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었어야만 했던 새벽 벨소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좋은 직장, 다정한 남자친구, 이해심 깊은 친구들. 누군가는 부러워 할 상황에서 나는 늘 조급하고 스스로를 통제하고 불안한 성향이 강했다. 그 불안함이 터져나와 공황 증세가 발현되었을 때, 나는 스스로를 지키려 상담을 시작했다.
5회차에 접어든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족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는데, 바로 이야기 하려면 어렵겠죠? 가족을 한 번 그려볼래요?"
"선생님, 저희 가족은 정말 개인주의자들인데 전 그 모습 말고 예전 모습을 그려보고 싶어요. 그래도 되나요?"
"네~"
나는 20년 전, 우리 가족이 할머니네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던 순간을 그렸다. 아빠와 동생과 나는 쪼그려 앉아 포도를 먹고 있었고 그런 우리를 엄마가 사진으로 남겼다.
"이 그림은 무슨 그림이예요?"
"..."
설명을 시작하려던 나는 무언가 터져나오는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즈음이 우리 가족이 다함께 했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행한 순간들은 현재로 남지만 행복했던 순간들은 왜 늘상 과거일까? 내 불행의 순간에 있었던 가족, 그 중에서도 '엄마'. 엄마와 나에 대한 정리가 나의 상담에 키가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엄마에 대해 글을 써 보기로 했다.
새벽, 다급히 울리던 벨. 알람이었어야만 했던 전화를 급하게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이모의 떨리는 목소리가 힘겹게 넘어오고 있었다.알람이었어야만 했던 새벽 전화 벨소리
엄마와 둘째 이모가 한 집에서 함께 여든여덟의 할머니를 보살피고 있던 터라 할머니의 부고 소식이려나 생각했던 나는 엄마가 아닌, 이모가 전화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엄마 소식임을 직감했다.
“엄마 …????!!!!!! 엄마한테 무슨 일 생겼어?”
“진정하고 들어.. 진정해”
엄마는 아빠와 이혼한 뒤 혼자 지내는 것이 무섭다며, 할머니 할아버지 병간호를 한다는 이유로 둘째 이모와 큰 집에서 방 한 칸을 빌려 함께 살고 있었다. 몇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부터 부쩍 겁이 많아진 엄마였다. 혹여나 아무도 없는 집에서 쓰러지면 죽은 상태로 발견되어질까봐 혼자 살기를 무서워 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화장실에서 구토를 잔뜩 한 상태로 쓰러져 있던 엄마를 발견한 건 이모부였다. 새벽,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 문을 열자마자 엄마를 발견한 이모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이모를 다급히 깨웠고, 이모가 엄마와 함께 급하게 구급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와 있는 상태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보호자를 급히 찾고 있다고 했다며 나를 급하게 바꿔줬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지나치게 침착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몸에 흐르던 모든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엄마가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는 것, 뇌출혈로 인해 좌뇌에 피가 많이 터지며 의식에 관련된 뇌 부분이 손상되었을 것이라는 점, 어서 보호자가 와야 된다고 했다.
정말이지 사형 선고를 내리는 저승사자의 부름처럼 느껴진 전화를 끊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검은 옷을 고르고 있었다. 손을 달달 떨며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엄마가 깨어나면 밝은 모습으로 맞아주리라 하얀 니트를 챙겨 나왔다. 빠르게 잡힌 택시를 타고 40분 거리에 있는 성빈센트 병원으로 출발했다.
울렁이는 속을 진정하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기도 해 보고 기사님께 어떤 이야기던 해달라고 해볼까, 위로를 구해볼까 멍한 와중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택시에서 남자친구와 동생에게 연이어 전화를 걸었지만 모두 방해금지 설정을 해 두어서인지 아무도 받지 않았다.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머릿속에서는 삐 소리만이 울려댔다. 간신히 연락이 닿은 동생에게 뜸 들이는 순간이 가장 불안하다는 걸 알기에 담담한 척 속사포처럼 말하고 병원에서 만나기로 한 뒤 계속해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고요한 새벽, 택시 안에서 소란한 마음이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