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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Oct 12. 2022

부모님과의 공동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혼자 집에 있음을 즐기는 법

혼자 살면 집 안의 고요함이 싫어 보지 않는 TV를 켜놓거나 어둠이 무서워 이 방 저 방에 불을 켜놓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피어나는 정적과 어둠이 부럽다. 한창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리던 첫 번째 직장에서는 반복적인 벨소리에 사람이 미쳐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이 너무 많은 날에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전화선을 뽑아버리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의 상황은 더 나빴다. 박물관이라는 곳이 내게는 직장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광지와 다르지 않다. 늘 북적이는 인파에 피로가 쌓였는데 수학여행 기간에는 평소보다 몇 배의 소음과 인파를 견뎌야 했기에 화장실을 간다면서 잠시 비상계단에 앉아 귀와 눈을 쉬게 해 줬다.


지금의 직장은 사람들로 북적이지도 않고 전화벨이 자주 울리지도 않는다. 다들 자기만의 큐비클에 앉아서 컴퓨터와 마주 본 채 업무에 집중할 뿐이다. 겉으로 보이는 소음은 없지만 머릿속과 마음속은 항상 시끄럽다. 수많은 문서 위 글자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돈 나가는 업무를 하는 날에는 어느 때보다 초 집중해서 숫자를 들여다본다. 여러 번에 걸쳐 문장을 확인하고 숫자를 계산해보는 동안 머릿속의 음성들은 점점 소리를 높인다. 퇴근할 때쯤이 되면 마치 컴퓨터 본체를 강제 종료시키는 것처럼 머릿속의 시끄러운 소리들을 뚝 끊어버린다.




하지만 아직 피로는 끝나지 않았다. 2시간의 퇴근길을 견뎌 집에 돌아가야만 드디어 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집은 반드시 휴식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집에서도 생각만큼 편하게 휴식을 취하지는 못한다. 부모님께서 켜놓으신 TV 소리와 아빠께서 기타 연주를 연습하시는 소리는 다시 내 귀와 머릿속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제발 하루만이라도 침묵 속에서 저녁을 보낼 수는 없는 걸까? 하지만 감히 내가 가족들 모두에게 침묵을 강요할 수는 없다. 결국 가족과 함께 하는 생활 역시 공동생활의 한 종류라는 것을 깨닫는다. 단,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 다른 공동생활과 다르다. 부모님의 생활 방식이 중심이며 나는 그에 맞춰 생활해야 한다.


결국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퇴근하고 조용한 카페나 도서관에 들러 나만의 시간을 갖거나 밖으로 산책을 나가는 것이다. 부모님께서 일찍 잠에 드시니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밤에는 조용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한편으론 이렇게 불만만 가지고 있는 내가 배은망덕하게 느껴진다. 사실 매번 고요한 집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퇴근 후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하고 TV 프로그램을 보며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란 간사해서 행복은 쉽게 취하면서 기억하지 못하고 불만은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하면서 기억에 담아두지 않던가.




부모님께서 여행을 가시는 날은 나에게도 의미 있는 날이다. 나 혼자서 집을 자유롭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코로나가 퍼지고 전 세계적으로 여행길이 막히면서 혼자서 집을 차지해보려는 계획도 함께 막혔다. 앞으로 나 혼자 집에 있는 날이 영영 없어지는 것은 아닐지 낙담하던 그때 뜻밖의 기회가 생겼다. 바로 명절이었다. 할머니 댁에 부모님께서만 다녀오시기로 하면서 하루 종일 나 혼자 집에 있게 된 것이다! 엄마께서는 명절에 딸을 혼자 둔다는 것에 마음 쓰여하셨지만 정작 나는 전혀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대되고 즐거웠다. 명절마다 할머니 댁을 찾는 친구의 수는 해가 갈수록 줄고 있다. 명절 연휴를 '명절'이 아니라 '연휴'로 보내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부러웠다.


부모님께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시자 집 안을 채우는 것은 가을 햇살과 나뿐이었다. 나는 느지막한 시각에 일어나 거실로 나가 소파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집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가전제품이 돌아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잠시 적막함을 즐기며 소파에 기대 누웠다. 나 혼자 살더라도 반드시 소파는 살 것이다. 소파만이 주는 안락함은 침대가 아무리 편안해도 견줄 수 없다. 소파에 놓인 쿠션이 바스락 거리며 내 머리 모양에 맞춰 구겨졌다. 드디어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고요와 단둘이 마주한 것이다. 창문을 열자 가끔씩 새소리가 들렸다. 비록 아름다운 지저귐보다는 맹렬하게 싸우는 소리에 가까웠으나 그것도 자연의 소리라는 생각에 반가웠다.

 

고요함을 충분히 즐긴 다음 소파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브런치를 만드는 것이었다. 브런치를 먹을 때마다 '조금 번잡하겠지만 나도 집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직접 해 먹어 본 적은 없었다, 말 그대로 번잡하기 때문에. 하지만 시간과 에너지가 모두 넘쳐나는 휴일이라면 브런치 요리도 거뜬했다. 신중하게 달걀을 저어가며 스크램블 에그를 완성하고 그 위에 파슬리도 살살 뿌렸다. 핫케이크 가루를 움푹 들어간 그릇에 담아 반죽하고 약불에 천천히 구워 여러 장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참치 통조림을 활용해 참치마요 샌드위치까지 완성했다. 그럴듯한 브런치 한 접시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커피까지 곁들이면 어느 브런치 가게 부럽지 않았다.




남는 시간은 책을 읽으며 보냈다. 혼자 집에 있는다고 해서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혼자 집에 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혼자 집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뭔가를 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만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내가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만약 내가 독립해서 자취를 하게 됐을 때 보내고 싶은 주말을 보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막상 독립을 하게 되면 적막한 집이 무섭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홀로 잠드는 것이 불안해서 TV를 켜놓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이 두려움을 막아주는 방패이자 공간만큼 사람의 마음도 채워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고 보면 혼자 살고 싶은 욕망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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