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걸 더 이상 포기하지 않기 위해

<파랑의 사정>

by 초록Joon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어. 유치원 장래희망같이 연예인부터 대통령까지 몽땅 되고 싶어 하는 거 말고. 미술이 좋아서 그림을 오래 그렸어.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할 정도였으니까. 어느 날 엄마와 학원 선생님이 쿵작을 맞춰 날 설득했어. 좋은 대학교에 먼저 가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고. 공부도 곧 잘했던 내게 그럴듯한 제안이었지. 돌아보면 가진 소질과 관계없이 높은 점수로 상위권 대학에 가는 게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는 전형적 입시 제도에 맞췄던 것뿐이야. 모두가 들어가길 바라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내 뜻이 아닌 탓에 딴생각이 떠나질 않았지. 문득 가수를 해보고 싶었어. 어릴 때 노래에도 재능을 보여서 성악이나 판소리를 공부하라고 권유도 받았었는데 미술 하느라 접어 둔 상태였거든. 친구들이 이 공부 저 공부하러 가고, 이 회사 저 회사에 들어갈 때 데뷔를 준비했어. 괜찮은 기회를 얻어 고생하면서 시간을 썼지. 결국 몇 년 후 부모님이 원하는 제자리로 돌아왔어. 여기선 차마 말 못 할 우여곡절을 많이도 겪은 채로.


넘치는 끼를 틀어 묶고 남들 하듯 취업했어. 누가 봐도 그럴듯한 곳으로 골라서. 어디서도 잘 지내고 적응하는 바람에 인정도 받았지. 배우면서 알아가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어. 직접 움직이며 살아가는 비용을 벌 수 있는 독립적인 자세는 떳떳했지. 굳이 품고 있는 꿈을 드러내진 않았어. 답답하고 아쉬운 미련으로 밴드 활동을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비공식이었지. 평범한 회사원 애인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도 종종 일탈을 꿈꿨어. 한 번은 전 세계를 날아다니는 승무원이 되고 싶어서 학원도 다니고 면접도 봤지. 이렇다 할 결실 없이 근사하게 찍은 증명사진만 전설로 남았지만. 아이를 낳고 나선 점점 딴짓이 줄었어. 해 본 사람은 잘 알 거야. 정신과 체력의 고갈이 어떤 건지. 워킹맘으로 집과 직장을 오가는 것만으로도 삶은 모자랐어.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욕망이 줄은 건지, 세월이 흘러 가능성이 줄은 건지 확인할 새도 없이 계속 나이만 먹었어. 나를 대표하는 숫자가 올라가면 무언가 새롭게 할 기회는 반대로 팍팍 줄어들더라. 특히 이 사회의 여성에게는 더욱.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던 탓인지 탈이 났어. 사회생활을 곧잘 해왔다고 믿었는데 곪은 상처가 많더라고. 덮어두고 나는 아무렇지 않다며 지내오다 속을 열어보니 말이 아니었어. 10년을 일했지만 구체적으로 발전시킨 능력이 무엇인지 잡히지 않아 찾아오는 허무함. 하하 호호 웃으며 친분을 맺었지만 얕고 희미해서 쉽게 깨지는 직장 속 인간관계. 일의 성과가 아닌 치열한 정치질로 돌아가는 허무맹랑한 조직에서 견뎌야 하는 괴로움까지. 마음의 병은 곁눈질을 부추겼어. 올려두고 잊고 있던 이직 사이트를 통해 해외 취업 제안이 들어왔어. 가뜩이나 들썩이던 엉덩이가 올라탈 곳으로 보였지. 외국계 여행 스타트업이었는데 아쉽게도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어. 지금 생각하니 코로나 사태 직전이라서 이직 후 바로 손가락 빨았을지도 모를 운명을 막아준 행운은 맞아. 그땐 미래를 알 수 없었기에 헛헛한 가슴이 더 크게 휑하고 뚫렸지. 건조하고 메마른 정신은 기어코 몸에도 손을 뻗치고 말았어. 무리 없이 버텨오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거야.


불과 몇 개월 전 건강검진 때도 아무렇지 않았던 자궁에 길고 커다란 근종이 자리 잡았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생기고 자란 거야. 그때가 직장생활 최대의 위기를 겪던 즈음이라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를 범인으로 지목했어. 큰물에서 놀아보겠다며 상위 조직으로 어렵게 이동했는데 웬걸. 사람도 상황도 최악이었어. 팀장을 따돌리는 팀원, 팀원을 이끌지 못하는 팀장, 자기 살길만 찾는 임원. 기가 막힌 최고의 악당은 옆 팀장이었는데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지. 내가 속한 팀과 경쟁 관계였는데 새로이 보강된 내가 두각을 보이면 본인 팀이 상대적으로 눌릴까 봐 갖은 수작으로 딴지를 걸고 제한했어. 정정당당히 각자의 일을 해내고 평가받으면 될 텐데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지. 호시탐탐 깎아내리고 짓밟고 올라갈 기회만 노렸어. 마치 그 팀의 일이 오직 그것인 것 마냥. 일을 하고 싶어도 제대로 못 하는 환경에서 속만 썩이다 병을 얻고 만 거야. 수술 날짜를 잡고 자칫하면 자궁을 떼어야 한다는 설명을 듣는 순간, 내게 회사는 떠났어. 더 이상 붙잡혀 있다간 날 잃고 말 거란 생각에.


