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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Nov 05. 2019

02. 9호선을 처음으로 탔던 날

진짜 지옥같네(발음 주의)


누구에게나 첫 경험이 있다. 나도 그랬다. 9호선을 처음으로 경험하던 날의 날카롭고도 생생한 기억. 그날 나는 출근하기 위해 김포공항역에서 9호선을 탔다. 30분 남짓 가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리는 여정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김포공항역은 9호선 급행 첫 번째 역이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차고지에서 막 나온 텅텅 빈 열차가 “처음으로” 승객을 태우는 역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 출발역이니까 앉아갈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택도 없는 소리다.)


그뿐만이 아니다. 9호선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몰랐던 나는, “뭐, 앉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기껏해야 30분인데 뭐. 요즘은 하이힐도 안 신고, 책도 핸드폰으로 보니까 서서 가도 상관없어. 회사에서 하루 종일 앉아서 근무하는데, 서서 가면 운동도 되고 좋지 뭐.”라는 요망한 생각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깜찍한 생각은 나의 9호선 첫 경험과 함께 와르르 무너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요상하고도 민망한 이런 자세로 고속버스터미널 역까지 오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런 요상한 자세로 고속버스터미널 역까지 오게 된다.


나의 예상은 전부 다 틀렸다. 나는 앉아갈 수 없었고, 서서 가는 것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김포공항역에서 고속터미널역까지 가는 동안 나의 영혼은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탈곡기 안에 벼이삭처럼 말이다. 약 30분 동안 내 알맹이는 볍씨처럼 털려 나갔고, 고속버스터미널 역에서 내릴 때에는 껍데기만 간신히 남아 떠밀려 내리게 되었다.


도대체 9호선 급행열차가 어떻길래?


일단, 김포공항역은 “출발역”인데 앉을 수가 없었다. 출근길 김포공항역에는 이미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줄은 놀이공원 매표소 앞처럼 구불구불했고, 그마저도 더 이상은 줄 설 자리가 없어서 빈 공간에 대충 서 있었다. 근처에 4차원 공간이라도 숨어있는지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사람들이 나타났고,  승강장의 사람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실 계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과입니다.) 지하철 한 칸에 좌석 수는 (임산부 배려석과 노약자석을 제외하면) 40개 정도 되고, 사람들은 총 8줄로 탑승하니까, 40 나누기 8 하면 먼저 탄 5명 정도까지만 앉을 수 있다. 5명 안에 들지 못한 내가 앉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앞에서 5번째 안에 들었다고 해도 앉지 못했을 것이다. 9호선에서 앉아가기란 “서바이벌 의자 뺏기 게임” 같아서, 의자에 앉기 위해서는 약간의 스킬이 필요하다. 그리고 9호선이 처음인 나에게 이 스킬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첫날에는 이러나저러나 서서 갈 수밖에. (이 스킬에 관한 것도 차차 풀도록 하겠다.) )


그리고 9호선에 서서 가는 것은 전혀, 전혀 전혀, 즈언혀 괜찮지 않았다. 그날 나는 피지컬이 후져서 몸싸움에서 밀리는 운동선수처럼 한없이 밀려났다. 다리에 딱 힘을 주고! 자세를 낮추고!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인파에 어버버.... 하며 비틀비틀 밀려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내 왼쪽 무릎이 앉아있는 아저씨의 두 무릎 사이에 있었다.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만 앉아있던 나도 아저씨도 서로 모르는 척했다. 이제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백팩이 내 등을 떠밀었다. 허리 근육마저 시원찮은 나의 상체는 앞으로 고꾸라졌고, 유리창을 손으로 짚어 더 민망한 상황은 간신히 면했다. (코어 근육이 이래서 중요하다) 상체를 일으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의 백팩이 나를 계속 밀고 있었기 때문에 버티는 것만 해도 버거웠다.



결국 나는 왼쪽 다리를 앉아있는 아저씨 양쪽 무릎 사이에 두고, 오른팔은 앞에 있는 창문을 짚은 요상한 자세로 고속버스터미널 역까지 오게 된다.


이렇게 말이다. 아저씨도 민망한지, 계속 눈을 감고 계셨다.




이날 나의 기분이 어떠했느냐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가난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부잣집 외동딸”이 된 기분이었다. 옛날 주말 드라마에 종종 나왔던 유치한 클리셰 말이다. 사랑만 있으면 반지하에서도 살 수 있다며 남자 따라 가출했다가, 난생처음 겪는 불편함에 놀라 다시 집으로 도망가는 철없는 외동딸, 딱 그 모양새였다고 할까.


내가 만원 버스를 안 타본 것도 아니고, 장롱면허 보유자로서 뚜벅이 경력만 이십 년은 족히 넘는다.  손잡이도 변변찮은 고속버스에 끼여서도 집에 와 봤고, 2호선으로도 출퇴근해봐서 나름 프로페셔널한 대중교통 이용자라고 생각했었는데 9호선은 레벨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그날(첫날) 받은 충격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서, 한 동안 “급행” 열차 대신에 시간이 훨씬 더 걸리는 “일반” 열차를 타고 출근했다. 아침에 30분은 더 일찍 출발해야 하고, 저녁을 8시 반에 먹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9호선 “급행”열차가 어떻길래 이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스토리는 다음 글에서 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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