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pace 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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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가면 영양이고 왼쪽은 울진으로 가는 길이다.

바닷가에서 회를 한 접시 하고 싶으면 왼쪽 길을 선택해야 한다.

이 갈림길을 놓치더라도 울진으로 갈 수는 있겠지만 멀리 돌아야 한다.

지나다니던 길이지만 바닷가에서 회를 먹어야겠다면 여기서의 선택이 무겁다.


길은 그 자체보다는 어느 곳에 이르는 통로로서의 효용으로 말해진다.

남에게 길을 물을 때도 "이리로 가면 어디가 나오나요? " 아니면 "어디 가는데 이 길로 가야 하나요?"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길은 두 지점을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졌기에 목적지를 떼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 듯하다.

도착과 상관없이 길에 머물러 있다면 노숙자이거나 순례자 정도 되겠다.


길을 나서면 이리로 저리로 선택을 하게 된다.

목적지를 향해 계속되는 그 선택의 과정은 우리 삶의 시간들과 닮아 있다.

뭘 먹을 거냐부터 시작되는 소소한 일상의 선택들,

주변 인간관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숱한 선택,

사랑과 일 그리고 인생의 큰 선택까지..

어떻게 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해 간다는 것과 다름이 아닐 듯하다.

그 선택의 점들을 연결하면 뿌옇게만 보이던,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추상화 같이라도 나올 듯하다.

다른 사람의 캐릭터를 잡아 탁월하게 연기해 내는 외국의 유명 배우의 "나는 나를 연기할 자신이 없다"는 고백처럼 남은 아는 듯 하지만 정작 자신은 모른다.

아무리 또 다른 것이 있다고 우겨대도 결국 내가 만들어 낸 선택의 결과물들이 나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고 객관적이다.


살아오며 삶의 궤적이 될 수 있는 선택들을 어떻게 했을까, 무엇을 가지고 크고 작은 결정을 내렸을까.

순간의 감정에, 끝없는 욕심에, 불필요한 공명심에,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 현실을 이유삼아, 이것이 이유임에 다른 것을 핑계 삼으며 바라봐야 할 곳을 보지 못 한채, 세월 지난 지금에서 보면 꽤 중요했던 선택을 내렸다.

회 한 접시 먹으러 간다면서 봉화보다 더 내륙인 영양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고 그럼에도 울진에 도착할 수 있다 고집부렸다. 그때 이유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그럴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 시선은 안타깝다.

앞을 바라봐야 할 때 고개를 숙이고 지금에, 그 즉시성에 함몰되었다.

실행의 단계에서는 지금에 몰입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질 지금을 떠올려 보면 길을 선택하기에는 지금이란 것이 그다지 좋은 소재가 아닌 듯하다.

여기 아닌 저기에, 너 아닌 그에.. 그저 지금의 반대를 향해 선택은 감행되었다.

거기를 향해 지금이 사용되고 연결되어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폭발하며 파편이 되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또 다른 출발을 강요했다.

그리고 길 위에 펼쳐진 그 숱한 지금을 다시 마주한다.

도착의 안도와 출발의 축제는 찰나이고 우리는 또 길에 서 있다.

어디에 속하지도 않고 중간에 떠 있는 이 시간이 당황스럽다.

떠나온 곳을 후회하고 도착할 곳은 아득하다.

떠나야 했던 지금이 사라지고 낯선 지금이 마중한다.


길을 나선다.

멀리 보이는 '거기'를 몇 번을 보고서 안주머니에 넣는다.

거기를 잊는다.

지금을 마련한다.


거기로 지금을 소모하지 않고 지금의 더하기가 거기에 이르는

평범한 상식이 나의 길 위에 놓여 있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게 도착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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