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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Dec 14. 2020

퇴근 후 고요한 맥주 한 잔

주량을 뽐내지 않고 진득하게 마시다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음.. 취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라고 패기롭게 대답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 20대 중반의 문턱을 두드릴 때쯤 조금씩 주량의 한계를 만나기 시작했다. 




나는 비교적 늦게 술맛을 알았다. 대학생 때는 술자리에 참석하는 일이 극히 드물어 술 마실 기회가 많지 않았고, 어쩌다 마실 기회가 있어도 술자리를 즐기지 않았던 탓에 있지도 않은 통금 시간을 만들어 가며 슬슬 자리를 피했다. 그랬던 내가 술맛을 알고 술자리를 즐기게 된 것은 직장을 다니면서부터였다. 내가 일했던 팀은 또래가 많은 데다 다들 성격이 무난해서 마음도 잘 맞고 얘기도 잘 통했다. 회사에서 주관하는 회식은 주로 점심이었지만 퇴근 후 동료들끼리 한 잔 하러 가는 날이 많았다. 직장 동료를 넘어 친구 같은 느낌이어서 일주일에 3~4번 마시기도 했다. 가지 튀김 잘하는 곳을 알아서, 퓨전 음식을 가정식처럼 하는 기가 막힌 곳이 있다며, 우리도 분위기 좋은 곳에서 한 번 먹어보자며. 다양한 이유를 붙여 주종을 가리지 않고 마셨다. 


그때 술집을 많이 알게 됐고 나한테 어떤 술이 더 잘 받는지도 알게 됐다. 하지만 과하게 마신 날이면 어김없이 새벽에 속이 안 좋아지며 게워내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나는 술을 잘 마시는 축에 들었다. 하지만 나중에야 깨달았다, 무조건 많이 마신다고 잘 마시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주량을 줄이지는 않았다. '지금 이 한 잔을 마시면 속이 안 좋아질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나 거부하지 않았다. 다음날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는 약속에 지장이 없도록 술자리를 가지지 않거나 마시게 되더라도 최대한 소량을 마셨다. 하지만 분위기에 취해서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차라리 새벽에 일어나서 속을 게워내고 다음 날 데이트에 나가기도 했다. 그러면 이상하게 화장도 잘 받고(얼굴이 창백해서 그런가) 음식은 또 어찌나 잘 들어갔는지 모른다.


한 번은 술을 과하게 마신 다음 날이었는데, 속이 너무 쓰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과를 가서 제산제와 알약을 처방받았다. 약국에서 숙취해소 약을 사 먹은 적은 있었지만 병원 처방약을 받아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어느 날 식도로 위산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식도부터 위까지 쓰라린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는 커피도 잘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유력한 원인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술. 그때부터 약을 먹으면서 1년 정도 술을 끊었다. 술을 끊을 수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을 때는 주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예전에 마시던 기량의 절반은커녕 5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그것도 마실 때 얘기지 소주는 소독약 냄새가 너무 강하게 나서 입에 대기조차 어려워졌다. 그러자 점차 와인과 맥주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술을 제대로 즐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전까지 나는 '술자리'를 즐겼나 보다. 왁자지껄하고 흥겨운 분위기, 약간 어두운 조명 아래 더 맛있어 보이는 음식과 술, 살짝 취기가 돌면서 솔직해지는 사람들. 즐겁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놀랍게도 그립지 않았다. 간단한 간식이나 식사 거리와 함께 마시는 와인 한두 잔, 또는 맥주 한 캔에 더 정감이 갔다. 후다닥 마시지 않고 한 모금 한 모금에 정성을 기울였다. 


