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병간호를 하러 간 엄마의 비밀 조각
택시를 타고 1시간 거리를 달려온 동생에게 응급실을 잠시 맡기고 로비에 나와 있었다. 평소 힘든 일이 생기면 아무렇지 않을 거다, 괜찮을 거다 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꽤나 높은 나. 한데 이번 일에는 그 기제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비어있는 새벽 응급실, 로비에 앉아 가슴을 치며 엉엉 울었다. 조금 전까지는 현실감 없었는지 멍했는데 이제야 긴장이 풀리며 감정들이 파도치듯 몰려왔다.
"왜.... 왜 나한테... 왜 엄마한테...."
눈물이 잦아들자 십여 년 전쯤, 엄마가 쓰러졌던 날의 잔상도 함께 몰려왔다. 이십 대 중반이었다. 가족들과 다 같이 살던 때, 엄마가 갑자기 외할머니 병간호를 하러 갔던 때가 있었다. 할머니네 집에서 며칠 지내야 할 거고, 상태가 좋지 않으니 우리는 따로 병문안은 오지 말라고 했다.
졸업을 앞두고 새로운 회사에 취직하여 오래간만에 일의 재미를 찾은 데다가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에 재미에 푹 빠져 있었던 때였다. 통금 시간을 어겨도 되겠다는 생각에 더 묻지도 않고 알았다고만 했다.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원래 엄마는 우리 가족보다는 외갓집 식구들을 위해 뭐든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출근 준비를 하는데 아빠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엄마 입원했대 “
"...?"
순간 옮기던 발을 멈추고 아빠를 쳐다봤다. 입원? 무슨 말이지? 외할머니가 아니라 엄마가?
아빠도 정확한 상황을 모르고 있었고, 그냥 이모에게 들은 말이라고 했다. 나더러 이모한테 전화를 해 자세히 물어보라고 했다. 오후 반차를 내고 이모한테 연락해 엄마가 입원했다는 병원을 찾았다. 병원을 향해 달려가는 내내 이상하리만큼 손이 덜덜 떨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엄마가 아픈걸 왜 아무도 몰랐을까? 아니, 엄마는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병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엄마가 여기저기 링거를 꽂은 채 잔뜩 말라버린 몸으로 허리를 구기고 과일을 꺼내먹고 있었다. 넓은 병실을 혼자 쓰고 있는 유독 외로워 보이는 엄마의 모습에 눈물과 함께 내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 엄마…!”
나는 침대로 달려가 바로 엄마를 껴안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엄마와 함께 5분 여를 엉엉 울었다. 감정을 왈칵 쏟아내자 눈물은 멈췄고 엄마를 바라봤다. 이 큰 병실에서 혼자 끙끙 앓았을 엄마를 생각하니 머리가 조여 올만큼 마음이 아려왔다.
곧이어 엄마는 그런 나를 토닥이며 말했다.
“왜 그래, 별거 아니야.”
목소리는 여전히 평소처럼 다정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왜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알려봤자 걱정만 할 텐데. 엄마가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는 걱정 말고 네 일이나 해.”
나는 그 말을 듣고 더 서러워졌다. 엄마는 늘 그렇게 혼자서 아픔을 삼켰다. 짐이 되기 싫어서, 폐를 끼치기 싫어서. 그게 엄마였다. 그날 밤, 나는 한참 동안 엄마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잠이 들었지만, 나는 쉽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엄마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감춰왔을까?
그때는 몰랐다. 이게 엄마가 숨겨온 것들 중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