벨이 바랬었던 것은 아니었잖소. 확실히 리벨의 필요는 이제 저들의 필요가 아니오.”
“그렇다면..‘스스로의 가치 없음’은 유일하게 서로 간에 들어맞는군.”
“허허허, 재밌소. 저들이 리벨을 아직까지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직 필요로 하는 가치가 완전히 차단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하는 저들을 상대로 유일한 접근 방법이 그러한 역설이라니”
“내가 가치를 잃음으로서 증명되는 것이 있고, 내 자아의 존립은 위협받는데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잃어가는 것뿐이라니. 내가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과연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이 준비한 조치란 달콤한 벌집의 가장 좋은 방에 가둬 놓고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주위에 왱왱거리는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다. 정신이 온전한 자라면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처사임을 깨닫고 슬그머니 기어서 도망쳐 나올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고문을 완성시키는 것에는, 이곳에 와서 내 안 새로 자란 뿌리도 한 몫 할 것이다. 어둠 속으로 내린 그것은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간만에 보는 것 같군. 여전히 네가 있는 방은 열기로 몸부림치나?”
“아니 최근에 다른 데로 옮겨졌거든, 그래서 그 문제는 해결 됐어”
“잘 됐군. 그건 그렇고 너의 그 대단하신 증명은 대체 언제 쯤 성과를 보여 줄 생각이지? 그렇게 떠들어 댄 것 치곤 너무 조용한 것 아닌가?”
“전에 말했듯이, 진행 중이야. 나의 정신도 몸도 이미 이전과 같지 않으니... 따라와”
그는 갑자기 내 손목을 낚아채고 그대로 중앙 계단을 통해 지하로 끌고 내려갔다. 원래 이곳에 이런 길이 있었던가? 먼 곳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미미하지만 그 냄새도 난다. 바보같군. 절대 그럴 리 없지만 근처에 바다가 있어.
“똑똑히 봐줘. 그대로 응시하고 피하려 하지 마!”
그는 자신의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하나씩 벗었고, 난 피해야하고 눈을 감아야 할 순간을 놓쳤다. 이미 생각이 뇌리에 스치기도 전 모든 신경이 얼어붙었다. 그의 사지는 온데 간데 찢어진 상처로 성한 곳은 없다. 날카로운 무언가로 찌르고 그대로 그어버린 듯한 자국도 있다. 다시 자세히 보니 얼굴도 성하지 않다. 한 쪽 귀는 억지로 집어 뜯은 듯이 반 쯤 없고 뭉개진 눈, 가라앉은 코, 그가 웃으면서 보이는 입 안도 엉망진창이다.
“겁먹지 마. 제대로 보란 말이야”
“너... 너... 이게 어떻게 된..”
“난 스스로를 잃어서라도 망각된 자신을 찾아야 해! 그를 쫓기 위해서라면! 그와 만나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든 헌 가죽을 벗겨내고 새로 뒤집어 쓸 수 있어.”
“...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널, 누가 이렇게 까지 한 거야”
“그 누구도 스스로 테두리 안에 갇힌 자신까지는 상처 입히진 못해. 그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고 있었잖아! 진짜 스스로를 파괴하는 적은 따로 있어! 이제는 이해하겠나? 모든 것을 잃게 될 것 같이 무서워도 두려워하지 마. 결국 이 재앙도 언젠가 네 영혼을 끌어안고 같이 떠나주겠지! 하하하 안 그래?”
그가 소리를 지르고 날 덮쳐누르면서 잠에서 깼다. 최근 들어 벌써 몇 번째다.
<11>
“리벨, 넌 오늘도 열외. 그리고 트레이스, 너도 역시 마찬가지다.”
“네? 그건 정말 말도 안 돼요. 전 정말 이 상태로도 뭐든 지 할 수 있다고요. 저기 있는 저 녀석과 같은 취급 받고 싶은 마음 없어요.”