저렴한 가격의 글라스 와인을 파는 가게가 늘어나고 마트에 가면 한 병에 만 원도 안 하는 와인도 찾을 수도 있다. 그만큼 와인은 대중적이 되었지만 나는 와인 맛을 잘 몰라서 와인보다는 맥주를 마시는 편이다. 가장 시원한 첫 모금, 탄산이 빠진 마지막 모금. 맥주 맛을 잘 안다기보다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가장 알맞은 맛이 맥주이기 때문이다. 치열하고 긴장했던 하루가 탄산의 시끄러움에 묻혀 같이 목을 타고 내려간다. 한 모금씩 하루의 조각들을 넘기다 보면 탄산은 빠지고 향만 남은 마지막 모금이 남는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마지막 모금을 마시면 하루가 마무리된 듯하다.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라는 소설의 주인공이 곧잘 마시는 맥주가 있다. 사과주의 하나인 '매그너스'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마시는 장면이 굉장히 달고 시원하게 느껴져 너무나 마셔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소설을 읽었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 가게 중 매그너스를 파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 3달 전쯤인가 대형마트에 갔는데 세계맥주 코너에 떡하니 있는 것이 아닌가. 기쁜 마음으로 네 캔의 만원을 모두 매그너스로 채웠다. 마음 같아서는 그걸로도 부족했다. 맛볼 생각에 신이 나서 즉석식품 코너로 가 안주도 두둑하게 챙겼다.


올해 들어 사과 맥주에 꽂혔다. 그래 봐야 마셔본 거라고는 소머스비와 애플 폭스뿐이었지만 그 둘 중에서도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즐겨 마시곤 했다. 그렇기에 처음 매그너스를 마셨을 때 비교 대상이 단 둘 뿐이었다. 하지만 매그너스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비교대상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한 사과맛, 맛을 가리지 않는 적당한 탄산, 부드러운 목 넘김, 자연스럽게 남는 달콤함.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은 없지만 내가 기대하던 사과맛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그전까지 나는 하나의 맥주에 정착하지 못한 '맥주 떠돌이' 신세였다. 어느 펍(pub)을 가든 고민 없이 주문할 만한 하나의 맥주를 만나는 길은 길고 길었다. KGB, 레드락, 스타우트, 기네스, 클라우드, 담 리몬, 데스페라도스, 에델바이스, 소머스비. 

그리고 마침내 매그너스에 정착하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매그너스




지난주, 퇴근하고 마트에 들러 맥주만 사고 후다닥 나왔다. 집으로 가 만두를 튀기고 라면을 끓였다. 음식을 더 맛있게 비춰주는 조명도 적당한 템포의 배경음악도 누가 만들어주는 안주도 없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편한 옷을 입고 누구의 입맛도 아닌 내 입맛에만 맞춘 음식을 차리고 아무 말도 없이 고요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는 어김없이 매그너스였다. 맥주의 첫맛은 일주일이 끝난 것처럼 체증이 쑥 내려가는 맛이었다. 그리고 이제 달달한 휴일만 남은 맛이기도 했다. 라면을 크게 집어서 한 입에 집어넣었다. 라면의 뜨거운 김 때문에 안경에 서리가 껴서 안경을 벗었다. 만두를 한 입 먹었다가 맛이 심심해서 급하게 간장을 만들어 찍어 먹었다. 그리고 다시 맥주 한 모금. 라면은 끝나고 만두는 남았지만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 맥주에만 집중했다. 종종 TV를 보면서 마시기도 하고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날만큼은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시선을 어느 한 곳에 두지 않고 머리를 비운 채 가만히 맥주를 들이켰다. 자칫 외로워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사실은 굉장히 편안했다. 상사와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는 사무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조용히 보내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맥주 네 캔은 퇴근 직후부터 시작된 휴일과 함께 하나씩 해치워졌다. 냉장고에서 맥주가 없어지면 휴일도 끝이 난다. 다음 주에도 휴일을 앞둔 퇴근길에 또다시 맥주를 사 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보다 빨리 맥주가 마시고 싶은 순간이 올지도 모르지만. 

참으로 시달리고 억눌렸던 하루일지라도 맥주만으로 채워진 거대한 진열장 앞에 서면 혼자만의 시간을 떠올리며 기대에 부풀어 장바구니에 맥주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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