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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Oct 20. 2022

자취가 너무 하고 싶을 때

나만의 취향으로 나만의 공간 꾸미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4시간에 걸친 출퇴근길을 아르바이트로 생각하자 다짐했지만 쉽지는 않다. 원래부터 아침형 인간이라 늦은 시간보다는 이른 시간에 활동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출근은 다른 문제다. 예전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는 아침 시간이면 유독 새로운 직장에 대한 원망이 커진다. 날이 추워질수록 방 안으로 스며드는 햇살은 옅어지고 몸은 점점 굼떠져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의지가 약해진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지하철역까지 걸어갈 때면 겨울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아침 하늘이 더 어두워지고 공기가 더 차가워져도 잘 견딜 수 있을까?


꾸역꾸역 도착한 지하철역 플랫폼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면 또 다른 걱정이 앞선다. 역으로 들어오는 열차가 속도를 점점 늦출 때면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들은 하이에나처럼 창문을 통해 빈자리를 살핀다. 나 역시 하이에나 무리 중 하나로 열차 속도가 느려질수록 몸과 마음이 초조해진다. 앉을자리가 없을 거라고 예상하는 날에는 안타깝게도 늘 예상이 적중한다. 거의 뛰다시피 열차를 타서 내가 눈여겨 두었던 자리에 낚아채듯 앉는 사람을 보면 허무하고 억울하다. 나처럼 앉을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잠시 갈 곳을 잃은 듯 서성이다가 이내 중심을 잡고 설 만한 곳을 찾는다. 한 시간 동안 서서 가야 하는 운명이 유독 가혹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자취를 고민한다.




그러나 출근길 지하철에서 느끼는 자취 충동은 일시적이다. 운이 좋아 금방 자리가 나면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고민했던 시간을 잊어버린다. 가방을 품에 끌어안은 채 책을 읽거나,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붙이면 2시간의 출근길도 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종종 단 한 번도 앉지 못하고 회사까지 갈 때도 있지만 회사에서 8시간 내내 의자에 앉아있다 보면 출근길에 잠깐 서 있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근본적인 자취 욕망을 건드는 것은 다리가 조금 아픈 출퇴근길이 아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주변에 자취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이 설명하는 집을 상상해보거나 집의 일부를 찍은 사진을 보며 자취방에 대한 개념을 정립했다. 나에게 자취방이란 작은 평수의 원룸이며 부엌과 거실, 침실이 분리되지 않은 집이었다. 부모님 댁은 물론이고 교환학생 기간 동안 지냈던 바르셀로나의 기숙사도 전부 방이 딸려 있고 물리적이지는 않지만 공간적으로 부엌과 거실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 내게 자취방이란 곳은 너무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친한 친구가 자취를 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집이 정리되는 대로 집들이를 하겠다고 했고 처음으로 친구의 자취방에 초대받았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친구가 바로 앞 건물에서 나왔다. 친구는 원래 사무실로 쓰던 곳이라 일반 주거용 오피스텔과는 좀 다르다고 운을 띄웠다. 문을 열면서 나는 추억의 러브하우스 멜로디를 불렀다. 친구의 말대로 내가 이제까지 사진으로 보거나 상상했던 집과 달랐다. 일단 평수가 굉장히 넓었고 구조는 미국식 스튜디오형 아파트와 비슷했다. 예상보다 탁 트인 공간에 놀라며 이런 곳이라면 답답함 없이 자취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자취방에 초대를 받는 일이 점점 늘었다. 그만큼 자취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직장인이 된 친구들의 자취방은 대학교 때 잠시 머물렀던 임시 공간과 같은 자취방을 넘어섰다. 평수가 넓어지거나 별도의 방이 하나 있을 정도로 공간적 여유가 생겼다. 또는 공간이 좁더라도 자취의 로망이 담긴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단순히 집이 멀어 거처를 얻은 것이 아니라 나만의 공간을 갖기 위해 자취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친구들의 자취방에 놀러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취에 대한 욕망이 들끓었다. 나의 취향과 필요대로 마음껏 꾸밀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에 빠지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방을 꾸미는 것뿐이었다. 이제 돈을 버니까 내가 원하는 가구를 구입할 수 있고 원하는 물건들을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방 꾸미기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처음부터 본격적인 계획을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았다. 자취에 대한 환상을 품은 채 이케아를 구경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는 굳이 살 게 없어도 구경하는 게 좋아서 이케아를 찾았다. 이케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쇼룸을 보고 체험하면서 또 한 번 자취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다양한 스타일로 연출된 쇼룸을 구경하는 것은 구입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즐거운 경험이다.


처음에는 구경뿐이었지만 자꾸 보다 보니 일부는 구입해도 무방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마침 엄마께서 우리 집 가구 중 오래된 것을 바꾸고 싶어 하셨는데 내가 열심히 이케아를 영업한 덕분에 부모님과 함께 이케아로 갈 수 있었다. 이케아에서 카트에 가구를 담아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조립이 만만치는 않았지만 한 두 번 조립하다 보니 패턴을 파악할 수 있었고 점점 수월해졌다. 나중에는 아빠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조립할 수 있을 정도였다. 3일에 걸친 조립이 끝나자 드디어 방 꾸미기 프로젝트도 완성되었다. 화이트 톤의 가구 덕분에 방이 더 넓어 보였고 수납장이 늘어나 더 깔끔해 보였다. 자취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그래도 나만의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자취방 집들이에 초대를 받으면 대체로 디저트를 사 가지만 경우에 따라 컵을 선물한다. 컵 욕심이 많아서 머그컵과 텀블러를 포함해 다양한 잔을 사들이다 보니 부엌 찬장에는 내 전용 칸이 따로 있다. 집에서 가장 많이 쓰는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컵이기 때문에 나만의 색깔을 살리고자 시작한 무의식적 취미이다. 그래서 친구들의 자취방을 놀러 갈 때도 나의 꿈을 담은 컵을 선물한다. 언젠가는 나만의 집에 있는 나만의 부엌 찬장에 다양한 종류의 컵을 진열해 놓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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