“이것도 말해주지 않았군. 이건 지시사항이며 이것을 네가 어기는 것조차 금한다. 그러니까 닥치고 조용히 방에 처박혀 있어. 스스로 다른 이들처럼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나? 그럼 밖에서 그 쓸모없는 걸 달고 오지 말았어야지.”
보이지 않는 시선이란,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내 옆으로 지금 아래 장화부터 위 작업모까지 완벽히 무장한 그들이 뛰어나간다. 그들은 나와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지만 나를 보고 있다. 의식한다는 것은 감각을 연다는 것. 반면 나는 무방비하게 그것을 열어둘 수 없다. 어디까지 정신의 자존이 우선해야 한다.
“제길! 개자식들, 그렇게 쉽게 얼굴을 바꾸다니. 그저 자신의 안위 뿐”
그렇게 그는 씩씩거리며 방에 들어가 버렸고,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통제란 그 의사를 명백히 예견할 수 없는 것. 통제로 쓰이는 책임이란 이름의 사슬은 결코 놓아주지 않으면서 그 길이를 줄였다 늘였다 할 수 있다. 그것을 조정하는 자는 언제나 당하는 자보다 수가 빠름에 희열을 느낀다. 오히려 큰 소리는 저 밖에서 들린다. 큰 돌을 들어 치우고, 흙을 옮겨 운반하고...여기서 북쪽에는 신축건물을 짓기 위한 대공사가 한창이다.
“우리는 옷을 땀에 적셨다 꺼낸 듯 한데 두 놈은 아주 살 맛 나겠군?”
“누가 아니래. 누구는 디디고 있는 땅에서 최후에는 지지대로 쓰일지 모르는데 말이야. 특히 트레이스는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그래봤자 오래 가겠어? 여기서 진짜로 오래 버티는 놈은 없거든”
누군가에게 적대감을 유발시킨 다는 것은 동시에 그를 아주 예민하게 만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스스로 예민해졌다고 믿는 인간은 남을 경멸하기 쉽다.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을 알고 당하며 느끼는 본인에게는 견디기 힘든 정신 고문이다. 하루 몇 번씩 있는 집합마다 윗적은 우리를 모아놓고 성실함과 노력이 얼마나 숭고한 것이며, 그 희생이라는 세월 속에서 그것이 큰 자부심이 되는지를 거듭 반복해서 교육했다. 듣고 있는 마음속에서 은유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무서운 무기가 된다. 그렇기에 직접 사용하지 않아도 남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베게 만들 수 있다.
투명한 유리의 방에 가둬 가만히 돌아다니지 못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처음에는 바깥이 보이기에 기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보고 상상해볼 수 있다. 허나 그 기웃거림은 오래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만 가는 것은 능동적으로 있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유리 감옥 안에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 자신이다. 차라리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무엇이라도 하는 게 행복하다고 믿게 될 것이다. 스스로 가치가 상실된 채 고립을 실감하게 된 누군가는 기가 죽어 필요이상으로 행동을 억제하게 돼 움직임이 줄어들게 된다. 기회가 없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말, 시선, 행동은 추가적으로 늘어날수록 어쩔 수 없이 돌아가고 싶은 과거에 위배되고 만다.
“리벨, 방에 한참 안 보이길래 찾고 있었는데 대체 어디 있다 온 거요??”
“그냥 잠시 바람 좀 쐬고 왔다. 소장이 부르더냐?”
“아니 그건 아니고.. 그거 아시오? 요즘 리벨, 부쩍 혼자 다니는 게 늘었소. 일과시간에는 나도 나가있으니 어찌하는 진 모르겠는데 내가 찾을 때도 더러 안 보이곤 하오. 요즘 많이 답답한가 보오? 허허”
“그래, 그런가보지...”
“어! 저기 보시오. 그놈 지나가오. 허허, 요새 고개를 드는 것을 본적이 없소”
트레이스는 조용히, 아주 가벼운 동작으로, 누구와도 엮이지 않으며 그렇게 이동하며 이내 사라졌다.
“이미 스스로를 많이 잃어버린 듯하오.”
