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가 누군가에게서 들었다며 말하기를, 2027년이 되면 세상에 신인류가 등장한다고 한다.
2027년이면 십여 년 정도의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외계인도 아니고 대체 어디서 나타난다는 걸까.
그렇다고 네안데르탈이니 크로마뇽인이니 하는 그런 계보에 있어서의 변화를 얘기하는 건 아닌 것 같고.
하여튼 단군이래 우리는 변해 왔고 윗 세대는 아랫세대를 바라보며 "요새 애들은 왜 이래?"를 거듭해 왔다.
언제인가 X세대니 뭐니 하며 세대를 가르는 얘기들은 있었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신인류라는 거창한 단어를 썼을 리도 없을 터이다.
물론 그냥 하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 그런데... 왠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때쯤이면 20세 성인이 될 아이들을 길을 가다가도 무심코 한번 바라보게 된다.
언젠가부터 우리가 살아온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올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물론 역사를 보면 현재에서 바라볼 때는 그렇고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혁명적이었을 변화들이 있어 왔다.
그것들은 대부분 생산에 관련된 효율과 시간의 단축에 대한 것들이었고 그 결과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교통정리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러면 앞으로는 대체 어떤 변화가 있기에, 아니 이미 어떤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기에
그 안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일까.
가끔 지하철에서 문자나 카톡을 보내는 젊은이들을 본다.
양손가락 타법으로 보내는 속도를 보면 현기증이 난다.
우리같이 나이 들어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를 접한 사람과 애기 때부터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은 아이들과는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나 기기에 익숙하다는 것과 같은 단편적인 부분 말고 무언가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초창기 핸드폰은 말 그대로 이동전화로 집전화에 이동성을 부여한 것이 전부였지만
스마트폰은 전화기를 시작으로 컴퓨터, 사진기, CD플레이어, TV, 라디오, 책, 앨범, 게임기, 극장, 우체국, 은행,
녹음기, 수첩, 시계, 내비게이션,............................................ 을 집어넣고 다닌다.
우리가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다양한 것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기능 이외의 것을 하기가 쉽지가 않다.
물론 운동과 같이 몸을 움직이는 활동에는 스마트폰이 직접 들어오지는 않아도 운동 관련 앱을 들여다보면 운동도 멀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면 스마트폰은 우리의 거의 모든 시간을 장악한다.
옛날에 자동차가 나타나며 얻게 된 이동성은 공간의 확대로 이어져 각종 산업이 발전했다고 들었는데
스마트폰의 경우는 거기에 담긴 기능에 관련된 산업을 블랙홀같이 빨아들여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의 모든 시간도 빨아들였다.
예전에는 같이 하던 것들도 이제는 굳이 남이 필요치 않게 되다 보니
관계라는 것이 번거로운 것이 되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져 가고 있다.
누울 자리 보고 눕는다고 하듯이 스마트폰은 그 화려한 기능으로 관계의 생략이 가능하도록 혼자 누울 자리를 멋지게 제공해 내고 있다.
예전의 목욕탕 풍경이다.
옆자리에 있는 사람을 힐끗 보며 "실례지만.. 또는 젊은이.."하고 인기척을 하곤 이내 서로 등을 내어주고 때를 밀었다.
그것이 좋고 나쁘고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목욕탕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관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욕탕에 나 홀로 등밀이 기계가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게 아마 십여 년은 훌쩍 넘은 것 같다.
처음 봤을 때도 저 기계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바라봤었는데 요즈음에는 새삼 바라보게 된다.
저 기계가 '나 홀로'의 어떤 상징으로 보이기도 하고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큰 변화의 시작점같이 느껴진다.
컴퓨터, 스마트폰에서 시작한 첨단기기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나올 것이고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도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인간에게 근접하거나 아니면 능가하는 단계에까지 이를 것이다.
산업화 시대에는 육체를 기계에 내어 주었고 일상은 때밀이 기계에 등을 맡기다가 이제는 머리를 기계에 내어주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나와 너'의 만남은 줄어들고 기계가 펼쳐놓은 광장에서 우리는 '그' 와의 만남을 지속하고 있고 그 중심에는 기계가 거간꾼처럼 앉아 있다.
음악사이트는 나의 취향을 자기 멋대로 판단하여 나만의 라디오를 만들어 주었다고 자랑을 하고, 결혼정보회사는 평생의 운명을 결정할 배우자를 기계가 지정해주고 그 젊은이들은 시내 어느 호텔 로비라운지에 앉아 있을 거다. 결국 머리에 이어 관계에까지, 들어와서는 안 될 영역까지 기계가 들어왔다.
관계는 사람이기 위한 조건이다.
형식이나 빈도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서 내가 마모될 수 있을 정도의 접착이 있느냐이다.
그 관계에서 우리는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얻어 낸다.
나와 너는 정면의 마주 보기이며 무조건적이다.
기계와 같은 어떤 매개체를 통해 만나는 너는 너가 아니고 그에 가깝다.
무엇인가가 관계의 중간에 들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없어지면 그 관계는 소멸된다.
우리가 마주 앉은자리가 그를, 그것을 계속 애기해야 이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나와 너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일 때만 나와 너가 될 수 있고 존재는 서로에게 변수이어야 한다.
예상치 못한 너의 신호를 수신할 수 있을 때만 너는 나에게 변수가 되고 나는 마모된다.
그렇게 나는 내가 되고 사람이 된다.
스위치를 켜면 기계 광장에서 너를 만난다.
너를 만나고 있지만 나는 너의 아바타를 만나고 너가 아닌 그를 만나고 있을 거다.
스위치를 끄면 그 조차도 내 안에 남아있지 않고 사라진다. 너는 내가 불러야만 존재하기에 나의 변수가 될 수 없다.
다시 스위치를 켜면 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결국 일방의 필요에 따라 on-off 되며 점멸되는 점에 불과하다.
선을 그릴 수가 없기에 면도 없고 축적이 없기에 높이를 올리며 나와 너의 성을 쌓을 수 없다.
서로는 아무런 중력을 느낄 수 없고 깃털처럼 가볍다.
너와 내가 만들었던 그 많은 시간 속에 간헐적인 '접속'은 있었고 '관계'는 없었다.
관계의 소멸이 신인류 등장의 배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과의 관계가 생략되고 자기 홀로 구축한 아바타를 자기로 착각한다면 가히 신인류의 등장이라 할 수 있겠다.
공동체가 붕괴되니, 핵가족이니, 가족의 해체니 하는 얘기들이 있었지만 관계의 해체는 어떤 세상을 불러올지 모르겠다.
섬처럼 떨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네트워크란 이름으로 기계가 우리의 관계를 조작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너'가 나에게 주었던 그 소중했던 마모를 대신해 기계가 Big data를 내밀며 <enter> 키를 누르면
나의 마모는 '너'가 아닌 기계의 프로그램에 의해 전자동으로 진행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자아가 만들어진 인간, 동물세계와 같이 한 개체수에 불과한 인간이 나온다면 누구라고,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남과 관계하면서 관계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기계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기계에서 벌어지는 관계와 닮았다.
남으로부터의 신호를 받지 않으니 간결하고 명쾌하고 똑똑해 보이기까지 한다.
나의, 너의 말들은 그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고 그냥 허공에 나열된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신인류의 등장을 지금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그렇다 치고
오늘은 일단 거울에 나를 비춰 봐야겠다.
누구지~? 누구지~? 했던
그 신인류가
혹시 거울 속에 있는 지를..
.
으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