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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Nov 11. 2019

05. 9호선의 고행자들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그들.

지금까지 9호선이 왜 지옥 같은지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였다. 얼마나 붐비는지, 얼마나 짓눌리는지, 앉아가는 것에 얼마나 집착하게 되는지 말이다. 더 무서운 점은 이 지옥을 주 5일 꼬박꼬박 겪어야 한다는 점이다. 언제 끝난다는 기약도 없고, 오늘은 좀 덜 붐빌 것이라는 희망도 없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다. 9호선 출퇴근러들의 표정은 생각만큼 불행하지 않다는 점이다. 옆 사람의 뜨뜻하고도 묘하게 기분 나쁜 체온을 느끼고 있자면, 짜증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의외로! 9호선 출퇴근러의 표정은 짜증난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에 초연한 부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9호선은 9호선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사람들은, 열차의 출렁임에 유연하게 몸을 맡기고, 해탈한 표정으로 각자의 스마트폰에 집중한다. 유튜브를 보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을 하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한다. 정말 붐빌 때에는 이마저도 힘들기는 하지만 대부분 어떻게든 공간을 내어 핸드폰을 한다.


그도 아니면 명상하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계시는 분도 있다. 물론 명상을 하는지, 괄약근 조이기 운동을 하는지, 못다한 잠을 주무시는지 알 수는 없지만, 출발을 하면 하는 대로, 정차를 하면 하는 대로 휘적휘적 몸을 맡기며 베테랑 뱃사람처럼 리드미컬하게 서 계신다.


열차의 움직임과 하나가 되어 내가 열차고 열차가 내가 된 물아일체 경지에 오른 나의 동지들은, 이 고통이 유한하고도 무한한 고통임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아무리 길어야 50여 분이면 끝나는 유한한 고통이지만, 퇴사하기 전까지는 주 5일 계속되는 무한한 고통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나의 동지들.


나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에 공감하곤 한다. 다만 이 말은 힘든 상황을 견디고야 마는 캔디 같은 근성을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적응하지 않으면 너무 괴롭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하고야 만다는 서글픈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나의 9호선 동지들은 짜증 내는 것조차 지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짜증 내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매일매일 짜증 내기에는 에너지가 달려도 한참 달린다.


그래서인지, 출근일 9호선은 절간처럼 고요하다. “슈웅......”하는 엔진 소리와 안내방송을 빼고는 별다른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화롭디 평화로운 지옥이다.




+에필로그


간간이 이런 고요를 대차게 깨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9호선 뉴비*들이다.

뉴비: 뉴비(newbie, newb, noob, n00b)는 풋내기, 새로 온 사람, 어떤 직업에 대한 무경험자를 지칭하는 신조어이다.(출처: 위키피디아)


말 그대로 9호선 풋내기들, 아직은 9호선이 이지경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뉴비들의 짜증과 비명은 평화로움 고요를 깨뜨리는 주범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뉴비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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