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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Nov 17. 2019

09. 9호선 짬바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점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9호선으로 출퇴근한다는 것은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고생길일 뿐이다. 개발도상국에 가서 봉사하는 것은 힘들지만 보람이라도 있지, 9호선 출퇴근은 힘들기만 하다. 게다가 나만 특별하게 겪는 고통도 아니다. 매우 많은 평범한 사람, 갑남을녀, 장삼이사, 필부필부가 겪는 일이니 자소서에 쓸 수도 없는 쓸모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것이 참 알 수 없는 것 같다.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했던 9호선 출퇴근조차 어딘가에 도움이 되는 면도 있기는 있더라. 물론 그 도움이라는 것이 워낙 미미해서 언급하기도 민망하기는 하다. 그래도 소소한 도움이나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기분이 제법 좋았기에 여기에서 적어본다. 일면 9호선 짬바*이다. 

*짬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의 줄임말이다. 오랜 기간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분위기


그 날은  점심 먹고 회사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고층건물에 위치해 있는데 늘 그렇듯이 점심시간만 되면 엘리베이터가 매우 붐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라는 것이 지하철과 달라서 줄을 설 공간이 마땅찮다. 게다가 여러 대의 엘리베이터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올지 모르니 서서 기다리는 사람은 눈치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계속 볼 회사 사람들을 밀치며 게걸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매너리즘에 빠진 움직임"이다. 나는 9호선 짬바를 이용해서 무리하게 빨리 타려는 티는 나지 않으면서 민첩하게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였다. 비단 엘리베이터뿐만이 아니라 마을버스를 탈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인생 전체에 민첩성이 +1 된 느낌이랄까? 


이 일을 계기로, 9호선 짬바가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장점이 몇 개 더 있었다! 

일단, 대부분의 대중교통수단을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빨리 타고 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중심도 잘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9호선의 경우에는 손잡이를 잡는 것조차 지열해서, 내 두 다리로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물론 워낙 사람이 많아서 넘어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종종 급하게 속도를 줄이거나 할 때에는 우르르하고 한쪽으로 쏠리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허벅지에 딱 힘을 주고, 중심을 잡는 버릇이 생겼는데, 이게 어떤 대중교통수단을 타든 유용 하다. 현재는 무산되었지만 "입석으로 가는 비행기"가 나온다면 9호선 짬바로 꼭 이용해 볼 예정이다.  


그리고 요즈음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잘 걷는다. 나는 경기도 xx시 xx읍 xx리 출신이다. 사투리는 안 쓰지만 시골 출신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강남이나 광화문같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물 흐르듯이 잘 섞여 걷는 것이 어려웠었다. 특히 걷다가 방향이라도 틀라 치면 매번 부딪히기 일쑤였다. 그런데 9호선을 이용하고 나서는, 정확히 말하면 고속버스터미널역을 이용하고 나서부터는 아주 노련하게 잘 섞여 걷는다. 


디펜스 실력도 늘었다. 줄을 설 일이 있을 때 새치기하려는 진상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새치기하지 못하게 어깨로 사전에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되었다. 버스가 좀 붐비거나 차가 좀 막히더라도 이 정도면 9호선에 비해서 양호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확실히 짜증이 덜 난다. 승강장에 사람이 엄청 많아도 9호선보다는 적네 하면서 넘긴다. 지하철에서 잡상인이나 포교 활동하는 종교인이 내 고막을 때릴 때에도 괜찮다.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을 만큼 덜 붐빈다는 것이 감지덕지일 뿐이다. 


이상이 내가 생각한 9호선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점이다. 동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나 장점을 많이 찾다니, 나는 진심으로 뿌듯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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