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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Nov 09. 2019

03.  출근러여! 9호선 급행열차를 타라

급행을 탄 대가는 가혹하지.

지옥같다(발음 조심)는 점을 빼고 9호선에 특이한 점이 또 뭐가 있냐면, 9호선에는 “급행”열차가 있다는 점이다.  9호선에는 “급행”열차와 “완행”열차가 있는데, 말 그대로 급행열차는 주요 역에만 정차하는 대신에, "속도가 빠른” 열차이고 완행열차는 모든 역에 정차하는 대신에 속도가 느린 열차이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걸리는 시간 차이가 크다. 김포공항역과 고속버스터미널 역을 오가는 나의 경우, 급행을 타면 30분이면 갈 것을, 완행을 타면 50분이 넘게 걸린다. 거의 2배 가까이 걸리는 셈이다. 그런고로 대부분 출퇴근러들이 완행보다는 급행열차를 탄다. 심지어 타고 내리는 역에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경우에는, 일단 급행을 타고 최대한 간 다음에, 완행열차로 갈아타서라도 기어이 급행을 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연하게도 급행열차는 엄청나게 붐빈다.


문제는, 대부분의 9호선 출퇴근러에게 급행열차는 일종의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급행열차의 속도가 당연하고, 완행열차는 속 터질 만큼 느리게 느껴진다. 영화 부당거래에서 류승범씨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고 했다. 급행열차는 일반열차에 비해 특별히 빠르게 데러다 주는 일종의 “호의”인데, 이용하다 보니 9호선 하면 "급행"은 일종의 “권리”처럼 느껴진다. (사실 9호선의 경우 "완행" 열차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는 말이다. “완행”이 아니라 “일반”열차가 정식 명칭이다. )


하지만 나는
누구나 권리라고 생각하는 이 “급행”을
한동안 포기하게 된다.


첫날의 충격과 공포를 겪은 이후이다. (이전 글 참고) 시간을 단축하는 대신에, 겪어야 하는 것들을 나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급행에 타면 각오해야 할 것들이 너무 무섭기 때문이다.


일단, “발 디딜 틈이 없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경험해야 한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 발을 디딜 공간이 마땅히 없어서 무릎이 돌아간 기묘한 자세로 서서 가는 경우도 있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내리고 나면 벌이라도 선 듯 온 몸이 뻐근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열차 안에서 이 상황을 견디기 위해 핸드폰이라도 하려면 처음이 탈 때부터 자세를 잘 잡고(?)타야 한다. 일단 9호선에 타고나면, 가방은 물론이고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도 꺼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양옆, 앞뒤에서 꾸욱꾸욱 밀어 대기 때문에 엄청난 민폐를 끼치지 않고는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낼 수 없다. 그리고 어찌어찌 꺼낸다고 하더라도 코앞에 핸드폰을 애매한 각도로 놓고 봐야 한다.


그리고 영어에서 배운 능동태와 수동태도 몸소 겪어야 한다. 9호선은 “타는”것이 아니라 “타지는 것? 탐을 당하는 것?”이다. (한국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말 그대로이다. 내 의지에 의해서 열차를 타는 것이 아니라 뒤에 사람들에게 밀려서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열차에 타 있게 된다. 내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것은 적응하고 나면 의외로 괜찮다. 처음에야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사람이 좀비만큼 무섭지만 인파에 몸을 맡기고 비틀비틀 밀리다 보면 “짠”하고 승차해 있다. )


나는 전투력이 0에 수렴하는 초식동물이라서 이런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결국은 아침잠에 굴복하게 된다. 늦잠을 자서 완행을 타면 지각을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급행을 한 번 타고나니, 매일 아침 “30분 더 자고 급행 타지 뭐..." 하면서 늦게 일어난다. 그래서 요즘은 급행을 탄다.


다행히도 요즈음은 김포공항역에서 곧잘 앉아가게 되었다. 뭐든지 하다 보면 잘하게 된다더니, 9호선 자리뺏기 싸움에서 이기는 기술이 쌓였다는 말이다. 9호선 김포공항역에서 어떻게 가면 앉아갈 수 있는지, 눈물겨운 노하우는 다음 글에서 풀도록 하겠다.




+ 에필로그
내가 "완행은 확실히 열차 안에 사람이 적은 편이야"라고 했더니

9호선에 대해 잘 모르는 내 지인이 “그럼 완행열차 타면 앉아서 갈 수 있어?”라고 나에게 해맑게 물어보았다.

그래.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 나는 빙긋 웃으며 그 지인에게 알려 주었다.




아니, 완행열차를 타면
'인간답게' 서서 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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