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 없이 출근하던 날

플란다스의 개 다시 보는 남자 #시작

by 김현호

이어폰 없이 나서던 그 날,


문득 그 시절 *만화영화가 떠올랐다. 학교, 학원 마치고 돌아와 혼자 38번 투니버스를 보는 게 그저 행복하던 꽃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만원 짜리 한 장을 두고 동네 마실 나가셨다. 페리카나 양념치킨 한 마리 배달시켜놓고 소파에 파묻혀 배달 아저씨 오시기만 기다렸다. 치킨값으로 만원을 드리면 거스름 돈으로 3천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아기 젖병 빨듯 빨면서 만화영화를 봤다. 양념치킨엔 역시 콜라다. 치킨무는 그때부터 부족했다.


*어렸을 땐 애니메이션Animation이고 카툰Cartoon이고 뭐고 간에 다 만화영화였다.


파트라슈는 덩치가 컸고, 네로는 밝았고, 주제곡은 신났다. 주제곡을 부르면서 방방 뛰었다.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벨기에 플란다스 지방의 흙길 위를 뛰는 기분이었다. 노래 중간에 '파트라슈~'라고 낭창하게 부르면 덩치 큰 복실한 개가 와락 달려들어 털을 부빌 것 같은 4Dx 영화 같은 주제곡이다.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랄라 라랄라라"



출근길,


멜론 플레이리스트를 잽싸게 연다. 걸그룹 음악을 재생. 기분 좋은 상상을 머릿속에 밀어 넣기 위해 소녀들의 수줍은 사랑 노래를 귓구멍에 때려 박는다. 묵직해진 아랫배 무게를 실은 발걸음을 떼는데 이만한 게 없다. 아침, 도무지 이어폰을 찾지 못한 날이었다. 좁은 집구석에 어디다 뒀는지 도통 보이지 않는다. 방언 터지듯 '어따 놨지'를 외치며 자켓 안주머니, 바지 주머니, 가방, 세탁기를 뒤진다. 하아.


출근은 해야되고, 몸은 무겁고, 기분은 그닥이고, 소녀들은 그립고, 출근은 해야되고, 이어폰은 어딨지, 몸은 무겁고...


납치된 딸을 찾는 리암 니슨의 기분으로 집구석을 뒤지지만 도통 나오지 않는다. 안 그래도 무거운 발걸음인데 더 무거울 것 같다. 감정이 출렁인다.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되니까, 오늘은 그 천 번 중에 한 번을 추가한다. 한 번을 추가하니 아픈데, 아프니까 청춘이니까 오늘도 난 청춘이다. 멘탈이 이상해진다. 어떻게든 기분이 업되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양념 치킨을 기다리면서 흥얼거렸던 그때의 나를 불러온다.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랄라 라랄라라"




마른 광화문 보도블록을 벨기에 플란다스 지방의 흙길로 느껴지게 하는 노래다. 조금 기분이 나아진다. 퇴근하며 스마트 폰으로 플란다스의 개를 찾아봤다. 아. '플란다스의 개'가 아니라 '플랜더스의 개'였다. Orange를 '어륀지'로 발음해야 됐던 교육 세대가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선진적인 발음이었다. 그래도 입엔 플란다스의 개가 착착 감긴다. 암튼, 플란다스의 개를 찾아봤다.


나와 비슷하던 주인공 네로는 조카뻘이 되어있고, 할아버지는 내 아버지 나이다. 파트라슈는 덩치가 조금 작아진듯했다. 갑자기 기분이 싸하다. 매운맛, 조금 매운맛, 중간맛, 순한맛 중 순한맛 골랐는데 그래도 매워서 쿨피스를 찾는 그런 배신감과 함께 뭔가 기분이 아리다.


네로와 할아버지 옷은 남루했고, 찢어진 옷을 기워 입었다. 파트라슈의 털빛은 누렇고, 눈빛은 밝은데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아, 이제 기억났다.


주인공은 죽는다.

할아버지도, 네로도, 파트라슈도 죽는다.



어린 감수성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인공의 죽음을 다룬 만화영화였다. 말 그대로 동심파괴. 찢어지게 가난해서 결국 삶도 찢어지는 내용이었다. 아침에 밝은 주제곡을 흥얼거리면서 출근했는데, 결국 주인공이 죽는 만화영화의 주제곡이었다.


알싸한 기분에 플란다스의 개를 정주행 하기로 했다. 주인공이 죽을걸 알고 보는 만화영화라니. 그 시절 나는 무슨 만화영화를 본 것이었을까. 7천 원짜리 양념치킨에 행복하던 시절의 나는 자라서 양념치킨을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그렇게 행복하진 않은 것 같다.


그때의 나를 다시 찾는 기분으로 양념치킨을 시켰다. 그때처럼 거스름 돈으로 3천 원을 받았다(물론 2만 원을 내고). 바른 자세로 치킨을 영접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에 기분이 조금 들떴다.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랄라 라랄라라"


반갑다 파트라슈.



Ps1. 아침에 그 이어폰 결국 찾았다. 조금 행복해졌다.


Ps2.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영국 작가 위다Ouida(본명은 마리아 루이스 드 라 라메)의 동화가 원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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