“기존의 토대는 다른 것으로 덮어지고 애써 뒤늦게 찾으려 뒤적거려도 이미 망각되어버렸으니 어찌하겠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란 그런 것을..”
“잔인한 처사요. 자신조차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송두리 째 기반을 뺏기는 게 아니라면 자각하기 힘들지.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가 명확한 인간일수록, 언제나 당연한 듯이 지탱해주던 것이 사라진다면 견디기 힘들 거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그를 지탱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변화된 세계를 수용하고 밑거름으로 삼는 것밖에 없겠지. 어찌 도망칠 수 있겠나.”
“리벨은 어찌 그리 태연할 수 있소? 물론 저 놈을 동정한다는 것은 아닌데, 저러다 저놈.. 크게 사고 한 번 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소.”
“스스로의 과제를 어떻게 본인의 몫이지.”
“어쩌면 앞일을 생각지 않고 달려온 벌일 수도 있고. 흠, 그건 그렇고 드디어 이번으로 최종적으로 결정되는군요. 혹시 두렵지 않소?”
“두려움과 불안은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항상 내가 어떻게 될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어떤 변수를 만날지 고민했었어. 허나 내 걱정과 기대는 현실에 그대로 나타나지 않더군. 유리방에 갇힌 자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그려 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돌아본 과거 또한 온전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새로운 미래라, 심오하군. 아, 전에 리벨이 하려다 끊은 말이 있었는데 기억나오?”
“언제 적 말이냐?”
“그 혼자 멀뚱히 다른데 쳐다보다 사라진 날 말이오. 이곳에서 힘의 균형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설명하려다 말았잖소. 다시 얘기해줄 수 있소?”
“...뭐 그리 대단한 얘기도 아니지. 그때 아마 스스로의 공간을 넓혀 이곳과 대립할 수 있는 경계를 만들거나, 이곳에서 나에게 작용하는 힘을 무력화 시키는 길이 있다고 얘기 하려 했을 거다.”
“흐흐, 분명 같은 듯 하면서 차이가 있지. 리벨이 과연 두 가지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할지, 아니면 전혀 다른 길로 갈지 참으로 궁금하오.”
<12>
“기간은 오래 주지 않겠다. 모든 것을 되도록 빨리 끝내고 돌아오도록”
어차피 밖에서 여유를 즐길 마음은 없다. 내 기대치와 앞으로 결과 사이의 거리는 초조함으로 매워져있다.
“지난 며칠간은 어땠나? 자네가 기다리는 동안 초조한 마음에 생각도 많았을 텐데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면 좋겠군.”
“전 괜찮았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네는 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지만, 사실 이게 아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말이야.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만 했네.”
“무엇을 말입니까?”
“자네 부모한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슨 얘기든 하지 말아달라고 했던 것 말이야. 허나 내가 이곳의 책임자인데 밖에서 자네의 보호자이기도 하신 그 분들에게 무슨 부탁의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이곳에서 현재 자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여기 오기 전 밖에서 자네가 어땠었는지에 대해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네.”
순간 내 표정이 어땠을지도 모를 만큼 난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나의 과거를 알아냈다. 그것도, 지금 나에 가장 가까운 인간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나의 눈에만 비칠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그런 인간이 앞으로 나에 대해서 아는 마냥 마구 헤집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공포와 경악스러움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허나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래, 어디까지나 일어날 일은 일어날 뿐이야.
“무엇을 얘기 나누셨든 상관없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저란 인간은 어차피 제가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저이니까요”
“...그런가. 곧 문이 열릴 걸세. 시간 맞춰 보호자를 만나서 나가게”
생각지도 못한 수였다. 어디까지나 그와 내가 서로 가진 패란 것은 내가 이곳에 온 뒤로의 사건들만 구성돼 있을 터였다. 헌데 그가 이번에 꺼내 든 것은 내가 이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버린 것. 난 스스로 자아를 지키기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온전히 지킬 수도 없었던 그 이전의 것은 버렸고 내가 아니라고 스스로 세뇌시켰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 되살리겠다고 꺼내서 나를 묶는 새로운 족쇄로 쓰다니! 어찌 그런! 두 세계 간에 오가는 중 난 이미 내 자신이 아니게 돼버렸는데....