제일 나쁜 상황은 면했지만 수술 앞뒤로 생각이 참 많았어. 몸과 마음이 너덜거리자 앞으로의 행복에 자신이 없어졌지. 돌아보지 않던 지난 시간도 후회로만 돌아왔어. 따져보니 하고 싶었던 걸 맘껏 해본 적이 없었던 거야. 오늘도 틀에 박혀 살고 있으니 내일이 달라질 리 만무하지. 아프고 나니 얼마나 남은 줄도 모를 생을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게 맞느냐는 의문이 들었어. 그 당시 나만큼이나 답답해하는 삶을 이어가던 남편 초록과 대화를 많이 나눴어. 급기야 우리 둘은 죽음을 앞둔 사람같이 버킷리스트를 작성해서 교환했어. 하얀 종이를 눈앞에 두자 그동안 살면서 끓어올랐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지. 아마 앞으로도 계속 불끈불끈 무언가 하고 싶어질 텐데 계속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히 억누르고 지내기 싫었어. 남아 있는 나날은 마음이 향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살겠다는 결심을 했지. 백지는 곧 채워졌어.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기, 영어 환경 속에서 공부하기, 영어로 일하기. 꾹꾹 눌러 적은 3가지 목록이었어.


유독 추운 날씨가 힘들던 난 죽으면 겨울에 가겠구나 싶었어. 외국 경험이 없던 토종이라 외국어, 특히 영어에 미련과 갈망이 있었지. 다음 직업은 배운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일하는 모습이길 바랐고. 인생 계획에 없던 타국 생활이라 아는 게 없었어. 정보를 긁어모으기 시작했지. 이런 곳엔 누가 가나 궁금했던 유학원, 이민 박람회를 모두 쫓아다녔어. 굉장히 다양한 선택지가 있더라고. 나라부터 직업까지. 딱 하나 일관되게 들을 수 있던 건, 지금 바로 가야 한다는 것. 조금이라도 일찍 가야 기회가 크다는 원리. 사실 우린 몇 년 더 준비해서 움직이려고 했어.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서 좀 다니고, 우리도 버티며 돈도 좀 더 모아서. 만약 망설이면서 시기를 늦췄다면 우리 가족은 여기에 없고 이 글도 없었겠지. 반년 만에 코로나 팬데믹이 터졌으니. 당장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던 관계자들의 압력 덕분에 신의 한 수를 놓치지 않았어. 떠나겠다는 결정을 앞세워 무엇을 배울지 치열하게 고민했어. 뜨거운 의지는 하고 싶은 공부와 천직으로 인도했지. 아픈 사람의 회복을 돕는 '간호'.


아파서 힘들어하는 이를 많이 봐왔어. 그때마다 할 수 있는 건 병원 방문 말고는 없었지. 큰 병을 앓아도 달라지는 건 의료기관의 크기뿐이었고. 보호자로서의 무기력을 절감했던 시절은 엄마가 암과 싸울 때였어. 나와 가족은 무지했어. 지나가는 소문에도 흔들렸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것 같아. 좀 더 편안하고 충만하게 채워서 보다 나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웠던 시절은 평생의 상처로 남았지. 한 번은 해외여행 중에 아들이 발을 크게 다친 적이 있었어. 의료지식이 없다 보니 응급조치가 서툴렀으며 현지 의료 체계는 불안해서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했지.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녔지만 의견이 달라서 한참을 헤맸어. 아이의 상처는 맡겨지지 못한 채 한참을 떠돌았지. 지금도 작은 발의 흉터를 보면 마음이 아려. 이러면서 마음을 먹었던 것 같아. 가족 중에 누군가는 최소한의 의료 전문 지식을 갖춰야겠다고. 자연스럽게 오래 품어온 꿈과도 연결되었어. 자식을 품에서 떠나보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봉사하며 살고 싶었거든. 그 이후의 삶은 내게 덤이라는 생각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의료봉사자라니 적절하지 않아?