“혹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소장과 얘기를 나눴단다. 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사람은 그렇게 한 순간에 크게 바뀌고 그러진 않아. 난 널 안단다.”
오가는 길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차안이다. 방향은 다르지만, 내 안의 묶은 내와 갈증은 바뀌지 않았다.
“내일 오전 10시 10분입니다. 늦어질 것 같으면 30분 전에 연락을 주셔야하고 20분 이상 늦다면 다음 기회를 새로 잡으셔서 오셔야 합니다.”
이번엔 저번 보다 상급심의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 과정이라는 것은 나대신 내 부모가 들어서 잘 모르지만 대충 ‘공식적인, 객관적이며,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러한 수식어가 붙는 다는 것 같았다. 나로서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내가 받을 검사와 상담에 관한 내용과 유의사항에 관한 설명이 있는 서류를 받았다. 딱히 그렇게 유심하게 보아야 할 것들은 없었지만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에 대해선 줄을 긋고 표시했다.
<검사 당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날 것 그리고 필요 이상의 과한 수면은 자제, 전날 및 당일 날 각성제나 진정제 등의 신경이상 유발 약물 복용 금지>
하루 사이에 이동이 많아 피곤해 잠이 쏟아 질 법도 한데 이날도 마찬가지로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보호자 분은 밖에서 잠시 기다리시고 검사하시는 분만 절 따라오세요. 약 30분에서 한 시간 소요될 것입니다.”
“듣기론 잠을 자면서 검사를 받는다고 하던데, 그럼 그 동안 꿈도 꿉니까?”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검사라 그러한 전례는 들어보지 못했군요. 헤집고 나올 꿈이라면 어떻게든 나타나긴 하겠죠. 많이 졸리신 거라면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푹 주무시면 됩니다.”
감각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아주 무수히 복합적으로 탐지 해 낸다. 그리고 저장된 기억과 인간의 감이란 것은 심지어 불충분한 요건과 단서마저 극복해낼 수 있게 도와주니까. 그렇기에 인간이 감각의 상실을 통해 살아가면서 문제가 있다고 드러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수용하지 못하고 소통할 수 없게 돼버린 인간은 자신의 내부로도 외부로도 자신이 속한 세계와의 연결을 약해지고 만다.
“이걸 갖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돌아가서 보고해야 할 결과지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아마 리벨 당신은, 저번 검사를 받은 뒤로 달리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고, 신뢰성을 면에서는 입증하실 수 있다는 것이니 다행이라 볼 수 있겠군요. 하여튼 수고하셨습니다. 그 외에.. 앞으로 생활하면서, 이러한 증상의 문제로 필요한 얘기를 더 해줘야 하는데... 혹시 밖에 보호자도 들어오라고 해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나중에 좀 더 상황이 정리되고 다시 얘기를 해야 될 때가 오면 그때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장의 일이 아니니까요”
“....뭐 그렇겠죠. 이봐요 리벨씨, 지금은 이러한 증명의 평가와 자료만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있을 앞으로의 과업은 단순히 이러한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겁니다. 내 말은, 당신에게 힘내라고 얘기하고 싶은 거요.”
“고마워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잠을 잘 못자서 몹시 피곤한 상태거든요.”
“조심히 가 봐요.”
“......”
“아까 보호자 분은 따로 옆방에 있는 상담실에 있어 달라고 얘기 드렸지?”
“그렇습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그는 결국 스스로 세계안의 관성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던 모양이야... 그의 자학적 의식 파괴 행위에 관한 결과지는 뽑아 뒀나?”
“네. 선생님”
“지금 가서 그분들께 전해 드리게, 이렇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해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의 방문은 한 번 더 부탁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