왜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냐고 물을 수 있겠지. 맞아. 처음엔 의사가 되는 길을 찾아봤어. 어디 가도 의느님이 되는 진입장벽은 높더라고.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가능성이 적었어. 이즈음에 가볼 나라도 결정되었어. 바로 호주. 아직도 그렇지만 가까운 느낌이 드는 곳은 아니야. 건너 아는 누군가가 여행을 다녀왔다더라 정도로 생소하다면 설명이 되려나. 영어를 쓰는 따뜻한 곳이라는 데서 낙점받았지. 거기에 더해 간호사의 사회적 지위가 남달랐어. 우선 여기선 한국과는 아주 다르다고까지 만 해둘게. 호주 간호사가 먼저 되는 게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다음 단계는 그 이후에 시도하기로 하고 프로젝트를 시작했지. 현지 대학에 들어가야 했고 그러려면 영어 점수가 필수였어. 대학 졸업하고 취업할 때 쓰이는 친근한 TOEIC이면 좋았겠지만 생전 처음 보는 PTE라는 녀석과 만났지. 입학까지는 불과 몇 달밖에 남지 않은 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시험을 3번 봤어. 결과는 최소 조건 미달. 지원조차 불가능한 허탈한 상황에 빠졌지.


아쉬웠지만 정 안되면 다음 해에 가도 된다고 급한 마음을 달랬어. 그해가 19년이었으니 곧 코로나의 해가 닥칠 줄도 모르고. 안 나오는 점수를 붙잡고 애를 써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 편하게 생각했지. 때마침 찾아온 직장 10년 차 리프레시 휴가를 호주로 계획하며 한 번 가서 지내보기로 했어. 정작 가봤는데 나랑, 또 우리 가족이랑 잘 안 맞을 수도 있는 거니까. 한 달 넘게 보낸 그곳의 시간은 날 조급하게 만들었어. 꼭 다시 돌아가서 살고 싶어졌거든. 완벽한 날씨, 맑은 풍경, 여유로운 분위기. 여행이라서 다 좋게 느껴졌다는 경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한눈에 사랑에 빠지는 건 다 그런 거잖아. 입학도 못하고 있는 대학교도 둘러보고, 선배가 될지도 모르는 간호 학생도 만나보고, 다닐지도 모르는 교회도 나가보고, 만날지도 모르는 주민과도 접해보고. 마치 곧 다시 올 것처럼 인사를 나누고 돌아왔어. 기적은 그때부터였어. 딱 한 번만 더 영어시험을 보고 안 되면 회사로 돌아가서 일 년 동안 천천히 준비하기로 했거든. 좋은 기운을 받아온 덕인지 지독히 안 나오던 점수가 나와버렸어. 기쁨도 잠시, 이미 입학 일정은 마감되었고 가려면 좀 더 떨어진 외곽지역으로 가야만 했어. 잠시 고민하다 이거라도 어디냐고, 배부른 소리 할 때가 아니라며 거기라도 가겠다고 입장을 전했지. 혹시 모르니 원래 가려던 곳에 남는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준다는 유학원의 말을 듣고 하루를 더 기다렸어. 맙소사. 거짓말같이 한 자리가 났다는 거야. 그렇게 바라던 호주 간호대학에 들어갔어. 말도 안 되지 진짜.


명색이 엄마인데 아이 이야기가 안 나오니 이상하지 않아? 왜 이런 가족의 해외 이주에는 아이의 미래와 조기 유학에 대한 목적이 클 거라고 믿어버리잖아. 아이를 위해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부모의 전부를 걸어서 키우는 익숙한 스토리. 우리의 출발은 나와 남편의 앞으로가 보이지 않아서였어. 한 사람의 가족 구성원인 아들도 의견은 있지만 결정은 부모인 우리가 했지. 그렇다고 가기 싫다는 걸 억지로 데리고 가거나 아무 의미 없이 함께하는 건 아니야. 아이 육아에 관한 건 주 양육자가 된 남편 초록과 아들 노랑이 직접 전해줄 거야. 주 양육자를 내려놓았다고 흔한 보조 양육자 아빠처럼 내 일 아니라며 멀리 떨어져 있을 거란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네. 우리 부부는 전적으로 함께 아이를 키워. 내 아이를 하고 싶은 걸 시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기르고 싶어. 최고의 환경은 옆에 있는 부모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고. 윗세대 어르신처럼 나는 못 했지만 너는 그렇게 살아달라는 식의 와닿지 않는 말은 하기 싫거든.


살아온 나날만큼 부대끼며 지내온 많은 이에게 떠난다는 소식을 전했어. 첫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론 응원으로 마무리되었지. 높이 뜬 비행기 안에서 문득 그들의 얼굴이 떠올랐어. 진심으로 날 이해했을까? 그저 한순간의 충동적 일탈로 여기지 않았을까? 그동안 내가 보여준 것처럼 말이야. 저러다 한풀 식으면 곧 돌아오겠거니 하면서. 그래,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질 거 같았어. 하고 싶지 않은 것만 하다 간 영원히 내가 아닌 채 살다 사라질 것 같았거든. 난 움직여야만 했어. 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